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44)
“이제 이 전화로는 통화가 연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니얼 양은 그렇게 말하고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홍성민의 전화기를 옷으로 깨끗하게 닦아 낸 다음, 창문을 열고 밖으로 던져 버렸다.
빠르게 달려가는 차량에서 던져진 전화기는 어두운 도로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니얼 양은 도로를 달리는 다른 차들이 어두운 도로에 던져진 전화기를 완전히 박살 내 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다시 창문을 올리는 대니얼 양에게 모용진이 말을 걸었다.
대니얼 양은 고개를 돌려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화가 났습니까?”
대니얼 양이 그 얼굴에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모용진이 소리쳤다.
“이해합니다.”
대니얼 양이 모용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말했다.
“이해한다고?”
“그럼요. 이해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왜 화가 나셨는지.”
대니얼 양이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면서 말했다.
모용진은 말없이 대니얼 양을 노려보았다.
“제가 모 선생에게 예의 없이 굴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렇게 착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고 있다고?”
모용진이 되물었다.
“네. 착각입니다. 제가 모 선생에게 더는 통화에 개입하지 말라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착각을 하고 계신 거죠. 사실은 그게 아닌데.”
“무슨 말이지?”
모용진은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겁이 나는 겁니다.”
“겁?”
“국정원에서 당신을 찾으러 요원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옛 부하들을 보니 겁이 덜컥 나 버린 거죠. 누군가 따라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들을 여행사에 두고 빨리 몸을 빼냈으면 싶은데, 제가 그들을 승합차에 실으라고 지시한 것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왜 그들을 데려온 것일까?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들은 살 수 있을까?”
대니얼 양이 뒤따라오는 승합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압니다. 저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 선생은 그저 스스로에 대한 걱정뿐이죠. 다만 저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모 선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들이 시체로 발견된다든가 말이죠. 압니다. 후회했을 겁니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돌이키지 못하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셨겠죠. 이해합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대니얼 양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을 대하는 상담 교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인데 제가 곽용신 요원을 만나겠다고 하니 더욱 겁이 난 거죠. 곽용신이 과연 혼자 올까? 누군가 따라오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빨리 빛이 들지 않는 쥐구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은데 말이죠.”
모용진의 입술이 떨렸다. 그 입에서 당장에라도 고성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대니얼 양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했다.
“아니. 일단은 들으시죠. 제 말이 다 끝나고도 하실 말씀이 있으면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말이죠.”
대니얼 양이 계속 얼굴에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일단은 확신을 드리도록 할까요. 곽용신은 혼자일 겁니다. 지원팀을 끌고 들어왔다면 우리가 알았을 겁니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지원팀이 왔다면, 태국에 통보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어떠한 식으로는 우리 정보망에 걸려듭니다. 두 번째로 곽용신이 지원팀을 끌고 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지원팀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우리는 그냥 몸을 빼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렇게 벌벌 떨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모용진이 떨리는 입술을 열어 물었다.
“더는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니.”
모용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느끼는 불안감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돌이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 말이죠.”
모용진의 불안한 눈빛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대니얼 양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옛 부하들은 살아남지 못 할 테니까요.”
대니얼 양의 말에 모용진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자, 이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죠.”
모용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곽용신은 택시 기사에게 쇼핑몰 센트럴 마리나에 차량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했다. 홍성민의 위장 사무실인 오라오라투어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곽용신의 목적지는 오라오라투어가 아니었다. 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의 정체불명의 남자가 문자메시지를 보내겠다고 한 시간에서 약 1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10분. 지금 곽용신에게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10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곽용신은 곧바로 쇼핑몰로 뛰어 들어갔다.
오후 11시, 폐점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센트럴 마리나의 많은 점포가 이미 문을 닫았거나, 하루의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곽용신은 택시 안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예전에 모용진의 흔적을 수소문하면서, 센트럴 마리나 2층에서 그가 원하는 물건을 파는 점포가 몇 개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 점포가 아직 문이 열려 있기를 바라면서, 에스컬레이터를 전력으로 뛰어 올라갔다.
2층에 당도하자마자, 몸을 돌려 전력으로 20여 미터를 달려간 곽용신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사람이 있는 점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중고 휴대전화 판매점은 문이 닫혀 있었지만, 그중 두 개의 점포에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점포를 정리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재빨리 가장 가까운 점포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빠르게 외쳤다.
“단말기를 사고 싶어요! 지금 당장 사용 가능한 단말기로! 중고라도 상관없소. GPS 기능이 있는 전화기가 필요합니다!”
하루의 장사를 정리하던 중고 전화기 판매상은 갑작스럽게 뛰어들어 소리치는 손님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핏발 가득 선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손님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빠른 영어로 무어라고 말했다.
중고 전화기 판매상은 그의 영어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한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Used Phone. 중고 전화기.
“어, 어떤…… 전화기를 원하십니까?”
곽용신의 기세에 밀린 판매상이 어설픈 발음의 영어로 물었다.
“작은 전화기. GPS 기능이 있는. 작은 전화기.”
곽용신이 말했다.
중고 전화기 판매상은 ‘작은’과 ‘GPS’를 알아들었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전화기 하나를 떠올렸다.
일명 매트릭스폰이라고 불리는 노키아 8110 모델, 바(Bar) 형태의 피처폰이었다.
2018년에 새로 나온 8110 모델은 노키아의 다른 저가형 모델과는 달리 GPS가 탑재되어 있었다.
판매상은 매대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전시되어 있는 중고 전화기 중에서 노키아 8110 모델을 꺼내 들었다.
“얼마입니까?”
곽용신은 지갑을 꺼내면서 물었다.
중고 전화기 판매상은 지갑을 꺼내 드는 곽용신의 모습에서,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핏발 선 그의 눈에서 이 손님이 많은 돈을 지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들었다.
5천 바트, 그가 책정한 가격에 3배가 넘는 가격을 제시했다.
다섯 손가락을 본 곽용신은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천 바트 지폐가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택시 기사에게 열 장이 넘어가는 지폐 뭉치를 건네주었기 때문에, 천 바트 지폐는 고작 두 장뿐이었다.
곽용신은 지갑의 다른 부분을 열었다. 그리고 100달러 지폐 두 장을 꺼내 매대에 내려놓고, 바로 판매상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전화기를 확보한 곽용신은 우선 전원 버튼을 눌러 전화기의 전원을 켰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가 생각한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짧은 진동이 느껴졌고, 부팅이 시작되었고, 액정에 노키아의 로고가 들어온 후, 전화기가 온전하게 켜졌다.
액정에는 두 개의 신호가 보였다. 심 카드를 삽입하라는 팝업, 그리고 배터리에 절반 정도의 전력이 남아 있다는 신호였다.
두 칸이면 충분했다.
“심 카드 핀.”
배터리를 확인한 곽용신이 다시 판매상을 보며 말했다.
한 손에 100달러 지폐 두 장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곽용신을 바라보던 판매상은 다시 곽용신의 기세에 눌렸고, 매대에 올려져 있는 심 카드 슬롯 핀을 곽용신에게 건넸다. 그가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곽용신은 핀을 받아 들자마자 몸을 돌려 다시 쇼핑몰 입구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손에 100달러 지폐 두 장을 들고 있는 중고 전화 판매상은 그런 곽용신이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전화기와 심 카드 핀을 받아 든 곽용신이 다시 전력으로 쇼핑몰을 빠져나오던 그 순간, 그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곽용신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그가 원래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Sanook Park. 248/10 Thep prassit Road Soi 9, Pattaya, Chon Buri 20150.’
문자메시지에는 지도 어플용 링크와, 접선 장소의 주소가 함께 적혀 있었다.
곽용신은 링크를 눌렀다.
지도 어플이 실행되고, 파타야 남부에 있는 공원이 액정에 떴다.
곽용신은 재빨리 경로를 확인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대략 6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차량으로 20분 거리였다.
곽용신은 빠르게 계산했다.
차량으로 20분, 오토바이를 타면 15분 정도.
계산을 마친 곽용신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축소했다. 그리고 접선 장소 인근에 관공서를 빠르게 찾아보았다.
접선 장소에서 남동쪽 2km 거리에 촌부리주 법집행사무소 파타야 지소(ChonBuri Legal Execution Office Pattaya Branch)가 있었다.
여기다.
곽용신은 마음을 정했다. 지금 다른 장소를 찾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홈 버튼을 눌러 지도 어플을 종료시킨 곽용신은 바로 다이얼 패드를 열어 전화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1155.
태국 관광 경찰 신고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태국 관광 경찰 핫라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기 너머에서 영어가 들려왔다. 안내 멘트가 아니었다. 상담원의 실제 목소리였다.
“파타야 곳곳에 폭탄을 설치했다. 새벽 1시부터 차례대로 테러를 가할 것이다. 1차 목표는 촌부리 법집행사무소 파타야 지소다.”
곽용신은 상대방이 바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녹음되었을 것이고, 곽용신의 말은 확실히 전달될 것이다.
관광 경찰 핫라인에 전화를 끊은 곽용신은 뒤이어 191번, 태국 왕립경찰 긴급 신고 번호를 눌렀다. 통화가 연결되고, 상담원이 태국어로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조금 전과 같은 테러 예고를 빠르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곽용신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이것이었다.
판을 흔든다. 아주 크게 흔들어 버린다.
에라완 사원 테러 사건 이후 태국 정부는 테러와 관련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폭탄을 설치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태국 경찰은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신고를 한 번호를 추적해 올 것이다.
그래서 1차 접선 장소 인근에 목표를 지정한 것이다. 테러 신고를 받은 경찰이 곽용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그러나 너무 빨리 찾지는 못하도록.
그것이 곽용신이 계산이었다.
관광 경찰과 태국 왕립경찰 긴급 신고 라인에다 테러를 일으키겠다고 예고한 곽용신은 바로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 중고 전화기 판매상에게 받아 온 심 카드 핀을 이용해, 심 카드를 꺼내어, 100달러 지폐 두 장을 주고 빼앗듯 들고 온 노키아 전화기에 유심을 끼워 넣었다.
하지만 전원을 켜지는 않았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아직은 전원을 켜서는 안 되었다.
테러 협박과 유심 변경을 마친 곽용신은 다시 몸을 돌려 쇼핑몰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오토바이 기사들에게 전력으로 달려갔다.
“사눅 파크, 텝 프라싯.”
그리고 목적지를 말했다. 문자로 알려온 접선 장소였다.
목적지를 들은 오토바이 기사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지금 시간에, 이 늦은 밤에 갈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토바이 기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일 뿐이었다.
500바트를 달라는 의미였다. 6km의 거리를 고려해도 과도하게 많은 돈을 제시했다.
곽용신은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두 장 남아 있던 천 바트 지폐 중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No changes(잔돈은 필요 없어).”
오토바이 기사는 재빨리 곽용신의 손에 들린 지폐를 받아 들었다.
곽용신은 뛰듯 오토바이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