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87화 (287/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9)

한규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수면이라는 상태로 돌입한 지 하루 반나절이 넘었지만, 한규호는 마지 조금 전에 침대에 누운 것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신체 세포 말단까지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한규호만이 할 수 있는 수면 방법이었다.

물론 한규호는 사람이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영양 섭취가 필수적이었다.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했고, 음식을 먹었다면 용변을 봐야 했다.

한규호는 오전 6시에 칼로리바 하나로 영양을 섭취했고, 자정에 한 번 용변을 봤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규호는 계속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한규호가 단순하게 잠을 자고 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연락을 기다리는 것. 기다림이 지금 한규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을 길이라고 말한 정보상, 완이 소개해 준 남자에게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 줄 것을 의뢰했다.

서용석이 방콕에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없다면 언제 방콕을 빠져나갔는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부탁하고, 다시 이곳, 후웨이꽝역 인근에 임시 아지트로 마련한 레지던스로 돌아와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고, 한규호는 그때까지 침대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잠을 잘 계획이었다.

그런 한규호의 잠을 깨운 것은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전화기였다.

전화가 걸려왔고, 미세한 진동은 잠들어 있던 한규호의 감각에 걸렸다. 한규호는 눈을 떴고, 몸을 일으켰고,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았다.

지금 한규호에게 전화를 해 올 사람은 단 한 사람, 길이라는 이름의 정보상뿐이었다.

그래서 한규호는 진동을 느꼈을 때, 길의 전화일 것으로 생각했고,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면에는 김형원 사장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고, 한규호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한규호는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보면서 전화를 받을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다.

지금 김형원 사장의 전화번호가 가지는 의미는 단 하나뿐이었다.

일을 의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한규호는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한규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김형원이기에 전화만이라도 받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한규호가 말했다.

-아직 방콕인가?

김형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그 목소리에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상시와 달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묘한 차이였다.

그러나 남들보다 특출난 감각을 지니고 있고, 김형원과 오랜 시간 같이 일해 온 한규호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김형원 사장답지 않게 목소리에서 감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도움이 필요해.

김형원이 말했다.

도움이 필요해?

한규호가 김형원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일이 있다.

평소의 김형원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도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한규호는 바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처음 들어 보는 감정적인 목소리 톤, 도움이라는 단어, 평소의 김형원이 아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서용석을 추적하고 있었다. 김형원의 의뢰가 무엇이든, 지금 한규호에게 서용석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다시, 다시 생각해 줘. 부탁해. 지금 네가 아니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제발. 부탁하네.

김형원이 다시 말했다.

한규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김형원이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부탁한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김형원답지 않았다.

한규호가 김형원의 의뢰를 거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김형원의 대답은 같았다.

알겠네.

김형원은 섭섭해하지도, 그렇다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제발이라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으시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곽용신과 김승섭이 위험해.

김형원이 말했다.

한규호는 곽용신과 김승섭이라는 이름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완을 구출하기 위해 방글라데시로 찾아온 국정원 요원. 무기 하나 없이 CIA 특작팀 총구 앞에 몸을 들이밀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한규호는 꼭 갚아야 할 은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국정원 요원인 그 두 사람이 방글라데시로 한규호를 구출하러 온 것은 명령을 이행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한규호는 의뢰를 받았지, 명령이나 지시를 받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상황이 좀 곤란합니다.”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내가 하는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해도 안 되겠나?

김형원이 말했다.

“개인적인…… 부탁입니까?”

-본사의 의뢰가 아니야. 내가 하는 부탁이야.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라고 해도 안 되겠나?

김형원이 다시 말했다.

김형원이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부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규호는 김형원의 감정적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간절함. 김형원은 마치 가족을 구해 달라는 듯, 간절함을 담아 부탁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지금까지 김형원이 이렇게 감정을 담아, 하물며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한 번도 아버지의 약한 부분을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분간은 태국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핑계를 대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날 생각이 없었다. 서용석이 태국을 떠났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지, 한규호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한규호는 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파타야.

김형원이 말했다.

파타야? 방콕 남쪽에 있는 파타야?

-파타야에 있는 요원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어. 곽용신과 김승섭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그리로 가고 있어.

김형원이 말했다.

한규호는 의아했다.

고작 그 정도로 지금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곽용신과 김승섭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고.

한규호의 의아함을 알기라도 하듯 김형원이 말했다.

“또 다른 팀은 어디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다른 팀은 없어. 그 세 명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야.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버려졌을 가능성이 있어.

“버려졌다니, 누구에게서 말입니까? 본사?”

-김훈.

김형원이 말했다.

김훈. 국정원 원장, 그리고 정보위원회 위원장의 이름.

한규호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트라이앵글 작전에서 돌아온 후, 김형원의 호출을 받고, 태청무역으로 찾아갔을 때의 기억이었다.

***

“너는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원하는 무언가는 있다. 애국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봉사?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너의 욕망을, 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좋다. 그걸 위해서라는 불순한 의도라도 상관없다.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우리가 너를 도울 것이다. 우리가 너를 보호할 것이다.”

태청무역 사장실에서, 한규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훈이 그렇게 말했다.

“국가라는 명분 아래, 조직을 위해 요원을 희생시키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 정보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더 이상 이름 없는 별을 새기지 않기 위해서 정보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그 요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의 힘을 키워야 한다. 한규호, 너 스스로가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그래서 네가 조직을 지키고, 요원들을 보호한다면, 우린 조직의 모든 것을 걸고 너를 보호하겠다. 그 여자까지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김훈이, 더는 이름 없는 별을 새기지 않겠다고 말했던 김훈이 요원들을 버렸다고?

“김훈? 원장?”

한규호가 물었다.

-그래. 김훈이 무언가를 꾸몄어. 무엇을 꾸몄는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 하지만 곽용신과 김승섭, 그리고 파타야에 있는 요원 하나가 위험하다는 것은 확실해. 그들을 구해야 해.

김형원이 말했다.

김형원은 국정원 원장인 김훈이 국정원 요원인 곽용신과 김승섭을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김훈이 자기 요원들을 버렸다는 말입니까? 혹시 유만호도 껴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유만호, 그날 태청무역에서 한규호를 용병 취급하면서 김훈에게 판을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었다.

-파타야에 있던 곽용신을 공항으로 유인한 사람이 유만호야.

김형원이 말했다.

김훈과 유만호, 정보위원회의 작전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홍성민, 파타야에 있던 요원이 홍성민이야. 홍성민에게서 연락이 끊겼어. 곽용신은 지금 다시 파타야로 돌아가는 길이야. 1시간 이내에 도착할 거야. 김승섭은 파타야에서 홍성민 찾고 있고.

한규호는 김형원이 이렇게 빨리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질 못했다. 그만큼 그가 간절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면 일단 곽용신과 김승섭에게 안전한 곳으로…….”

-홍성민이 레드원을 발령했어.

한규호는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김형원의 말에 끊겨 버렸다.

레드원. 현장 요원이 발령하는 최고 경계 상황 코드.

레드원이라는 단어를 들은 한규호의 머리에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레드……원.”

-곽용신과 김승섭은 홍성민을 절대로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지원팀도, 총 한 자루 없는 상태로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를 곳으로 가고 있어. 부탁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부탁하네. 제발.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게.

절대로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김형원의 그 말이 한규호의 가슴 안에서 메아리쳤다.

-팀장님, 11챠리를 발동합니다.

진도5 안성종 상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치 조금 전에 들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규호는 눈을 감았다.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안 된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지금 서용석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렇지만 한규호는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파타야로 이동해 그 세 명을 찾아 줘. 그리고 복귀할 때까지 안전을 확보해 주게. 복귀 방법은 내가 찾아보겠어. 아무도 믿지 마.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김형원이 말을 멈추었다.

한규호는 이어질 김형원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나에게서 연락이 끊겨도 국정원의 지시는 받지 마. 진웅이에게 연락해.

정진웅. 현 청와대 민정수석의 이름이었다.

-지금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김형원이 다시 말했다.

한규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파타야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오라오라투어. 바로 주소를 보내 주겠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규호는 잠시 끊긴 전화를 바라보았다.

전화를 바라보면서 눈 덮인 함경북도를 떠올렸다.

11챠리를 발동한 진도5 안성종 상사를, 자신을 두고 가라고 말하던 진도1 윤재운 중사를, 1시간 후에 따라가겠다고 했던 진도0 이규철 대위를, 그리고, 눈길을 해쳐 가며 점점 속도를 늦추던 진도2 박종연 중사를 떠올렸다.

그 절망의 순간에서도 진도팀의 누구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파타야로 달려가는 곽용신처럼. 파타야에서 홍성민을 찾는 김승섭처럼.

전화기를 바라보며 함경북도를 떠올릴 때, 그의 손에 있던 전화기가 진동했다.

김형원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전화번호 하나와 지도 앱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한규호는 링크를 눌러 지도 앱을 실행했다.

-ORAORA Tour, Moi, 9 265/84, Phettrakul Rd.

파타야 오라오라투어의 위치가 휴대전화 화면에 떴다.

한규호는 이동 경로를 확인해 보았다.

현재 위치에서부터 141km. 자동차로 1시간 55분이 걸렸다.

거리와 이동 시간을 확인한 한규호는 통화 목록을 뒤져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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