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86화 (286/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8)

초조한 얼굴로 전화기를 얼굴에 붙이고 있는 곽용신의 귀에, 홍성민의 목소리 대신 태국어 멘트가 들려왔다.

곽용신은 태국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안내 멘트가,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씨발.”

곽용신은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다시 통화 목록을 뒤져 다른 번호를 찾아냈다.

김승섭의 번호였다.

“제발 좀 받아라! 이 자식들아!”

곽용신은 그렇게 소리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행스럽게도 짧은 통화연결음 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예.

전화기 너머에서 김승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야?”

곽용신이 물었다.

-호텔입니다.

김승섭이 대답했다. 그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였다.

곽용신은 김승섭의 진지한 목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김승섭이 곽용신의 목소리에서 심각함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홍성민이 전화를 안 받아. 혹시 거기 찾아오지 않았어?”

곽용신이 물었다.

-여기 없습니다. 조금 전 전화가 왔었습니다. 레드 원을 발령했습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씨발.”

곽용신의 몸이 굳어졌다.

레드 원. 현장 요원이 발령할 수 있는 최고 경계 상황 부호.

곽용신이 느꼈던 불안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곽용신은 불안감을 떨구기 위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세히 말해 봐.”

곽용신이 물었다.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레드 원을 발령했습니다. 어디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물쇠를 잠그라고 지시했고, 45분쯤까지 호텔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그리고는 연락이 없고?”

-네.

김승섭이 말했다.

곽용신은 눈을 감았다.

씨발.

곽용신은 다시 속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문자를 확인했어도.

“알았어. 일단 대기. 지금 가고 있으니까, 내가 갈 때까지 움직이지 마.”

곽용신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위해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어 냈다.

-잠깐만!

전화기에서 김승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곽용신은 다시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갔다.

-지금 여기로 오는 중입니까?

“그래.”

-지원팀도?

“……아니. 지원팀은 없어.”

곽용신이 말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김승섭이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기다리고 있어.”

-얼마나 걸립니까?

김승섭이 물었다.

또 다른 불길한 예감이 곽용신에게 찾아왔다.

얼마나 걸리냐고?

김승섭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기다려. 대기하고 있어.”

곽용신이 말했다.

-얼마나 걸립니까?

김승섭이 다시 물었다.

“기다려!”

곽용신이 소리쳤다.

-형님!

김승섭도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곽용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싶었다.

-여행사로 가 보겠습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대기해!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대기하고 있어!”

곽용신이 다시 외쳤다.

-형님이라면!

김승섭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형님이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고만 있을 겁니까? 이곳에 형님이 있고, 내가 그곳에 있다면, 형님은 내가 올 때까지 안전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까?

김승섭이 말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곽용신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형님, 얼마나 걸립니까.

다시 김승섭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45분.”

곽용신이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오자마자 홍성민에게 전화했고, 홍성민이 전화를 받지 않자, 바로 김승섭에게 전화한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1시간 20분은 걸렸다.

-1시간은 넘게 걸리겠군요. 바로 여행사로 가 보겠습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김승섭은 곽용신이 거짓말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선배님,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1시간은 긴 시간입니다. 그때까지 성민이 형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김승섭이 말했다.

평상시에 그를 부르는 호칭, ‘형님’이나 ‘용신이 형’ 대신에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요원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형님, 평생 후회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형님이라고 했다.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평생 후회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김승섭의 말이 곽용신의 마음을 송곳처럼 아프게 찔러 들어왔다.

후회할 것이다.

홍성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홍성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홍성민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두 사람만 안전하게 몸을 빼낸다면.

죽을 때까지 후회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죽어라 훈련받은 것 아닙니까.

김승섭이 말했다.

곽용신은 다시 눈을 감았다.

김승섭은 보호받아야 할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 그도 훈련받은 요원이었다.

“……절대로.”

곽용신이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말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마. 안전이…… 최우선이야. 만약…… 상황이……….”

거기까지 말 한 곽용신은 말을 멈추었다.

곽용신은 이빨을 꽉 물었다.

그리고 힘겹게 뱉어 내듯 말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둘만 빠져나간다.”

아팠다. 그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아팠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씨발. 씨발. 씨발. 개 씨발 새끼.”

곽용신은 그렇게 소리쳤다.

곽용신만 공항으로 오라고 지시했던 유만호에게, 그에게 항공권과 여권을 넘겨주던 지부장에게, 그리고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온 자기 자신에게 욕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곽용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욕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곽용신은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통화 목록을 스크롤 해, 다른 전화번호를 찾아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유일한 사람에게.

***

김형원은 태청무역 사장실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장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담배라도 피우지 않고서는 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거의 필터에 닿을 때까지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다시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려던 그 순간에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가 진동했다.

액정에는 곽용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

김형원은 손에 든 담배를 집어 던지고,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

김형원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알고 있었습니까!

김형원은 곽용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되물어보는 대신에,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가 아는 곽용신은 이렇게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곽용신이 이렇게 흥분했다는 것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사에 지원 요청을 했어. 제대로 된 지원을 못 해 주면 차라리 다시 불러들이라고 했고, 본사에서는 계속 기다리라는 지시만 내려왔어. 청와대의 재가가 필요하다는 뉘앙스였고. 이게 내가 아는 전부야.”

김형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을 빠르게 말해 주었다.

곽용신이 판단할 수 있게 하려고, ‘무엇을 말하는 거지’라든가, ‘그쪽 상황부터 먼저 보고해’ 같은 쓸데없는 말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을 빠르게 말해 주었다.

부하에게 먼저 상황 보고를 했다.

-몰랐습니까?

곽용신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김형원이 빠르게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형원은 채근하지 않았다. 곽용신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생각을 끝낸 듯, 곽용신이 말했다.

“어떤 지원이 필요하지? 지금 상황이 어떻지?”

김형원이 물었다.

-119.

곽용신이 말했다.

구출 임무를 의미하는 작전 코드였다.

젠장.

김형원은 속으로 그렇게 내뱉으며 빠르게 말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본사에 요청…….”

다시 한번 김형원의 말이 끊겼다.

-본부는 안 됩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유만호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곽용신이 말했고, 김형원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

곽용신은 김형원과의 마지막 통화 이후에 있었던 일을 빠르게 보고했다. 고작 2분도 안 되는 보고였지만, 김형원이 알아야 할 것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홍성민은 김훈 원장에게, 곽용신은 유만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홍성민은 곽용신과 김승섭 모르게 두 사람의 소문을 퍼트리라는 지시를 받았고, 곽용신은 두 사람을 두고 공항으로 가서 지원팀을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유만호의 지시에 따라 곽용신이 공항으로 왔고, 지부장에게 여권과 항공권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곽용신은 명령을 거부했고, 다시 파타야로 내려가고 있다. 홍성민은 지금은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고, 김승섭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여행사로 가고 있다.

그런 내용이었다.

“이 개새끼들…….”

곽용신의 이야기를 들은 김형원은 욕을 참을 수 없었다.

유만호와 김훈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김형원에게는 정보를 차단한 채로.

두 사람에 대한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곽용신의 목소리가 김형원을 현실로 끌고 왔다.

김형원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김훈이나 유만호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파타야에 있는 세 사람을 지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어디쯤인가?”

김형원이 물었다.

-파타야로 가는 고속도로 위입니다. 1시간 15분가량 남았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일단 멈춰. 지금 파타야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김승섭도 당장 파타야에서 빠져나오라고 해.”

김형원이 지시를 내렸다.

-불가합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말을 들어! 일단 안전이 최우선…….”

-레드원 상황입니다.

다시 곽용신의 외침이 김형원의 말을 잘랐다.

-홍성민이 레드원을 발령했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

-김승섭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그리고 나도 멈추지 않을 거야.

김형원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김형원은 눈을 감았다.

그가 거기 있었어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지부장이 있었다고 했지?”

-지부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방콕 지부장은 유만호의 직속 후배였다. 그 말은 방콕지부에서 곽용신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다시 전화 주지. 홍성민이 있는 여행사 이름이 어떻게 되지?”

-오라오라투어입니다. 주소는 구글맵에서 검색 가능합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행동해. 절대로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

김형원이 말했다. 그러나 곽용신도, 김승섭도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김형원은 잘 알고 있었다.

“빠르게…… 지원팀을 보내지.”

김형원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부탁드립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비장하게 들리는 곽용신의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얼굴에서 전화기를 뗀 김형원은 빠르게 생각했다.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 것인가.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본사에서 지원을 받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자. 국정원에서는 그 둘을 돕지 않을 것이다.

김훈과 유만호가 지금 그림을 그렸다면, 그리고 유만호 라인인 방콕 지부장이 유만호와 함께 한다면 방콕지부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뭐가 있지?

돈?

곽용신이 사용하는 태청무역 법인계좌에 충분한 지금을 지원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김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한 다음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에는 억만금의 돈이라도 가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마치 머리에 연기로 가득 찬 듯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한국에만 있었어도, 아니, 내가 방콕에만 있었어도, 뭐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김형원은 기억 속에서 한 문장을 끄집어냈다.

-태국에 있습니다. 지금 방콕입니다.

며칠 전 통화에서 들었던 말.

지금 김형원에게 방법은 없었지만, 카드는 한 장 있었다.

김형원만이 가진 유일한 카드, 조커(Joker)가 한 장 있었다.

김형원은 다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통화 목록을 스크롤해 며칠 전 통화했던 번호를 찾아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얼굴로 전화기를 가져가며 작게 말했다.

“제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