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MISSION : Behind The Scen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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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복도였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어울릴 만큼 고요했다.
길을 제외하고는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고요한 복도를 길은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복도를 걸었던 시기가 5년 전이었다. 그 5년간 이 복도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1587년 지어진 이 건물에 있어서 5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모래시계 안의 한 톨의 모래처럼 찰나에 불과했다. 그 5년이 50년이 되고, 500년이 된다면 이곳도 조금은 변하겠지만, 아마도 길이 살아 숨 쉬는 시간 동안 스테인드글라스에 의해 쪼개진 햇살이 복도를 물들이는 것도, 오래된 건물 특유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 나오는 것도, 인적이 없는 것도, 사박사박 하는 발소리가 복도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5년 전과 비교해 유일하게 다른 것은 길의 복장뿐이었다.
면바지에 반소매 캐주얼 셔츠, 방콕에서 그가 입던 복장이었다.
그 복장으로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고, 로마 공항에 내려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사실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그는 영어 강사 피터라는 신분으로 5년을 살았고, 그의 거처를 포함해 이곳에서 그의 흔적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처음 방콕에 갈 때만 해도, 그곳에서 5년을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달, 길어 봤자 1년 정도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5년이나 그곳에 있었다.
길은 복도를 계속 걸어가며 지난 5년을 빠르게 회상했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애초에 태국에 갔던 최초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5년이라는 시간의 마지막 며칠, 그 며칠 사이에 의미를 찾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안배를 하신 겁니까.”
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계속 복도를 걸어갔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걸어, 그가 가려고 했던 장소, 건물 3층, 동측 구역, 소수의 허가받은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구역 입구를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Corpo della Gendarmeria dello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라는 긴 이름을 가진 바티칸 헌병대 대원이었다.
길이 다가가자 그가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신분을 증명하라는 의미였다.
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5년 동안 바뀐 것이 또 있었군.
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기밀 구역 출입 허가서와 그의 진짜 신분증을 제시했다.
헌병 대원은 정중하게 서류와 신분증을 확인한 후, 무전으로 다시 한번 서류와 신분증의 사실 여부를 교차 검증했다.
5년 전, 이곳을 지키고 있던 헌병대원도 언제나 같은 절차를 밟았다. 길의 얼굴도, 신분도 알고 있음에도, 언제나 서류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교차 검증을 하고는 했었다.
이 구역은 그런 장소였다.
무전기에서 서류와 신분이 이상 없다는 무전이 흘러나왔다.
답을 들은 헌병 대원은 다시 길에게 신분증을 건네주며 말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베드로 신부님.”
길, 아니 바티칸시국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 제13문서보관실 소속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헌병대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예를 표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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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보관소 안으로 들어온 베드로 신부는 익숙한 공간을 가로질러, 익숙한 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제13문서보관실 실장의 집무실. 이곳이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의 목적지였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문 앞에 서서 복장을 점검했다.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올 것을 그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 너머에 계시는 분이 원하는 것은 사제복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찾아와 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노크하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고 말하는 대신, 직접 문을 열어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를 맞이한 방의 주인, 수단을 입고, 자주색 파시아를 허리에 두른 장년의 남자.
바티칸 도서관(Bibliotheca Apostolica Vaticana) 비밀문서고(Archivum Secretum) 13문서보관실 실장, 조반니 안토니오(Giovanni Antonio) 주교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베드로 신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베드로 신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손가락에 껴 있는 주교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무릎절(genuflexio). 주교에게 존경을 표하는 가톨릭의 전통 절차였다.
“베드로 신부도 참 고루하구먼. 요즘은 성하께서도 반지에 입 맞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네.”
그런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무고하셨는지요.”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그런 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면서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특정 교구를 책임지지 않는 명의 주교(名儀 主敎, Episcopus titularis)였다.
아무리 명의 주교라고는 해도,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집무실은 주교라는 직함이 어울리지 않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무실에는 책상과 그 위에 올려진 컴퓨터, 그리고 벽면을 가득 메운 책과 그의 외투가 걸려 있는 옷걸이가 전부였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이라고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모카 포트(moka pot)뿐이었다.
여기도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군.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주교의 집무실을 둘러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5년 전,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바로 이 장소에서 타운외국어학원의 영어 강사 피터 겸 정보상 길의 신분으로 태국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정식 직함은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 13문서보관실 실장 겸 고대 경전 해독가였다.
해독가는 주교에게 어울리는 직함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교회최고서기관(Supernumerary Apostolic Protonotaries) 칭호를 받은 최고 등급 몬시뇰(Monseigneur)이었다.
바티칸 도서관 관장인 추기경 사서(Cardinal Librarian)의 직계가 대주교인 것을 고려하면, 명의 주교이자 최고 등급 몬시뇰인 안토니오 주교가 해독 일을 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를 아는 사람 대부분은 그가 한직으로 밀려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박물관 관장 자리를 놓고, 현 추기경 사서와의 권력투쟁을 벌이다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권력투쟁을 벌이지도,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는 바티칸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일을 담당하는 몇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얼마 전 성하께서 자네 안부를 물으시더군.”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길의 앞에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성하께서 저를 기억이나 하시겠습니까?”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모카 포트로 추출한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이 그의 코끝에 맴돌았다.
“걱정하시더군.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시면서.”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도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의 맞은편에 앉아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부담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커피 사랑은 유별났다. 이탈리아노의 피를 타고난 이유로 최소 하루 세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프레소도 그냥 에스프레소가 아니었다. 모카 포트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만을 진짜라고 생각했고, 추출 후, 1분 안에 마시는 전통을 고수했다.
1분여 동안 두 성직자는 말없이 커피를 음미했다.
“그 남자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 번 입을 가져가는 것으로 에스프레소 잔을 비워 버린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아직 모르겠다는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뭐랄까. 마음이 갑니다.”
그 말에,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찾자면 짧은 시간에 단신으로 성인 남상 몇을 제압한 정도? 사실 증거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마지막 한 모금을 입으로 가져갔다.
“베드로 신부가 처음으로 맡았던 케이스가 코트디부아르였던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여섯 살 여자아이였었지.”
“그랬었죠.”
10년 전,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와 같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코트디부아르 교구에서 기적 심사를 신청해 왔다.
공용어인 프랑스어조차 아직 익숙하지 않은 그루족 여섯 살 소녀가 라틴어로 쓰인 로마서(Epistola ad Romanos)를 읽고 해독했다는 이야기였다.
소녀는 성경을 보자마자 성령이 임했고, 고대 로마 시대의 성인의 성령이 그녀에게 로마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바티칸은 코트디부아르 교구의 요청을 무시했다.
1년 동안 전 세계에서 1만 건이 넘는 기적 심사 요청이 들어온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직접 알현했고,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고, 예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흔한 이야기들을 일차로 걸렀음에도 수많은 기적 심사 요청이 전 세계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바티칸 기적 심사부는 대중문화에서 보이는 모습이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 기적을 찾아다니고, 조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시성(諡聖:Canonization)을 위한 행정절차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기적 심사부였다.
그렇기에, 코트디부아르 교구에서의 요청이 묵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요청에 관심을 보인 곳이 바로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 13문서보관실이었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지시로 코트디부아르로 가게 된 것이다.
‘테스티모니움’을 찾아서.
바티칸에 거주하는 성직자 대부분이 있는지도 모르는 13문서보관실의 직무가 바로 ‘테스티모니움(Testimonium)’을 찾는 것이었다.
테스티모니움. 라틴어로 ‘증명’을 의미하는 단어.
13문서보관실은 신이 실존한다는 증명, 즉,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거, 특히 사람과 관련된 증거를 찾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의 지시에 따라 코트디부아르를 찾은 질베트로 베드로 신부는 로마서를 해독한다는 여섯 살 소녀를 만났고, 소녀가 라틴어로 쓰인 로마서를 읽고 해독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그녀가 그들이 찾던 테스티모니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녀가 읽은 로마서는 현대 라틴어로 쓰여 있었고, 그녀의 해독 방식은 현대 라틴어 문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조차 정확한 문법도 아니었다.
돈벌이를 하고 싶은 그녀의 부모와, 빠른 승진을 원하는 교구 사제가 아직 여섯 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에게 강제로 라틴어 읽는 방법을 가르치고, 해석을 외우도록 했던 것이었다.
“베드로 신부를 그곳으로 보낼 때도, 나는 테스티모니움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가 빈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러고는 커피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고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보고 있던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저를 보내셨습니까?”
“베드로 신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도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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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남동쪽 50km에 위치한 산토스(Santos). 상파울로의 외항 역할을 하는 브라질 대표 항만 도시.
그 산토스 외곽에 형성된 파벨라(빈민가)에 사는 네 살 소년 레안두르 다 시우바 질베르토가 테스티모니움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시만 해도 일반 사제였던 조반니 안토니오 신부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며 상파울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파울루에 도착해서, 교구 신부의 안내를 받아 레안두르 다 시우바 질베르토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 소년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조반니 안토니오 신부가 물었었다.
-왜 눈을 감고 있지?
-보고 싶지 않아요.
아이가 말했다.
-왜 보고 싶지 않지?
-머리가 터질까 봐 무서워요.
-왜 머리가 터질 거라고 걱정하지?
그때 아이가 살포시 눈을 떴다.
마치, 최대한 시야를 좁혀, 조반니 안토니오 신부의 얼굴만을 담겠다는 듯.
-잊히지가 않아요.
아이가 말했다.
***
“완전 기억 능력. 모든 것을 기억하는 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솔직히 믿지 않았지. 사실 그 전에도 그런 케이스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는 했지만, 언제나처럼 헛걸음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기억납니다.”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렇겠지. 베드로 신부는 모든 것을 기억하니까.”
조반니 안토니오 주교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시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인상을 쓰면서 다시 내려놓았다.
베드로 신부는 미소를 띤 채로 그 모습을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머릿속에 문장이 떠오른 그날.
아버지가 사소한 싸움 때문에 이웃집 남자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문장이 떠올랐다.
-출생 후, 2,192일이 지나기 전에 ‘양친’을 모두 잃으면, 기억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된다.
-연속된 365일 이내에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을 섭취하면 능력이 유지된다.
-오른손 무명지를 상실하면 능력이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