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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96화 (296/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48)

문을 열고 들어간 곽용신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요트였다.

3층 높이의 격납고 한가운데에 수리를 하려다 방치된 듯,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는 요트가 걸려 있었다.

그 요트 근처에, 김승섭과 홍성민이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어서 오시죠. 반갑습니다. 곽용신 요원님.”

두 사람을 바라보던 곽용신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곽용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러나 처음 들어 본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말 혼자셨군요.”

처음 보는 남자, 대니얼 양이 곽용신에게 미소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약속대로 두 사람을 풀어 주시오.”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격납고를 살펴보았다.

모용진은 바로 그 남자 옆에 서 있었다. 불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용신은 재빨리 모용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상황에서 모용진은 한 줌의 가치도 없었다. 대신 격납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세어 보았다.

최소 일곱 명,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만 그 정도였다.

시간을 끌어야 하겠군.

곽용신은 마음을 정했다.

밖에 세 명, 등 뒤에 한 명, 격납고 안에 최소 일곱 명이 있었다. 최소 열한 명,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인원이었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지금 막 만나지 않았습니까.”

대니얼 양이 말했다.

“약속한 것과는 다르군요.”

곽용신이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대니얼 양이 물었다.

“내가 오면 두 사람을 놓아주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홍성민과 김승섭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했기에 두 사람이 저렇게 무력화되어 버린 것이지?

“플루니트라제팜입니다.”

마치 곽용신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대니얼 양이 말했다.

곽용신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로히프놀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실까요?”

로히프놀, 스위스 제약사인 호프만 라 로슈에서 만든 니트로 벤조다이아제핀 계열의 수면마취제, 디아제팜의 20분의 1 용량으로 동일한 성능을 내는 강력한 수면마취제.

“약이 아주 잘 듣더군요. 뭐 WHO 권장량보다 조금 더 많이 투약하기는 했습니다만 건장한 성인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약속한 것처럼 놓아드리고 싶어도, 저 상태면 움직일 수도 없고, 설사 깨어났다 하더라도 한두 시간은 몸이 말을 듣지도 않을 겁니다. 설마 약에 취한 두 사람을 이대로 위험한 밤거리로 내몰라는 매정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대니얼 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약속에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요. 도움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대니얼 양이 곁에 서 있던 부하에게 손짓을 보냈다.

부하 하나가 접이식 의자를 가져다 곽용신 근처에 펴 놓았다.

시간을 끌어야 해,

곽용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로 걸어갔다.

평정심을 유지할 것, 목표에 집중할 것, 생각하고 말할 것. 그리고 감정적인 적을 만들지 말 것.

곽용신은 협상의 대원칙 네 가지를 다시 떠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도와드릴까?”

곽용신이 물었다.

“일단 가볍게 시작해 볼까요? 왜 오셨는지, 언제 오셨는지, 누가 보냈는지 말씀해 주시죠.”

대니얼 양이 말했다.

“모용진을 잡으러. 약 2주 전, 한국 국가정보원.”

곽용신이 말했다.

“국가정보원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누가 보냈느냐는 질문이지요.”

“유만호.”

곽용신이 유만호의 이름을 말했다.

대니얼 양은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모용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네요. 대화가 계속 이렇게 매끄럽게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유만호라는 사람은 왜 당신들을 보낸 걸까요?”

“모용진을 잡으라고.”

곽용신이 말했다.

“아니. 그 대답은 마음에 안 드는군요. 곽용신 요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왜 그 유만호라는 사람이 지원팀도 없이 곽용신 요원님을 보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대니얼 양이 말했다.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곽용신이 말했다.

“곽용신 요원님을 말입니까?”

대니얼 양이 의자에 묶여 있는 김승섭과 홍성민 쪽으로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아니. 저 사람, 모용진을 위한 함정.”

곽용신이 말했다.

대니얼 양의 시선이 모용진으로 옮겨졌다.

“내부에서 저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소. 특히 밑에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고. 그저 줄을 잘 잡았고, 내부 정치를 잘해서 1급 실장 자리까지는 올라갔지만, 원장감은 아니라는 것이 밑에 사람들의 생각이었지.”

거기까지 말한 곽용신은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밀려났고, 쫓겨났고. 분수를 알고 조용히 지낸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욕심 많은 모용진이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부에서는 알고 있었고, 무언가 사고를 칠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고. 아니, 사고를 치기 바랐을 터이고.”

곽용신이 모용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비행기를 탈 때, 나도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소. 왜 지원팀이 없을까? 모용진이 아무리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1급 출신이니까 그를 처리하는 데 정치적인 부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드는군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시체가 필요했다.”

“시체가 필요했다?”

“모용진이 배신했다. 그 물적증거가 요원의 시체라면 모용진을 물리적으로 처리하기에 그만큼 좋은 명분이 없으니까.”

“그래서 함정이라고 말한 거군요.”

“모용진이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사고를 친다는 것을 본부는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함정을 판 거고, 미끼는 우리였던 것이고, 거기에 당신들이 걸려든 것이고.”

곽용신이 말했다.

실제로 곽용신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은 김형원이였다. 그리고 김형원이 곽용신과 김승섭을 버리는 카드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의 목숨을 쥐고 있는 저 남자에게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국정원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우리 셋을 죽인다면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저는 곽용신 요원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니얼 양이 옆에 서 있는 모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짓말이야!”

모용진은 얼굴에 분노와, 당혹과 불신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며 외쳤다.

“거짓말이야. 저 자식의 말은 모두 거짓이야. 내가, 이 내, 내가, 그럴 리 없어. 아니야! 거짓말이야!”

모용진이 소리쳤다.

대니얼 양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짓을 받은 부하가 모용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놔!”

모용진이 소리쳤다.

“모 선생.”

대니얼 양이 모용진을 불렀다.

“아직 주사액은 남아 있습니다.”

모용진의 몸이 굳어 버렸다.

“곽용신 요원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군요.”

곽용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야 할까?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야 경찰이 찾아올까?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곽용신 요원님은 어떻게 도움이 되실 수 있죠?”

대니얼 양이 물었다.

“나를 데려가시오. 국정원 요원 셋이 사라진다면, 절대로 조용히 끝나지 않소. 그리고 저 둘은 아무것도 모르오. 그저 내 지시에 따랐을 뿐. 작전 지시를 받은 것도 나고, 현장을 지휘한 것도 나니까.”

곽용신이 말했다.

“두 사람보다 곽용신 요원님이 가치가 있다. 그렇게 들리는군요.”

곽용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을 본 대니얼 양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여 의자에 묶인 채로 널브러져 있는 김승섭과 홍성민에게 다가갔다.

대니얼 양의 손이 김승섭의 어깨에 닿았다.

“이분이 필요합니다.”

대니얼 양이 축 늘어진 김승섭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는 김승섭 요원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밖에서 문을 열어 준 남자를 기억하십니까? 제 직원 중 그나마 쓸 만하다고 생각했던 녀석 중 하나입니다만, 김승섭 요원님이 그 친구의 턱뼈와 손목을 박살 내 버렸죠. 뭐 지금이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문이라도 지키라고 보내 놓기는 했지만, 사실 그 정도로 무능한 친구는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순식간에 박살을 내놓더란 말이죠. 솔직히 놀랐습니다. 배짱도 마음에 들더군요. 하지만 제가 김승섭 요원님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짝사랑 때문은 아니죠.”

대니얼 양의 시선이 다시 모용진에게로 옮겨졌다.

“반면에 모 선생은…… 뭐, 여러모로 실망스럽더군요. 그래도 1급이니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김승섭 요원님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모용진의 얼굴에 핏기가 썰물처럼 사라져 갔다.

“모 선생.”

대니얼 양이 모용진을 불렀다.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무, 무슨 생각 말이오?”

모용진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곽용신 요원님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 국정원에서 모 선생을 처리하기를 원한다면 제가 대신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대니얼 양이 다시 곽용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파타야 외곽에 있는 수리조선소에서 모 선생의 시신이 발견된다면, 국정원은 만족할까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모용진이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대니얼 양이 모용진 옆에 서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부하는 모용진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팔을 꺾으면서 앞으로 밀어 버렸다.

모용진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팔을 제압당한 상태로 바닥에 얼굴을 갈아 버렸다.

그런 모용진에게 대니얼 양이 걸어갔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모용진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말했다.

“본인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모용진이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해 주시죠.”

대니얼 양이 물었다.

“뭐, 뭐를…….”

“방글라데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

모용진의 추태를 바라보던 곽용신의 귀에 그 단어가 들려왔다.

방글라데시.

그 단어를 들은 순간, 곽용신은 척추를 타고 강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전류가 척추를 타고 빠르게 뇌를 자극했다.

모용진의 지시를 받아 일본에 갔던 김규택은 데이빗 박에 대해 알아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모용진과 김규택, 데이빗 박을 연결하는 선이 그어진다.

만약 김규택에게 정보를 알아오라고 이야기한 맥도날드의 남자가 곽용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이쵸의 요원이 아니라, 저 남자와 관련이 있다면?

모용진, 저 남자, 그리고 데이빗 박 사이에 또 다른 선이 이어진다.

-하지만 제가 김승섭 요원님이 필요한 것은 그런 것 때문은 아닙니다.

김승섭에 대한 저 남자의 평가였다.

김승섭과 방글라데시, 그리고 데이빗 박 사이에도 선이 이어진다.

모든 화살표가 데이빗 박을 향하고 있었다.

곽용신의 두뇌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거였구나. 애초에 경인이 아니었구나.

***

“방글라데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니얼 양이 말했다.

그리고 모용진의 눈을 보았다.

모용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의문과 절망이 담긴 눈으로 대니얼 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니얼 양은 몸을 일으키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여러모로 실망스럽…….”

“치타공.”

곽용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니얼 양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의자에 앉아 있는 곽용신을 향했다.

“콜카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치타공에 도착해서 김승섭을 호출했지. 차량을 구해 미얀마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탄치로 갔고.”

곽용신을 바라보는 대니얼 양의 눈이 커졌다.

“방글라데시에서 작전을 진행한 사람은 단 두 명. 나와 김승섭. 하지만 김승섭은 아무것도 몰라. 작전은 전부 내가 계획했고, 지시도 내가 내렸지. 김승섭은 내 지시에 따라 먹을 것을 조달했을 뿐이니까.”

곽용신이 말했다.

대니얼 양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곽용신을 바라보았다.

곽용신은 그 눈빛에서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확신했다.

도박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승기를 잡은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강한 베팅이었다.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저 두 사람은 이곳에 두고, 나만 데려가시오. 모용진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 모용진이 확보되면 한국에서도 만족할 테니까. 두 사람은 나를 보지 못했고,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들을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할 문제고. 두 사람이 한국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모든 것을 말해 주겠소.”

곽용신이 말했다.

“모든 것?”

대니얼 양이 물었다.

“그 남자에 대해서.”

“그 남자?”

대니얼 양이 다시 물었다.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남자.”

곽용신이 말했다.

“이름.”

대니얼 양이 물었다.

“데이빗 박.”

곽용신이 말했다.

“본명.”

대니얼 양이 물었다.

“두 사람이 한국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면.”

곽용신이 말했다.

대니얼 양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김승섭과 홍성민에게 다가갔다.

“이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어떨까?”

대니얼 양이 말했다.

해 봐.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해야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곽용신을 고문하려 한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승섭과 홍성민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블러핑을 할 수 없었다.

“어떠할까요?”

대니얼 양이 다시 말했다.

다시 승기를 잡은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만들어졌다.

“해 봐.”

그때 대답이 들려왔다.

대니얼 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곽용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답이 들렸다.

대니얼 양의 시선이 움직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곽용신에게서, 대답이 들려온 문 쪽으로.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데이빗 박이 거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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