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6)
곽용신은 바로 여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페이지, 사진과 신상명세가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곽용신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증명사진이 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곽용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성(Sur name)에는 JUNG이, 이름(Given name)에는 MUJUN이, 하단에는 한글로 ‘정무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 안에는 여권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A4용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곽용신은 여권과 같이 들어 있던 A4지를 꺼내 들었다. 타이항공의 E-티켓이었다.
항공편은 TG658, 오후 11시 10분 방콕 공항에서 출발해, 오전 6시 3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계획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출발일은 오늘, 예약자는 정무준이었다.
곽용신은 고개를 들어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지부장은 누군가에게 전화하려는 듯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 지부장에게 곽용신이 말했다.
“무슨 짓이지?”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던 지부장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곽용신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지부장이 물었다.
그는 곽용신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나에게? 반말할 리가 없는데? 그럼 누구지?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주위에는 곽용신과 지부장 자신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주위를 둘러보는 지부장에게 곽용신이 다시 물었다.
“너,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
“무슨 개수작을 하고 있는 거지?”
곽용신이 지부장의 말을 잘랐다.
지부장은 그때야 확신했다. 곽용신이 자신에게 말한다는 것을, 그것도 반말로.
“이 새끼가…… 미쳤어? 너,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지부장이 곽용신의 눈을 보며 말했다.
지부장의 눈에 담겨 있던 의문은 사라졌다. 대신 분노라는 감정이 눈동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을 마주하는 곽용신의 눈빛은 더욱 강렬했다. 지부장의 분노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눈빛이었다. 주눅 들기는커녕, 더욱 강렬한 분노를 담아 지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고 물었다.”
곽용신이 낮게 말했다.
지부장은 잠시 동안 곽용신을 노려보다가 먼저 눈을 돌렸다.
시선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예정된 계획에 따라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전화로 시선을 옮겼을 뿐이었다.
지부장은 전화번호를 찾은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곽용신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두고 보자, 이 새끼야. 일단 전화부터 받아.”
그러나 곽용신은 전화를 받아 들지 않았다. 그저 분노 가득한 눈으로 지부장을 노려볼 뿐이었다.
“받아!”
지부장이 말했다.
곽용신은 분노 가득한 시선을 지부장에게 고정한 채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그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는 의도로 전화를 받은 것이다.
-유만호다.
전화는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곽용신이 얼굴로 전화기를 가져가자, 유만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뭡니까?”
곽용신이 물었다.
-복귀한다.
유만호가 말했다.
“이게 뭡니까?”
곽용신이 다시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복귀해.
유만호가 말했다.
“이게 뭐냐고! 이 새끼야!”
곽용신이 소리쳤다.
혼잡한 출국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곽용신을 돌아볼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대답해 이 개새끼야! 뭐냐고! 이게 도대체 뭐냐고? 도대체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거야? 무슨 개수작이야! 대답해 이 새끼야!”
곽용신이 다시 소리쳤다.
-곽용신.
전화기 너머로 유만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후회할 짓 하지 마.
유만호가 말했다.
“개소리하지 말고 설명해! 무슨 개수작이야!”
-명령이야!
전화기에서 유만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유만호가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곽용신 앞에 서 있던 지부장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명령’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국정원에서 ‘명령’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막강했다. 국정원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설사 그것이 불합리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부장이 속으로 곽용신에게 말했다.
명령이다 이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새끼야.
하지만 바로 이어진 곽용신의 말과 행동에서 지부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개애새끼야!”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기를 땅바닥에 던져 버린 것이다.
지부장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전화기를 따라갔다.
있는 힘껏 바닥에 던져진 전화기는 바닥에 충돌한 후 반탄력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전화기가 다시 바닥으로 막 떨어지려던 찰나, 지부장의 멱살이 잡혔다.
지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바싹 붙은 곽용신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지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뭘 꾸미고 있는 거야?”
곽용신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지부장은 그 목소리가 마치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다고 느꼈다. 목덜미를 물어뜯기 전, 마지막 신호처럼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공포가 지부장의 신경을 타고 흘렀고, 지부장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건방진 곽용신도 유만호의 전화를 받으면 고분고분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분고분해지면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었던 행동에 교훈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 곽용신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답해, 이 새끼야!”
곽용신이 소리쳤다.
“나, 나도 몰라. 그냥 지시만 받았을 뿌, 뿐이야.”
당황한 지부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곽용신은 더 묻고 싶었다. 누가 지시했는지, 뭐라고 지시했는지, 지시를 받고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곽용신의 눈에 그를 향해 다가오는 보안 요원의 모습이 보였다. 소란이 일어나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과, 곽용신! 지, 진정해! 일, 일단 이거 놓…….”
곽용신은 자신을 달래려 하는 지부장의 멱살을 놓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밀쳐 버렸다.
지부장을 밀쳐 내듯 집어던진 곽용신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젊은 요원이 타고 떠나 버린 차량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개 씨발 새끼들!”
곽용신은 그렇게 내뱉고는 재빨리 공항 청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쓰러진 지부장도, 그런 지부장에게 다가오던 보안 요원도, 갑작스럽게 몸을 날린 곽용신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
썽태우에서 내려 여행사까지 전력 질주로 달려온 홍성민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재빨리 여행사문 자물쇠에 꽂아 넣었지만, 문을 열지는 못했다.
전력 질주 후에 갑자기 몸을 멈추자,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그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홍성민은 열쇠를 꽂은 채로, 필사적으로 울렁거림을 참아 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참아 내질 못하고, 몸을 잔뜩 구부린 채로 토사물을 쏟아 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속을 게우고 나서야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젠장할.”
홍성민은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토하고 싶었다. 속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비워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금보다 귀했다.
홍성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굽혔던 몸을 펴자, 다시 매스꺼움이 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젠장할.”
홍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물쇠에 꽂혀 있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여행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 꺼진 사무실은 그가 나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행사 안으로 들어온 홍성민은 불도 켜지 않고 직원이 사용하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여행사 승합차가 숙소 앞에 주차되어 있었고, 직원이 돌아왔다면 자동차 열쇠를 언제나처럼 책상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상에는 자동차 열쇠가 보이지를 않았다.
홍성민은 책상 밑을 보기 위해 몸을 굽혔다. 직원은 가끔 빨리 퇴근하려는 생각에 자동차 열쇠를 던지곤 했었고, 가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자동차 열쇠가 책상을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고는 했었다.
몸을 굽히자 다시 매스꺼움이 찾아왔다. 홍성민은 목을 타고 넘어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책상 밑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 불빛으로 책상 밑을 비춰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자동차 열쇠는 없었다.
홍성민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남은 곳은 그의 책상이었다.
지금까지 직원이 그런 적은 없었지만, 혹시 홍성민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홍성민의 책상에도 자동차 열쇠는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홍성민은 직원이 개인적으로 회사 승합차를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그래서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자동차 열쇠를 사무실에 두라고 여러 번 강조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자동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들고 나갔을까?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 떨어져 있을까?
홍성민은 사무실 불을 켜고 자동차 열쇠를 본격적으로 찾아볼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내실에 예비용 열쇠가 있었다. 서류와 비상금을 챙기면서 열쇠를 같이 챙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홍성민은 내실로 통하는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소파와 소파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는 김승섭과 곽용신이 사용했던 종이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홍성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홍성민은 동작을 멈추고 잠시 그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이해한다.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지.
그 종이컵을 손에 든 채로 곽용신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김훈 원장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두 사람 모르게 소문을 내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왜 두 사람에게 바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이야기를 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무엇이 겁나서 그 사실을 알리기를 주저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두 사람에게 그 사실을 숨긴 것일까?
-정말 운 좋게 잘 풀리면 감옥 가는 것으로 끝날 수 있겠네요.
김승섭이 그렇게 말했었다.
일이 잘 풀리면 감옥에 간다. 잘 안 풀리면? 감옥에도 가지 못한다. 살아 있어야 감옥에라도 가는 것이다.
홍성민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마지막 커피가 아니었을까? 셋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셨던 마지막 커피가 아니었을까?
앞으로는 저렇게 셋이서 믹스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김훈 원장의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셋이서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홍성민의 머리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홍성민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이빨을 사리물면서 나직하게 내뱉었다.
“개좆같은 소리 하지 마. 이 씨발 놈아.”
홍성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불길한 예감을 떨구기 위해, 발에 힘을 주고 빠르게 내실 문으로 다가갔다.
홍성민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힘을 주기 위해 속으로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내실로 연결되는 문을 열기 위해 두 번째 열쇠를 꽂아 넣었다.
열쇠가 돌아가고, 철컥 소리와 함께 내실 문 자물쇠가 열렸다.
홍성민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의 어둠보다 더 짙은 내실의 어둠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홍성민은 불을 켜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어디 있는지, 전등 빛이 없다 해도 홍성민은 찾아낼 수 있었다.
서류. 비상금, 차 열쇠.
홍성민은 그렇게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불 꺼진 내실 안으로 오른발을 들이밀었다.
오른발이 내실 바닥에 닫고, 무게중심이 내실로 넘어가고, 왼발이 막 문지방을 넘은 그 순간에, 홍성민의 목에 무언가가 닫았다.
목에 닿은 무언가를 느낀 홍성민이 방어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목을 타고 고압의 전류가 홍성민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인 홍성민의 온몸을 타고 빠르게 흘러갔다.
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홍성민의 온몸이 빠르게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