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5)
“일단 좀 기다려요.”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유만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유만호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전화해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만 질질 끌 거라면 그냥 불러들여!
전화기 너머에서 김형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만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고향 선배, 그리고 국정원 선배라는 이유로 대접해 주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국정원 내 직위는 유만호가 위였다.
모용진이 사라진 지금, 유만호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정원 이인자였다. 차기 국정원장 1순위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런 그에게 김형원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유만호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소리를 질러 그 입을 닫게 해 주고 싶었다.
젠장. 내가 그렇게 반대했는데.
유만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보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유만호는 다섯 명의 창립위원 중 김형원을 포함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결국 김형원은 정보위원회 구성원이 되었다.
유만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뱉어 내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형님, 소리 지르지 맙시다.”
유만호가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답이 없었다.
“알잖습니까. 형님이나 나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위에서 결정이 나야지, 그전까지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형님도 알잖습니까.”
유만호는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이미 결정은 나 있었다.
김형원에게는 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반대할 것이 뻔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요. 조만간 결정 나겠지. 모용진 건이라 위에서도 조심스러워서 그렇겠지.”
유만호가 김형원을 달래는 어투로 말했다.
김형원이 미쳐서 원장에게 전화라도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물론 김훈 원장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조직 수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황은 조직에도, 유만호에게도 절대로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형원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형원을 달래던 유만호에게 갑자기 다른 생각이 찾아왔다.
김형원이 원장에게 전화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원장에게 지금처럼 지랄해 대면, 원장도 참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면 김형원이 정보위원회에서 쫓겨난 첫 번째 회원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유만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유만호는 바로 머리를 저었다.
김형원을 쫓아내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유만호가 국정원장 겸 정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을 때.
“그리고, 이건 좀 나도 확인한 것은 아니라서, 말하기 좀 그렇기는 한데.”
유만호는 당근을 하나 던져 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청와대에 보고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곽용신이 입회 말이요. 통과되면 곽용신은 위원회 다음 기수가 될 겁니다. 그냥 그렇게, 거기 두지는 않을 겁니다. 진정 좀 해요. 형님이 이럴수록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는 거 몰라요? 일단 기다려 봐요. 형님이 대기하라고 했고, 그러고서 추가 지시 안 내렸잖아요. 그러면 대기하고 있겠지.”
유만호가 말했다.
이제 당근은 다 던져 주었다.
남은 것은 채찍질뿐이다.
-그날.
전화기 너머에서 김형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해요.”
-프라하의 그날 이후, 나는 너를 믿지 않아. 물론 김훈도.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유만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김형원이 이렇게 적의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개새끼.”
전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유만호가 중얼거렸다.
유만호는 마음을 굳혔다.
이번 일이 끝나면, 김형원을 확실히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가 생각한 ‘제거’는 국정원에서 쫓아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
곽용신은 끝끝내 김형원과 통화를 하지 못했다.
다시 전화를 내려놓은 곽용신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일종의 배신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김형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김형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 중이었다.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김형원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곽용신은 전화기를 조수석으로 던져 버렸다.
곽용신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음만큼 냉정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일단, 공항에서 지원팀이라는 놈들을 만나자. 그놈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지켜보고, 그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자.
곽용신은 다시 시계를 살펴보았다. 지원팀을 만나고, 다시 파타야로 내려가면 늦어도 자정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김승섭과 홍성민을 만나 결정하면 된다.
그렇게 정리를 끝낸 곽용신의 눈에 수완나품 공항으로 진입하는 나들목이 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곽용신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차량을 천천히 왼쪽 차선으로 이동시켰다.
그때 조수석에 던져진 전화기가 다시 진동했다.
곽용신은 다시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감을 가진 채로 밝게 빛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면에는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태국 번호였다. 홍성민의 번호도 아니었다.
곽용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곽용신?
‘여보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곽용신은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곽용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곽용신 요원, 대답해.
상대방이 말했다.
“말하십시오.”
곽용신이 말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로 출국장 쪽으로 오도록. 5번 게이트 앞에 차를 세워. 알겠나?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말했다.
곽용신은 다짜고짜 반말로 지시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알겠다고 말했다.
대답을 들은 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곽용신은 인상을 쓰며 전화기를 던져 버렸다.
이번에는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전화기는 조수석 의자에 맞고는 조수석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곽용신은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수완나품 공항 청사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썽태우에 앉아 있는 홍성민은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어 내며 소리쳤다.
썽태우에 타고 있는 다른 승객들이 놀란 표정으로 홍성민을 바라보았지만, 홍성민은 그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여전히 통화 중이라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곽용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단 한 번도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젠장할.
홍성민은 다시 그렇게 속으로 외치면서 빠르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홍성민이 레드 원을 발령했고, 레드 원과 같은 긴급 상황에서는 문자메시지나 SNS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원칙을 고수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문자메시지를 보낸 홍성민이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에 센트럴 마리나가 보였다. 그가 내려야 하는 장소였다.
센트럴 마리나를 지나자마자 홍성민은 하차 벨을 눌렀고, 썽태우가 멈추자마자 그는 빠르게 뛰어내렸다.
운전기사에게 20바트 지폐 한 장을 던지듯 주고, 몸을 돌려 빠르게 여행사 쪽으로 뛰어갔다.
하차 지점에서부터 여행사까지는 대략 400m 정도가 떨어져 있었다.
홍성민은 그 400여 미터를 다시 전력으로 뛰어가면서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내실로 가자. 내실로 가서 금고를 열고 문서부터 챙기자.
몸을 빼낼 때는 가지고 있던 국정원 문서를 중요도와 상관없이 전부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서를 폐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여행사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는 이상 짧은 시간 내에 모든 문서를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문서를 챙기고, 김승섭을 픽업한 후, 안전 장소로 몸을 숨긴 다음에 폐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비상금도 같이 챙겨야지. 가방이 어디 있었지? 사무실 어디 있겠지. 있을 것이다. 차가 있을까? 직원이 타고 나가지는 않았겠지? 차 열쇠는? 오늘 오후에 픽업 손님이 있었으니, 차 열쇠는 직원 책상에 있겠지? 차 열쇠. 서류, 비상금 챙기고, 승합차에 타고, 호텔로 가서 승섭이를 확보. 그리고? 그다음은?
홍성민은 전력으로 뛰어가면서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생각이 막혔다. 전력으로 뛰었기 때문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젠장. 일단 승섭이부터 태우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문서, 차 열쇠, 비상금. 이것만 챙기고 바로 빠져나온다.
홍성민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는 모든 에너지를 뛰어가는 데 집중했다.
400여 미터를 2분 만에 달려간 홍성민의 눈에, 여행사 앞에 서 있는 승합차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사 승합차는 제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직원은 차만 놓고 퇴근했는지, 여행사의 불은 꺼져 있었다.
차량을 확인한 홍성민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전속력을 유지한 채로, 주머니에서 여행사 현관문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바로 문으로 달려가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
공항 출국장 램프로 들어선 곽용신은 차량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상황을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항 3층 출국장에 진입하는 램프에는 이미 수많은 차량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곽용신은 차량을 왼쪽으로 붙이며 속도를 조금 더 줄였다. 5번 게이트에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상황을 파악해 두고 싶었다.
5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고, 게이트까지 대략 30여 미터가 남은 상황에서 곽용신은 손을 흔드는 한 남자를 보았다.
곽용신은 그가 흔드는 손이 자신을 향해 흔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트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모습이 자세하게 보였다.
그리고 곽용신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전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손을 흔드는 남자는 젊어 보였다. 전화에서 들려오던 중년 남자의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이였다.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곽용신은 줄어드는 거리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약속했던 5번 게이트 앞에 멈추었고, 곽용신은 차량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그러나 곽용신은 차 문을 열지도, 창문을 내리지도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젊었다. 20대 후반? 많아도 30대 중반?
손을 흔들던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노크했다.
곽용신은 창문을 살짝 내렸다.
“내리시죠.”
젊은 남자가 말했다. 한국어였다.
“누구지?”
곽용신이 물었다.
“일단 내리시죠.”
남자가 다시 말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곽용신이 다시 말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곽용신의 시선도 남자를 따라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곽용신이 받은 전화 목소리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중년 남자가 차량으로 다가와 말했다.
“내려.”
조금 전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비슷했다. 기분 나쁘게 들렸던 그 목소리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용신은 내리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곽용신이 물었다.
중년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인상 쓰면 어쩔 건데.
곽용신은 그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지부장이다. 곽용신 요원. 내려.”
중년 남자가 말했다.
지부장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곽용신은 바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동안 중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얼굴에 담긴 감정을 해석했다.
좋은 감정은 아니군.
곽용신은 얼굴에 담긴 감정을 그렇게 해독했다.
지부장이라고 주장한 중년 남자는 곽용신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곽용신도 이 남자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선배님, 여기는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 빨리 차량을 빼야 합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이목을 끌게 됩니다.”
처음 손을 흔들었던 젊은 남자가 곽용신에게 말했다. 선배님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도 요원인 것 같았다.
곽용신은 D 상태로 놓여 있던 기어를 P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하지만 바로 내리지는 않았다.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전화를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몸을 굽혀 휴대전화를 집어 든 곽용신은 다시 밖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지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는 그대로 놓아 주십시오.”
젊은 남자가 말했다.
곽용신은 순순히 시동을 걸어 놓은 채로 차량에서 내렸다.
곽용신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젊은 남자가 차량에 탑승했고, 바로 출발해 버렸다.
곽용신은 잠시 차량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지부장이라고 주장하는 중년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원팀을 만난다고 들었는데.”
곽용신이 말했다.
지부장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곽용신의 말이 짧다고 느꼈다.
지부장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봉투를 곽용신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이게.”
곽용신이 봉투를 열며 말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열어 봐.”
지부장이 곽용신을 제지했다.
그 말에 곽용신의 동작이 멈추었다.
곽용신은 동작을 멈추고,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지부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곽용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지부장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손을 움직여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여권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