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01화 (301/386)

INTERMISSION : Behind The Scenes (1)

제이크는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초조한 감정이 자꾸 얼굴에 드러났다.

젠장.

제이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번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가 태국국가정보부(NIA)에 입사하고 NIA 본부에 수천 번 넘게 드나들었지만, 7층에 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NIA 본부 7층, 태국국가정보부의 수장인 정보부장의 집무실이 위치한 층이었다. 중앙상황실과 더불어, 아니 어쩌면 중앙상황실보다 더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공간이었다.

파타야에서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바로, NIA 본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정보부장의 직접 명령이었다.

조직 수장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지체 없이 방콕으로 돌아왔고, NIA 본부 7층에서 명령권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부른 것일까?

제이크는 질문을 떠올렸다.

뻔하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

제이크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야닌이 상부의 허가 없이 독단으로 파타야에서 작전을 진행했다. 제이크는 직간접적으로 그녀를 도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일을 벌였음에도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다.

NIA의 허가는커녕 협의도 없이 태국 영토 내에서 작전을 수행한 것도 모자라, 거짓 테러신고를 한 한국 국정원 요원들을 그대로 보내 버렸다. 데이빗 박도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는 곁눈질로 옆에 앉아 있는 야닌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제이크와는 달리 감정을 잘 감추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그 전화를 받고, 데이빗 박을 보내 주었다.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누구의 전화인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제이크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알려 주지 않았고, 제이크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화를 건 인물이 누구이든 간에, 그 책임은 모두 야닌이 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제이크 자신도 책임 추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제이크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NIA에서 일한다는 것은 칼 밥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동기들보다 승진도 빨랐고, 야닌이라는 좋은 상관을 만나 정보기관의 요원으로서 후회 없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제이크는 물론, 그녀, 야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멈춰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까웠다.

제이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 안에 공기를 가득 담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흉곽 내의 압력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힘을 주었다.

뭐. 죽지는 않겠지. 감옥에 갈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제이크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명의 장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크는 급하게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습을 보인 두 명의 장년 남성 중 NIA를 이끄는 수장, 정보부장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보부장은 들어오자마자 야닌을 향해 말했다.

“따라와.”

질문을 던진 정보부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

제이크는 부동자세로 서서,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야닌이 정보부장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트라이앵글에 있는 프라이멀 카지노에서부터, 몇 시간 전 파타야 수리조선소까지 야닌이 알고 있는 모든 상황을 순서에 따라 핵심만 추려서 구두로 보고하고 있었다.

보고는 핵심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었지만, 담겨야 할 내용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녀의 보고가 끝날 때까지, 정보부장, 그리고 부장과 동행한 남자는 입을 다물고 듣고만 있었다.

거의 30분 가까이 이어진 보고가 끝이 나고 나서야 정보부장의 입이 열렸다.

“들어 본 적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아나?”

정보부장이 물었다.

무슨 말이지?

제이크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내가 여기 들어온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런 상황이 일어나기는커녕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외무부(กระทรวง การต่างประเทศ)에서 긴급 연락을 받았다는군. 한국 외교부에서 외교 채널을 통해 비공식 전문을 보내왔다고. 국정원 요원과 데이빗 박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했다는군. 그에 상응하는 외교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말이지. 얼마나 대단한 약속을 했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외무부에서 난리가 났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한국 대통령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야.”

제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한국 정부가 움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외교 채널이 가동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이해는 가. 백번 양보해서, 국정원 요원이고, 그 데이빗 박이라는 자가 자국민이고, 중요한 인물이라서 직접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고 억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해할 수는 있어. 하지만 미국 국무부에서는 왜 움직인 거지? 말이 국무부지. 실제로는 CIA가, 랭리 놈들이 국무부를 통해서 그자를 보호해 달라고 비공식 요청을 보내왔어. 내년에 정상회담을 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미끼를 걸고 말이지. 정상회담.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

제이크의 눈이 커졌다.

미국? 미국이 움직였다고? 정상회담이라는 미끼를 걸었다고?

야닌을 제외하면 이번 사건에서 가장 현장에 가까운 사람이 제이크였다. 제이크가 알기에 미국이 개입할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개입할 요소가 있었다고 해도, 정상회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백악관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여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외교부, 미국 국무부, 그리고 랭리. 백악관. 끝일까? 아니지. 길. 그자가 왜 거기 있는 거지?”

“고객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야닌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고객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진짜 정보상이라도 됐다는 거야?”

무슨 말이지?

제이크는 다시 한번 정보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NIA의 수장이 일개 정보상인에 불과한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다고 쳐도, 길이 진짜 정보상이 아니라고?

다른 정체가 있다고?

“그리고 또 식양. 식양이 왜 활동을 재개한 거지? 카지노에서 사라진 그 여자 직원이 식양이라고 생각하나?”

정보부장이 야닌에게 물었다.

“그녀이거나,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을 재개한 이유는 데이빗 박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야닌이 답했다.

“뭐라고 하셨지?”

정보부장이 다시 물었다.

제이크는 주어가 생략된 정보부장의 질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의 맥락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제이크는 야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대답을 통해서 맥락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야닌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고, 제이크는 그녀가 대답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이크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NIA 수장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야닌은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닌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보부장 옆에 서 있는 남자, 정보부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저 남자가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그 눈빛에서 상황을 이해했다.

수장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도, 저 정체불명의 남자가 있는 곳에서 말을 아끼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왕실이었다.

파타야에서 그녀가 받은 전화는 왕실에서 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고위 왕족에게서.

야닌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보내신 분이다.”

야닌의 시선에서 같은 의미를 읽어 낸 정보부장이 말했다.

현 국왕의 사람이라는 이야기였고, 말해도 된다는, 아니, 말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이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현 국왕 전하의 측근이 이 자리에 있다는 이야기는, 전화 내용을 국왕 전하께서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왕실에서 야닌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는데, 그 지시를 국왕 전하께서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상황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왕대비(王大妃) 전하, 선대왕의 반려.

야닌은 왕대비 전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친구에게 부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야닌이 말했다.

제이크는 몇 시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야닌과 제이크, 데이빗 박과 한국 국정원 요원, 길이라는 정보상, 홍콩 정보상 대니얼 양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태국 특수부대가 총을 겨누고 있던 수리조선소.

정보상 길, 아니. 이제는 정보상인지 확실치도 않은 남자가 손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었다.

-땅이 움직였죠.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식양이 왕대비 전하를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왕대비 전하 쪽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야닌이 그들을 그대로 보내 준 것이다.

한국 정부에서 요청이 있었다. 미국 정부도 개입했다. 거기에 길이라는 남자. 식양, 그리고, 선대왕의 반려, 태국이라는 나라의 제일 큰 어르신 왕대비.

제이크는 이제야 조금 전 정보부장이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여기 들어오고 30년 동안 말이지. 이런 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이제야 완벽하게 상황을 이해한 제이크의 등줄기에 한기가 타고 흘렀다.

옷 벗으면 되지. 여차하면 감옥에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사안이 아니었다.

한국과 미국의 정부와 정보기관, 식양, 왕궁.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조금만 넓게 확장하면 태국에 밀입국한 북한인들, 그리고 식양의 원래 소속이던 중국도 문제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언제부터 식양이 왕대비 전하의 친구가 된 거지?”

“알지 못합니다.”

야닌이 말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왜 왕대비 전하께서 식양과 친구가 된 것을 모르고 있냐는 말이야!”

정보부장이 소리쳤다.

식양은 중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런 식양이 왕대비와 선이 닿아 있었고, NIA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였다.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하던 전 장관의 아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잠시 숨을 고른 정보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니얼 양, 중국에서 그자를 돌려 달라고 할까?”

정보부장이 이번 작전에서 유일한 수확인 대니얼 양의 이름을 꺼냈다.

“MSS에서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야닌이 말했다.

대니얼 양, 홍콩의 민간정보기업 박물관연대를 이끄는 정보상은 중국, 특히 MSS, 중국국가안전부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런 대니얼 양을 MSS가 이대로 놔둘 리가 없다.

“식양까지 활동을 시작했으니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야닌이 답했다.

거기까지 들은 정보부장이 책상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야닌.”

“네.”

“2주 후에 정식으로 1급 승진 발령을 내겠다. 파타야에서 테러를 사전에 차단한 공로를 인정해 훈장도 하나 달아 주지.”

정보부장이 말했다.

제이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

최소한 옷을 벗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승진이라고?

“하지만 본부장을 달아 주지는 않을 거야. 이싼 지방 책임자로 발령을 내지. 다른 사람들은 자네의 빠른 승진을 우려하는 내가 한직으로 유배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거기서 자네만의 팀을 만들도록.”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야닌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날이 밝으면 입궐(入闕)해야 할지도 모르니 일단 본부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정보부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정보부장이 손을 휘저었다. 이제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야닌과 제이크는 예를 표한 다음 몸을 돌렸다.

***

정보부장실에서 나온 제이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던 그의 온몸에 긴장이 풀려나왔다.

“괜찮아?”

야닌이 그런 제이크에게 물었다.

“옷 벗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제이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나도.”

야닌이 제이크에게 말했다.

“그런 것치고 차분하시던데요.”

야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걸어 나갔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이크가 야닌을 뒤따르며 물었다.

“뭐를?”

“길이 정보상이 아니라는 이야기.”

제이크가 조금 전 정보부장이 꺼낸 이야기를 물었다.

“아니. 나도 몰랐어.”

“그럼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조만간 알게 되겠지. 할머니가 되면 말이지.”

야닌은 그렇게 말하며 계속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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