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93화 (293/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45)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야닌은 파타야 경찰서 서장실에 임시로 마련한 상황실에 있었다.

그녀는 서장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상황을 정리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서장 책상에 올려놓은 그녀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야닌은 눈을 떴다. 전화기를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고, 인상을 썼다.

그녀의 충실한 부하 제이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오늘만 세 번째로 걸어온 전화였다.

-이렇게 계속 본부의 지시를 무시하다가는 승진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승진이 취소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후에 전화를 걸어온 제이크의 마지막 말이었다.

평소 그녀의 결정이라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주던 제이크가 큰 소리를 낸 것이다.

야닌은 제이크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용진과 김승섭의 이름을 들은 야닌은 바로 파타야로 내려왔다. 방콕에서 모습을 드러낸 데이빗 박의 흔적이 파타야에서 이어질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파타야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제이크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반대했어도, 야닌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제이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닌은 상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로 요원 몇을 데리고 파타야로 내려와 파타야 경찰서 서장실에 상황실을 꾸렸다. 상황실을 꾸리고 나서 본부에다가 파타야 작전에 대한 허가를 요청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본부에서 작전 허가를 반려해 버린 것이다.

파타야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는 주요 관광지였고, 태국 관광산업 매출에 30% 이상, 전체 GDP의 3% 이상이 창출되는 중요한 도시였다.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해도 큰 문제가 없는 끄렁떠이 같은 빈민가와는 달랐다.

그런 파타야에서,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이 작전을 진행하는 것을 NIA 본부에서는 원치 않았고, 야닌의 요청을 거부해 버린 것이다.

요청을 거부한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무단으로 파타야에 가버린 며칠 동안을 휴가로 처리해 버렸고, 빨리 방콕으로 복귀하라는 비공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야닌은 방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나빠진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예감은 이곳을 떠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파타야에 있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1급 승진 따위 개나 주라지.

야닌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앞으로 전화…….”

야닌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급박한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러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파타야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테러? 폭발물?

야닌의 눈에 전원이 들어왔다.

“폭탄? 어디에?”

-촌부리주 법집행사무소 파타야 지소입니다. 위치는…….

“어딘지 알아.”

야닌이 말했다.

촌부리주 법집행사무소 파타야 지소는 파타야 남쪽 좀티엔(Jomtien) 지역 텝 프라싯(Thep Prasit) 로(路)에 위치해 있었다.

장소를 떠올린 야닌의 머리에 의문표가 떠올랐다.

좀티엔? 법집행사무소? 워킹스트리트가 아니고?

큰 의미로 봤을 때, 좀티엔도 파타야에 포함되기는 했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공포를 심는 것이다. 그리고 공포를 심고 퍼트리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는 워킹스트리트나 파타야 바닷가의 힐튼호텔이었다.

그런데 좀티엔이라고?

야닌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파타야 경찰서 건물에도 비상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여기도 지금 경보가 울렸어. 자세히 말해 봐.”

야닌은 의문을 떨쳐 내며 제이크에게 물었다.

일단은 테러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2016년 테러 발생 이후 새롭게 수립된 카운터 테러 프로세스에 따라 테러 징후가 발견되거나 테러가 발생하면, 태국 왕립경찰, 태국 왕립국군, 그리고 NIA 등 모든 관계 기관 및 단체가 총력으로 대응하도록 되어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휴가 중인 것으로 되어있는 야닌도 프로세스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15분 전, 경찰 그리고 관광 경찰 핫라인으로 협박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영어였고, 폭탄을 설치했고, 오전 1시에 법집행사무소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폭파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다른 요구 사항은 없었습니다. 경찰에서 바로 전화번호를 추적했고, 발신지는 파타야 센트럴 마리나 인근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공중전화?”

야닌이 물었다.

-아닙니다. 휴대전화였습니다.

휴대전화?

야닌의 눈에 다시 물음표가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고? 테러를 예고하면서?

-협박 예고를 해 온 전화의 번호가 한국 이동 통신사의 식별 번호였습니다.

제이크가 말했다.

야닌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다시 말해 봐.”

-전화를 걸어온 번호는 한국 통신사의 번호입니다. 로밍으로 파타야 AIS 기지국에 연결되어있었습니다.

“명의자는?”

-한국에 명의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만, 아직 답변은 받지 못했습니다.

야닌은 테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테러일 가능성도 있었다.

테러범이 한국에 가서 전화를 개통하고, 개통한 전화를 가지고 태국으로 들어와서 그 번호로 테러를 가하겠다고 예고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한국인 테러범이거나.

하지만 야닌의 직감은 진짜 테러 예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위치 추적은?”

야닌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테러 예고 후에 전화가 꺼졌고, 아직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이크가 말했다.

테러일 가능성이 조금 더 커졌다.

“알겠어. 위치가 파악되면 바로 알려 줘.”

야닌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따라 파타야로 내려온 몇 명의 요원들이 심각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빨리 움직여야 해.”

야닌은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재킷을 집어 들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

곽용신이 오토바이 기사에게 건네준 1천 바트 지폐 한 장의 위력은 생각보다 컸다.

오토바이 기사는 센트럴 마리나에서 접선 장소인 사눅 파크까지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달려온 것이다. 곽용신의 계산으로 15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 거리였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알려 준 접선 장소, 사눅 파크에 도착한 곽용신은 그를 내려 준 오토바이 기사가 떠날 때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정으로 향해 가는 늦은 밤, 사눅 파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질 않았다. 낮 시간이었다면 번지점프를 하러 온 사람들과, 비명이 가득할 번지점프대는 어둠 속에 흉물처럼 서 있었고, 오토바이 기사마저 떠나 버리자, 사눅 파크 주차장에는 곽용신과 고요함 만이 남아 있었다.

곽용신은 오토바이 기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조금 전 센트럴 마리나에서 산 휴대전화, 심카드를 삽입한 노키아 전화기의 전원을 켰다.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완전히 부팅이 끝났을 때, 곽용신은 옷을 정리하는 척하며 노키아 전화기를 허리춤으로 해서 팬티 안에 넣었다.

바 모양의 완만한 곡선을 가진 전화기가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 그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훑지 않는 이상 전화기가 거기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숨긴 곽용신은 주차장 한쪽에 놓여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주차장의 유일한 가로등 밑에 있는 벤치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는 장소로 가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곽용신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의지에 따라 조절할 수 없는 심장박동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시간. 시간이 문제였다.

테러를 일으키겠다는 협박 전화를 하고 10분이 조금 넘었다. 다시 전화기를 켰으니 위치 추적이 재개되었을 것이다.

접선자가 먼저 올지, 아니면 경찰특공대가 먼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박이었다. 국정원 요원 곽용신의 인생을 걸어 김승섭과 홍성민의 목숨을 따내기 위한 도박이었다.

테러 전화를 한 그 순간, 요원으로서 그의 인생은 끝이 났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외교 문제로 확대될 것이 분명했다. 국정원은 곽용신을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는다 해도 남은 일생을 열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태국 교도소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태국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두 딸의 아버지로서, 고향에 계신 노모의 유일한 아들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팅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곽용신은 자꾸 빨라져만 가는 심장박동을 늦추기 위해 최대한 호흡을 천천히 가져갔다. 그러나 심장박동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접선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이렇게 두 사람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곽용신을 괴롭혔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 곽용신은 1시간 같은 1초를, 하루 같은 1분의 시간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곽용신의 전화기가 진동을 한 시간은 그가 이곳 접선 장소에 도착하고 약 15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침착해.

사타구니에서 진동을 느낀 곽용신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곽용신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팬티 안에 들어 있던 노키아 전화기 대신, 그가 원래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심카드가 없는, 이제는 전화기로서 기능을 할 수 없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신호도 없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심카드가 들어 있는 노키아 전화기는 여전히 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 전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또는 모용진이, 또는 접선자가 전화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찾는 태국 경찰의 전화인지, 아니면 김형원, 또는 김형원이 보낸다는 지원팀, 유만호나 김훈의 전화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째 딸의 전화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곽용신은 노키아 전화기를 꺼내지 않았고, 어디에서 온 전화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김승섭과 홍성민을 데리고 있는 그들의 전화이기를 바라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던 진동이 멈추었다.

다시 어둠과 적막만이 곽용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곽용신은 후회감과 공포를 느꼈다.

확인했어야 했을까? 받았어야 했을까? 일단 그들을 만났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은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적막을 깨는 소리,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는 천천히 커졌다.

곽용신은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접선자? 경찰?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곽용신은 눈을 감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침착해.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로 오토바이 전조등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토바이 한 대가 사눅 파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토바이. 한 대.

경찰은 아니다. 접선자,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

곽용신의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사눅 파크로 다가오던 오토바이는 주차장 입구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사눅 파크 주차장 앞을 지나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나가는 행인이었다.

곽용신은 실망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실망스러움은 점점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젠장할.

곽용신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왜 안 받지?”

그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공포가 곽용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곽용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곽용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눅 파크 주차장의 유일한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 안에, 그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까 봐.”

곽용신이 말했다.

남자는 몇 초간 대답이 없었다. 잠시 곽용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곽용신은 그 시선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가 휴대전화를 숨기는 것을 보았을까? 액정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휴대전화를 보는 척했다는 것을 눈치챘을까?

거기에 경찰 사이렌 소리가 언제 들려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더해졌다.

“이리로 와. 천천히. 두 손을 들고.”

남자가 말했다.

곽용신은 그의 말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어둠 속에 있던 그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30대, 태국인보다 건장한 체격, 짧은 머리. 오토바이 택시 기사를 증명하는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오토바이 택시 기사라기보다는 군인이 더 어울리는 외형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숨겨져 있는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휴대전화를 내놔.”

남자가 말했다.

곽용신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자신의 휴대전화, 심카드가 제거되어, 더 이상은 전화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전화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잠시 살펴보고는 바닥에 내려놓고, 신발 뒷굽으로 강하게 세 번 밟아 버렸다. 그러고는 액정이 박살이 난 휴대전화를 다시 주워 들어 있는 힘껏 던져 버렸다.

던져진 전화기가 주차장 옆 공터의 풀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입어.”

남자가 조끼를 벗어 주며 말했다.

곽용신은 남자가 건네준 조끼를 입었다.

“타. 앞좌석에.”

남자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곽용신은 그의 지시에 따라 오토바이 앞좌석에 앉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날까지 검게 무광처리가 된 폴딩 나이프였다.

“핸들을 잡아. 그리고 절대로 놓지 마.”

곽용신은 그의 말대로 핸들을 잡았다.

남자가 다가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이제부터 내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간다.”

곽용신 뒤에 탄 남자가 말했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곽용신의 등허리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조금 전 그가 보여 준 폴딩 나이프임이 분명했다.

“출발해.”

남자가 말했다.

곽용신은 액셀을 잡은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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