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4)
곽용신은 홍성민이 가져온 토요타의 야리스를 타고 파타야와 방콕을 연결하는 7번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곽용신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일까? 김형원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모용진은 정말 경인이 맞을까? 왜 유만호가 전화를 한 것일까? 김훈은 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그런 생각들이 운전을 방해할 정도로 끊이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곽용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것 하나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난다고 답을 얻는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한국에 있었다. 태국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림을 감춘 장막을 걷어 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장막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혹시 또 찢어진 곳이 있는지, 찢어진 틈으로 그림의 다른 부분이 보이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지만, 곽용신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혼자였다면, 혼자서 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면 차라리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승섭과 홍성민, 이 두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곽용신의 시선에 촌부리 시(市)와 연결되는 나들목이 보였다.
곽용신은 시선을 움직여 내비게이션을 바라보았다. 목적지까지 63km, 46분 정도가 남아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곽용신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55분, 지금 속도로 계속 달려간다면 대략 8시 40분에서 9시 사이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보조석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보조석에 내려놓은 전화가 진동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휴대전화를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행했다.
지금 그에게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파타야에 있는 홍성민과 김승섭, 서울에 있는 김형원과 유만호,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르는 김훈 정도가 떠올랐다.
곽용신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잡았다. 그리고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아내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곽용신은 전화를 받아야 할지,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지금은 아내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아무 일 없다고, 괜찮다고, 금방 들어갈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거짓말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쩌면, 최악의 경우, 영원히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야 했다. 전화를 받아, 별일 없다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곽용신은 알고 있었다.
곽용신은 잠시 전화기를 들고 있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말했다.
“여보세요? 나 지금 운전 중인데…….”
-아빠아아아아아!
전화기 너머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딸이었다.
“여보세요? 봉순이?”
봉순이, 둘째 딸의 태명이 애칭이 되었다.
-아빠! 언제 와?
둘째 딸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머리로 흘러들어 왔다.
“응. 봉순아, 아빠 지금…… 운전하고 있거든?”
-아빠, 아빠 보고 싶어. 아빠 언제 와?
둘째 딸은 아빠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크게 소리쳤다.
언제나 그래 왔듯.
“……응. 금방 갈 거야. 아빠. 금방 갈게.”
곽용신이 말했다.
-아빠, 빨리 와. 아빠 보고 싶어!
원하는 대답을 들은 둘째 딸이 다시 크게 외쳤다.
“그래. 아빠도 봉순이 보고 싶어. 아빠 금방…….”
곽용신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전달될 것 같았다.
-응. 알았어. 엄마한테 아빠 금방 온다고 이야기할게. 아빠 빨리 와! 빨리 와야 해!
“……그래.”
곽용신은 겨우 말했다. 온 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고서 겨우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지만, 곽용신은 전화기를 얼굴에서 한동안 떼지 못했다.
전화기를 든 채로 한동안 계속 운전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곽용신은 전화기를 천천히 보조석에 내려놓았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손은 다시 천천히 움직여 곽용신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냈다.
***
마사지 숍에서 나온 홍성민은 빠른 걸음으로 소이 허니 골목을 빠져나왔다.
저녁이라고 해도, 여전히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거의 뛰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에 홍성민은 체온이 빠르게 올라갔다. 홍성민의 뇌는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감지했고, 체온을 낮추기 위해 에크린샘을 통해 땀을 배출했다. 마사지 숍을 나온 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홍성민의 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 버렸다.
그러나 홍성민은 전혀 덥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한기라는 형태로 홍성민을 감싸고 있었다.
소이 부아카오에 도착한 홍성민은 오토바이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다 다시 멈추었다.
오토바이 택시는 위험했다.
만약 홍성민이 파타야에서 누군가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을 노렸을 것이다.
홍성민은 다시 몸을 돌렸다.
비치로드와 세컨드 로드를 순환하는 썽태우를 타는 것이 가장 안전했고, 여행사로 가는 썽태우를 타기 위해서는 세컨드 로드로 가야 했다.
소이 부아카오에서 세컨드 로드까지는 대략 300~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홍성민은 발끝에 힘을 주면서 동시에 주머니에 든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 뒤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형님.
김승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야?”
홍성민이 물었다.
-지금? 호텔이죠. 이 양반 이상하네. 갑자기 왜 그래? 숨은 왜 그렇게 헐떡여요? 어디 좋은 데 갔습…….
“지금! 당장 문 잠가!”
홍성민이 거친 호흡을 뱉어 내며 외쳤다.
-……오케이.
홍성민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을 눈치챈 김승섭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이어 전화기에서 김승섭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문에 체인 안전 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갔습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내가 호텔로 갈 거야. 최대 예상 시간은 45분 후. 그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 문도 열지 말고. 여권만 챙겨. 꼭 폐기해야 할 서류 아니면 그냥 두고.”
홍성민이 빠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충이라도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 안 됩니까?
김승섭이 물었다.
“레드원(Red One).”
홍성민이 말했다.
최고 위험 경보를 의미하는 코드였다.
-레드원. 확인.
김승섭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로 움직이지 마. 알겠지?”
홍성민이 다시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신이 형에게는?
“내가 연락할게. 너는 일단 대기하고 있어.”
-확인.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가 끝나자 메스꺼움과 구역질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200~300m를 전력으로 질주하면서 전화까지 했기에,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홍성민은 올라오는 욕지기를 억지로 참아 내며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헛구역질을 참으며 곽용신의 전화번호를 찾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짧은 통화 연결음 다음에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객이 통화 중이어서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 후에는 통화료가…….
“이런 젠장!”
홍성민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자앙!”
홍성민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발끝에 힘을 주었다.
***
둘째 딸의 전화를 받은 곽용신은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두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빠 하며 달려올 두 딸을 품에 안고, 맨날 출장이냐고 잔소리부터 시작할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국정원이고, 음모고, 진실이고, 파타야에 남은 김승섭이나 홍성민을 전부 뒤로하고, 이대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곽용신은 숨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폐 안의 공기를 모두 뱉어 내듯,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곽용신의 격양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아가야지.”
곽용신이 작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김승섭과 홍성민을 남겨 두고 혼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곽용신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당장 차를 돌릴까? 차를 돌려 김승섭과 홍성민을 태우고 다시 공항으로 올까?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있었다.
그 둘을 태우고, 다시 공항으로 와, 항공권을 현장 구매 하면 서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바로 홍성민에게 전화할까? 김승섭을 태우고, 지금 바로 공항으로 오라고 할까?
곽용신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 당장 홍성민에게 전화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니야. 성급하게 행동하면 일을 그르친다. 움직여도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곽용신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확신을 얻을 수 있는지.
눈앞에 어둠처럼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 도와줬으면, 어느 길로 가라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해답을 줬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고, 김형원이 떠올랐다.
-어때요? 그 양반?
김승섭이 물었었다. 김형원이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을 했었다.
-그럭저럭. 믿을 만해.
곽용신은 그렇게 답했다. 그럭저럭 믿을 만하다고.
곽용신의 생각이 조금 더 뒤로 감겼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김승섭의 계획을 말해 주었을 때, 김형원의 대답이었다.
-너무 위험해.
김형원이 그렇게 말했다. 곽용신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일단 대기. 전화를 주지. 그때까지 움직이지 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도 말고.
김형원의 마지막 지시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형원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왜 김형원은 작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유만호가 전화를 걸었고, 김훈이 홍성민에게 전화를 건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린 것을 김형원이 알고 있을까?
알고 있을까? 알고 있는 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 모르는 것은 아닐까? 모르고 있기에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곽용신의 기억이 조금 더 뒤로 돌아갔다.
방글라데시, 탄치의 유일한 호텔 식당에서 어설픈 아침밥을 먹던 그 순간에 김형원의 전화를, 그의 첫 전화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말했다.
-상황이 변했을 때, 남자만 확보할 것.
김형원은 데이빗 박을, 한규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랬다.
김형원은 한규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젠장.”
곽용신은 그렇게 소리치며 손을 뻗어 조수석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형원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 뒤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통화 중임을 알리는 안내 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