INTERMISSION : Behind The Scenes (3)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 아니 아직 만 5세가 되지 않은 레안두르는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문장이 떠오른 그 순간 이후, 그의 눈과 귀에 담은 모든 것이 완전한 형태로 기억되었다.
완전 기억 능력(Photographic Memory).
단어 그대로 보고 감각에 포착된 모든 것을 마치 영상처럼 기억하고 저장하고,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집중하는 사물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책을 읽었다고 했을 때, 책에 내용은 물론, 그 단어가 몇 페이지였는지, 책에 묻어 있는 얼룩이 어떠한 형태였는지 등, 그의 시각에 담긴 모든 장면을 다시 꺼내 볼 수 있었다.
“기억이 가득 차 머리가 터져 버릴까 봐 두려워하던 아이가 설마 테스티모니움이었을 줄이야.”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스티모니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적(異蹟)을 보일 것.
이적이 발현되고, 유지되고, 제한되는 조건이 있을 것.
바로 그 증거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 맞은편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였다.
“코트디부아르의 그 소녀도 그러했지.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지. 그래서 베드로 신부가 가게 된 것이고.”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모카 포트에 불을 붙였다.
“한 잔, 더 할 텐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과한 것 아닙니까?”
베드로 신부의 걱정스러운 말에,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탈리아인의 피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다시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잔에 받아 들고 와서 1분 정도의 커피 타임을 가진 다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나서야 다시 대화가 재개되었다.
“5년이나 흘렀군. 참 빠른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참 늦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 누구였지? 그때 그 저격수 이름이?”
“원아이드 잭이었습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자를 찾아 태국으로 간 거였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아이드 잭. 일명 스레브레니차의 마지막 아들이라는 이명을 가진 저격수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름을 떨친 저격수였다.
사실 바티칸이 저격수에 관해서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저격수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전쟁범죄자 쪽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바티칸이,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와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원아이드 잭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바로 우연히 포착된 하나의 소문 때문이었다.
‘원아이드 잭은 눈 하나와 사격 능력을 맞바꾸었다.’
눈 하나를 잃으면 사격 능력을 얻는다는 발현 조건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문이었다.
바티칸에서는 테스티모니움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를 찾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되고 그의 흔적이 사라졌고,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에 동남아시아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가 포착되었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뜬소문을 뒤따르는 사람들이지.”
안토니오 주교가 아쉬운 표정으로 빈 커피 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앞으로도 그리하겠지만, 만개의 거짓을 넘어야 하나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하겠지.”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아이드 잭은 시체로 발견되어 버렸고, 또 다른 테스티모니움의 후보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던 식양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런데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주님의 안배란 하찮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군.”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언제나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 남자가 테스티모니움이 맞다면, 주께서 인도하시겠지요.”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모카 포트로 다가가며 말했다.
“참아 보려 했는데, 제 몸속의 브라질인의 피가 한 잔 더 마시라고 하는군요.”
안토니오 주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안토니오 주교에게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미소 지어 주며 말했다.
“주교님은 참으시죠. 세 잔을 마시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
국가정보원 김훈 원장이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을 때 1층 로비에서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김훈 원장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 정진웅이 김훈 원장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김훈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와 답을 동시에 표했다.
“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진웅 민정수석이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좋지 않군.
김훈 원장은 앞서 걸어가는 정진웅 민정수석의 등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했지만, 판사나 검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바로 변호사로, 노동 및 인권 전문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인물, 한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대표 변호사였던 남자가 김훈 원장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국정원 요원과 인권변호사라는 것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자신이 가진 신념에 따라 조국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좁혀졌다고 해도, 매끄러운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김훈 원장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단지 그가 인권변호사 출신이어서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정수석이라는 자리가 검찰, 경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의 5대 사정(司正) 권력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그런 민정수석이 자신을 마중 나왔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원의 친구이기도 하고.
김훈 원장은 정진웅 민정수석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불편함을 모르는 듯, 앞서 걸어가던 정진웅 민정수석이 입을 열었다.
“요즘 정신없이 분주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훈 원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요즘은 아주 정신없이 바쁘네요. 마음 같아서는 두어 달, 전화도 안 터지는 곳에 가서 숨어 있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훈 원장은 정진웅 민정수석의 말에서 자신이 호출된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그를 호출했다. 갑작스러운 호출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호출은 어쩐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정진웅 민정수석의 말에서 그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달했다.
“들어가시죠.”
정진웅 민정수석이 문을 열어 주었다.
김훈은 다시 한번 넥타이를 매만지고는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청와대 본관 2층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 안에는 이미 세 사람이 있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김훈이 모습을 보이자 비서실장과 특별보좌관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대통령은 김훈 원장에게 갑작스럽게 호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자리를 권유했다.
김훈이 자리에 앉자 대통령은 추가적인 말 없이 그의 앞에 놓인 서류 파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말없이 서류를 읽었다.
김훈도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작성한 문서인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지만,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상황에 대통령이 문서를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읽어 보세요.”
대통령이 손에 든 서류를 김훈 원장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김훈 원장은 서류를 건네받았다. 서류 상단에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했다는 표기가 있었다.
김훈 원장은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문서 안에는 최근 10년간 국정원 내부 인사이동에 대한 분석과 모용진이 어떻게 경쟁자들을 끌어내리면서 1급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었는지, 매주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서류를 다 읽은 김훈 원장은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명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나를 쳐 내기에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를 눈빛에 담아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그런 김훈 원장에게 대통령이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김훈 원장은 다시 종이를 받아 들었다.
상단에 ‘한국 국가정보원 최근 동향’이라는 영어 표제가 달려 있었다.
김훈이 일전에 보았던 서류였다.
김승섭의 신원 정보를 노출하기 위해, 유만호가 작성하고 직접 다크넷에 올렸던 바로 그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김훈 원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유만호가 작성한 그 보고서가 맞았다.
“누가 작성했습니까?”
서류를 다 읽은 김훈 원장에게 대통령이 물었다.
“유만호 위원입니다.”
김훈 원장이 문서를 다시 대통령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제가 지시했습니다.”
김훈 원장이 답했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김훈 원장에게 피우겠냐고 물었다.
김훈 원장은 괜찮다고 답했다.
“정보위원회라는 것이 말입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의 말이 담배 연기와 함께 천천히 집무실에 퍼져 나갔다.
“이름 없는 별을 더는 새기지 않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김훈 원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김훈 원장이 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원장을 그리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원장은 원장 자리에서 가장 합당한 선택을 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말했다.
김훈 원장은 대통령의 화법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대통령의 말이 절대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유감이군요.”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미국에서 문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대통령이 말한 문 박사는 조금 전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있던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의미했다.
미국 백악관의 스페셜 어시스턴트 제도를 차용한 특별안보보좌관은 대미, 대 유엔 특사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내 불찰이겠지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으니. 하지만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 것이 원장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떨이에 재를 떨었다.
김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떨이에 떨어진 재에서 마지막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끝까지 몰랐으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겠군요.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봉합하도록 합시다.”
대통령이 말했다.
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김훈 원장이 말했다.
“나중에, 나도 여기를 나오고, 완전히 자유인으로 돌아갔을 때, 그때 소주나 한잔합시다.”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가 전부 다 끝났다는 의미였다.
김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통령이 김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훈이 그 손을 잡았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그대로 원장이 이 나라를 위해 힘써 줬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대통령이 김훈의 손을 잡고 말했다.
김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악수를 마친 김훈은 몸을 돌렸고,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수석비서관과 민정수석, 특별보좌관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김훈은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지나쳐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