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51, 完)
데이빗 박은 웃고 있었다.
총구가 그를 향하고 있는 데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가워하는 것 같은,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닌은 궁금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왜 미소를 보이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묻고 싶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태국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지, 북한인 조직을 그렇게 만든 것이 그인지, 미얀마에서는 어떻게 빠져나간 것인지, 왜 카지노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인지, 무슨 의도로 트라이앵글을 찾아온 것인지.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는지.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랐기에, 오히려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총구를 겨눈 채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부하 요원이 소리를 질렀다.
“함부로 나불대지 말고 입 닥쳐!”
부하의 외침이 다시 격납고 안에서 난반사했다.
그 순간 그녀의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그에게 집중할 상황이 아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질문을 던질 타이밍이 아니었다.
앞으로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녀가 떠올린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야닌은 시선을 돌렸다.
데이빗 박보다 처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중년 남자에게로 그녀의 시선이 옮겨졌다.
주 선생. 카지노에서 그렇게 불렸던 남자, 그가 거기 있었다.
야닌도 알고 있었다. 그가 목적을 가지고 카지노에 접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목적이 식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가 여기 있는 것일까? 데이빗 박과 그가 한통속일까?
“오랜만이군요.”
야닌과 시선이 마주친 대니얼 양이 말했다.
“입 닥쳐!”
야닌의 옆에 서 있던 부하가 다시 소리쳤다.
야닌은 손을 들어 부하를 제지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야닌이 대니얼 양을 보며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대니얼 양이 말했다.
***
대니얼 양의 심장 박동은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고, 총구를 들이밀고, 상황을 통제하는 지금이 오히려 그에게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완벽한 날이었다. 행운이 가득한 날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김승섭을 확보했다. 거기에 방글라데시에서 작전을 지휘했다는 곽용신이 직접 찾아와 데이빗 박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데이빗 박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모든 행운이 그를 향해 미소 짓는 그런 날이었다.
그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순식간.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에, 다섯 명이 쓰러져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데이빗 박이 건장한 남성 다섯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리적으로 제압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직 전투력이 남아 있던 부하 두 명도, 그리고 그들에게 계속 싸울 것을 지시해야 할 대니얼 양 자신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를 당해 버렸다.
순식간에 다섯 명을 처리한 다음 자신을 바라보는 데이빗 박에게서 사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드디어 그를 손아귀에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목줄을 잡혀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어떻게 해도 그 손아귀를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때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사신의 손아귀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찾아온 것이다.
“부탁?”
야닌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화를 한 통 걸어도 되겠습니까?”
대니얼 양이 말했다.
야닌의 표정이 변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의심이 분노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전화?”
“지금 상황에서는 뭔가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 친구가 오해를 풀어 줄 것 같습니다만.”
대니얼 양이 말했다.
“안 되겠는데.”
야닌이 말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대니얼 양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알아? 파타야에 폭탄 테러를 일으키겠다는 협박 전화를 추적해 온 거야. 네놈이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아니면 폭탄 기폭 장치를 가동하려는지 어떻게 알지? 얼마나 대단한 친구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돼.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입을 놀리면 직접 그 입에다가 총알을 박아 주지.”
야닌이 대니얼 양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대니얼 양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마디만 더 해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야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대니얼 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핏사눌록 맨션입니다. 기폭 장치가 걱정되신다면 직접 전화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핏사눌록 맨션(Phitsanulok Mansion). 태국 총리 공식 관저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태국 총리는 그곳에 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역대 어느 총리도 그곳에 짐을 풀지 않았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귀신에게 도와 달라고 할 생각인가?”
야닌이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텐데요.”
대니얼 양이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변호사에게 이야기해 봐. 총리든, 국회의원이든 그때 전화하게 해 달라고. 이제부터는 닥쳐.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약속한 대로 총알을 박아 주지.”
거기까지 말한 야닌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데이빗 박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전화할 데가 있나?”
***
한규호는 대화하는 두 사람, 야닌과 대니얼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닌의 입에서 테러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한규호는 곽용신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잘 대처했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대화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야닌이 한규호에게 전화할 곳이 있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한규호는 잠시 생각했다.
전화할 필요가 있을까? 해야 한다면 누구에게 해야 할까?
한규호는 그 순간 한 사람을 떠올렸다.
홍콩에 있는 그녀. 그녀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양의 네트워크나 어쩌면 CIA를 동원해서.
하지만 한규호는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트레이시라면 어떨까?
그녀라면 분명 CIA를 움직여 줄 것이다.
하지만 완이 싫어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또 살짝 웃어 버렸다.
방콕에 있는 길?
하지만 바로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어 버렸다. 고작해야 정보상이 NIA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전화는 필요 없었다. 한규호는 다른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체포해. 일단 저 두 사람 먼저.”
한규호의 대답을 본 야닌이 부하에게 지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대니얼 양과 데이빗 박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권총을 겨누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포박용 케이블 타이를 꺼내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규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NIA 요원을 보면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혼자 몸을 빼내고자 한다면 한규호는 그럴 수 있었다.
권총을 가진 정보기관 요원 다섯 명이 있었지만, 한규호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태국 요원들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으니 국정원 요원들이 목숨을 잃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열악하기로 유명한 태국 감옥에 갈 수도 있겠지만, 목숨은 지킬 수 있으니 김형원도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그게 좋겠군.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한규호가 다시 장딴지에 힘을 막 주려던 그 순간에, 날카롭게 벼려 있던 그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격납고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규호가 그 소리를 가장 먼저 들었다.
한규호는 곽용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곽용신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의미냐고 물으려던 곽용신의 몸이 굳어 버렸다.
그도 소리를 들었다. 정확히는 소리의 형태를 한 진동을 느꼈다.
헬리콥터 로터가 회전하면서 만들어 내는 진동이었다.
***
격납고 20여 미터 밖, 풀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길은 헬리콥터에서 현수하강(懸垂下降:레펠링)을 하는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대 휘장을 확인하지 않아도 하강한 군인들이 특수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 NIJ 레벨4의 방탄복, 총열 단축형 돌격 소총이 그들이 대테러 특수부대원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헬기에서 하강한 군인들은 재빨리 사방을 경계하며 격납고 쪽으로 이동했다.
길은 풀숲에 몸을 숨긴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헬기에서 뛰어내린 여섯 명의 군인 중 두 명이 외부 경계를 위해 남고, 나머지 네 명은 격납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성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총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담당자의 말을 들을 것을 그랬는데.
지금 함부로 몸을 움직이다가 적으로 오인되어 총알을 맞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죽지는 않겠지. 빽 하나는 든든하니까.
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뒤로 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그의 가슴 주머니에 들어 있던 전화기가 진동했다.
진동은 짧았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아니었다.
메시지, 또는 이메일이 들어온 것이다.
이 타이밍에?
길은 잠시 고민했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슴팍에서 전화기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천천히 몸을 뺄 것인지.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빽 하나는 든든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길은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을 가져갔다.
평소 습관에 따라 최대한 밝기를 어둡게 해 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액정에서 빛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길은 최대한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한 손으로 가리면서 화면을 확인했다.
이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일상적으로 쓰는 계정으로 들어온 이메일이 아니었다.
업무용으로, 그것도 가장 중요한 연락을 받을 때 사용하는 계정으로 들어온 이메일이었다.
길은 손가락을 움직여 메일을 열고 재빨리 읽었다.
메일을 다 읽은 길은 재빨리 화면을 꺼 버렸다.
빛이 사라지면서 다시 어둠이 그를 감쌌다.
길은 그 어둠 속에서 방금 읽은 이메일을 다시 떠올렸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늘 몇 시간 동안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여러 번 일어나고 있었지만, 단연코, 지금 그가 읽은 이메일이 가장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신. 도대체 누구지?”
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엄폐하고 있던 풀숲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킹스가드 1 특전군 디비전 소속 대테러 강습부대 90th 테스크포스 대원이 격납고로 들어오면서 잠깐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야닌이 신분을 증명했고, 지휘권을 확보한 것이다.
야닌은 제이크가 그들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덕분에 격납고 안에 있던 인원들을 포박하기에 더 쉬워졌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특수부대원들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격납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포박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군인의 손에 들린 소총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