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40)
명목상으로는 타운외국어학원의 강사팀장을 맡고 있는, 그러나 실제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정보상 길은 학원 4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학원의 직원들은 그가 다음 분기 강의 배치를 위해 잔업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며칠 전 그를 찾아온 남자, 데이빗 박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데이빗 박을 만난 길은 바로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몇 개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흔적은 NIA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 데이빗 박에 대한 보고서가 있었다. 미얀마 북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는 루 륀 장군이 대령이던 시절에 작성한 보고서였다.
트라이앵글에서 카지노 직원과 함께 모습을 감춘 데이빗 박은 미얀마로 몸을 숨겼고, 그를 루 륀이 추적했지만 실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추적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어디까지 흔적이 발견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었다.
보고서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부실한 내용이었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빗 박에 대한 또 다른 흔적이 미얀마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길은 곧바로 미얀마의 정보망을 가동했고, 정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흔적은 중국에서 입수할 수 있었다. 트라이앵글 사건 이후 중국국가안전부(MSS)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소폭 인사이동을 단행했고, 인사이동 대상자 중에 프라이멀 카지노 부지배인 업무를 담당하던 징춘(景春)이 있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징춘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것이 두 번째 흔적이었다.
역시 그다지 가치 있는 흔적은 아니었다. 징춘의 보고서에는 서로 눈이 맞아 몸을 숨긴 두 명의 남녀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손님과 하급 요원이 사랑에 빠졌고, 미얀마에서 실종되었다는, 어린아이라도 믿지 않을 어설픈 소설이었다.
가치 없는 흔적이었지만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길은 보고서를 작성한 징춘을 추적했고, 징춘이 MSS 감찰심계국 소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트라이앵글 카지노로 파견을 나온 것이었고, 그 ‘무언가’는 식양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일을 의뢰한 전화는 식양 쪽 라인을 타고 들어왔다. 데이빗 박이 식양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었다. 나이쵸의 내부 정보였다.
나이쵸는 정보는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면서 식양과 북한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박물관연대에 일을 의뢰했고, 박물관연대는 보고서를 작성해 나이쵸에 보고했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 데이빗 박의 이름이 있었다. 데이빗 박이라는 인물이 한국 쪽 정보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 짧게 담겨 있었다.
당시에 박물관연대의 수장 대니얼 양이 직접 화교 사업가로 위장해 트라이앵글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길은 알고 있었다. 대니얼 양이 그곳에서 데이빗 박을 만났다면, 그가 데이빗 박이라는 인물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되었다.
마지막 흔적은 미국이었다.
정확히 데이빗 박과 관련 있는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트라이앵글과 미얀마에서 소동이 있던 시기에, 서태평양을 관할하는 7함대가 벵골만으로 이동하는 긴급 훈련을 개시했다. 동시에, 10억 달러 규모의 치타공 항만 재개발 사업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CIA 요원 몇 명이 방글라데시로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어디에도 데이빗 박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길은 어쩐지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이 찾아낸 흔적은 이 정도였다.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길이 동원할 수 있는 정보망을 거의 총동원했음에도 찾아낸 흔적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트라이앵글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 데이빗 박과 관련된 아무런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길은 손톱으로 마우스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사람이라면 흔적이 남는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었다. 트라이앵글 카지노에서 소동이 일어난 시점을 제외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길은 마우스를 움직였다. 모니터 화면에 떠 있던 문서 창이 사라지고, 대신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데이빗 박의 사진이었다.
대니얼 양이 뿌린 사진이 아니었다. NIA가 가지고 있던 데이빗 박의 증명사진이었다.
“누군가가, 아마도 한국에서 만들어 낸 위장 신분은 확실한데. 어떤 목적으로? 식양? 그런데 갑자기 몸을 감추었다.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왜? 무엇 때문에? 그 여자가 식양과 관계가 있어서? 아니면 혹시 식양이라서?”
길은 화면 속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식양, 북한인 서용석. 두 사람의 교집합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길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림이 단편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전혀 조합이 되질 않았다.
그때, 책상에 올려진 길의 전화기가 울렸다.
길은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화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데이빗 박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그 전화번호를 본 길은 실망스럽다고 생각했다.
길은 고객을 골라 받았고, 그의 고객 대부분은 의뢰를 맡긴 후 길이 연락하기 전까지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돈과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기품과 예의는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길은 데이빗 박이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 데이빗 박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실망스러운데.”
길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에게 알려 줄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용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흔적은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지금은 말해 주기 싫은데.”
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쩐 일이십니까?”
길이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데이빗 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움?
길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당연히 서용석에 관해서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예상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길이 물었다.
-최대한 빨리 파타야에 가야 합니다.
데이빗 박이 말했다.
파타야?
“차량을 보내 드리면 됩니까?”
길이 말했다.
-얼마나 걸립니까?
데이빗 박이 물었다.
“지금 어디에 계신지, 파타야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만…… 빨라도 1시간 반 정도.”
1시간 반. 길은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차량을 확보하고, 그를 태우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30분에서 최대 1시간은 더 추가해야 했다.
-더 빠른 방법이 있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급한가 보군.
“지금 위치가 어디입니까?”
길이 물었다.
-……후웨이꽝입니다.
데이빗 박이 말했다.
정말 급한가 보군.
길은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위치를 노출할 정도라면 정말 급한 상황일 것이다.
“5분 후에 전화 드리죠.”
길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미있는 밤이 될 것 같은데…….”
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
-5분 후에 전화 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한규호는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로 잠시 생각했다.
길이라는 정보상은 1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미 지도 앱으로도 1시간 55분이 걸린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규호가 직접 운전한다고 해도 그보다 시간을 더 단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5분을 기다리라고 했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길이라는 정보상이 어떤 대안을 가져올지 궁금해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한규호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이 어떤 대안을 가져오든, 그 대안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파타야로 가는 것은 결정이 되었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한규호는 머리카락이나 지문 등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이 이야기한 5분이 되기도 전에 레지던스에서 그의 흔적을 모두 지워 버렸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형원의 부탁을 들어주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곳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흔적을 모두 지우고, 소지품도 모두 챙겼을 때, 한규호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한규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5분이 지나지 않았다.
한규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방콕 병원(Bangkok Hospital)으로 가시면 됩니다. 뉴 펫차부리로드, 방카피에 있습니다.
길이 바로 말했다.
병원. 한규호는 예상하지 못한 장소였다.
-1층에 도착하면 안내데스크에 BDMS, SKY ICU라고 말씀하십시오. 옥상의 헬리포트로 안내를 해 줄 것입니다.
종합병원의 응급 헬리콥터. 길이 마련한 대안이었다.
능력이 있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파타야로 가는 방법이 정해졌고, 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레지던스에서 문을 열고 나온 한규호는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지금 비행 계획을 제출하고 있을 겁니다. 엔진 예열이 끝나면 바로 이륙이 가능하답니다. 엔진 예열에 대략 5분 정도 걸리니, 병원에 도착하는 데 5분 이상 걸린다면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착륙 장소는 방콕 병원 파타야 분원입니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대략 30분 정도 예상된다는군요.
길이 말했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헬리콥터를 수배하고, 목적지를 지정하고, 지시를 내려놓은 것이다.
생각한 것보다 더 능력이 있군.
한규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작 몇 분 만에 대형 종합병원의 응급 헬리콥터를 동원할 정도의 능력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착 후에 육상 이동 수단이 필요하시지 않으십니까?
길이 물었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파타야는 길이 많이 막히는 편입니까?”
-그리 쾌적하다고 말할 수는 없군요.
“오토바이를 부탁드립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파타야에 있는 한국 정보요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주소가 필요하십니까?
“위치가 필요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위치……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파타야에 도착하면 전화 드리죠.”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지도 앱을 열어 방콕 병원의 위치를 파악했다.
직선거리로 4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한규호는 빠르게 경로를 외웠다.
레지던스 밖으로 나온 한규호는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차장 구석에는 125cc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한규호가 암시장에서 구입해 놓은 오토바이였다.
한규호는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라찻다피섹(Ratchadaphisek)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형원의 전화를 받고, 채 20분도 안 된 시점이었다.
***
길은 전화를 얼굴에서 떼어 냈다.
데이빗 박은 파타야에 있는 한국 쪽 요원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길은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길은 파타야에 한국 국정원 요원이 여행사 사장으로 위장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요원의 이름이 홍성민이라는 것도, 여행사의 상호가 오라오라투어라는 것도, 그리고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바로 알고 있다고 말하면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고, 그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또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빗 박이 파타야에 가기 위해서는 최소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시간이 지난 후 알려 주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주소가 아니라, 위치라.”
데이빗 박은 한국 요원의 위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소가 아니라 위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 요원이 주소지에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고, 파타야에 무언가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길은 지금까지 파타야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의 정보망이 느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무언가가 진행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은 파타야와 라용 지역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국 국정원의 파타야 위장 포스트인 오라오라투어를 감시하고, 국정원 요원 홍성민의 위치를 파악하고, 동시에 파타야 전 지역 정보망을 1급으로 가동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이네. 환락의 도시에 가보는 것은.”
길은 그렇게 말하고 소지품을 챙겨 들었다.
타운외국어학원에서 파타야까지는 대략 15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