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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80화 (280/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2)

곽용신은 차분한 눈으로 김승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성민이 말 들어 보고.”

김승섭은 잠시 동안 곽용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승섭의 끄덕임을 본 곽용신이 홍성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이야기해 봐. 그래서? 소문을 냈어?”

“내기는 뭘 냅니까. 그랬으면 형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홍성민이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곽용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 안 냈습니까?”

김승섭이 홍성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눈에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이 자식은 반말했다가 존댓말 했다가. 계속 반말해, 임마.”

홍성민이 말했다.

“소문냈어? 안 냈어?”

김승섭이 바로 짧게 말했다.

“이 자식이, 진짜.”

홍성민이 김승섭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승섭의 눈에 의문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 미안하다고요. 그런데, 진짜 소문 안 냈어요?”

“그래, 임마.”

“김훈이 시킨 건데? 원장 명령인데?”

“에휴, 차라리 옷 벗고 말지. 두 사람 모르게 그 짓을 하라고? 너 같으면 하겠냐?”

홍성민이 말했다.

“안 하죠.”

김승섭이 말했다.

“안 할까?”

곽용신이 김승섭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우리 승삽이 승진시켜 준다 그러면 하고도 남지 않을까요? 승진해서 커피도 타 오라고 하고, 구두도 닦으라고 하고, 똥꼬도 핥으라고 하고 싶을 텐데.”

홍성민이 말했다.

“이 양반들 왜 이래. 사람을 뭐로 보고.”

김승섭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로 보긴. 김승섭이지.”

“홍가 형님, 말 섭섭하게 하네. 나 못 믿어요?”

“못 믿은 건 너 아냐? 조금 전 쌍심지 켜면서 반말했던 거 기억 안 나?”

“그건 무조건 반사지. 당연히 홍가 형님 믿었지만, 뭐 그런 이야기 들으면 눈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근데 왜 이제야 이야기한 겁니까? 바로 말 안 해 주고?”

김승섭의 말에 홍성민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참 나도 뭐랄까. 뭐, 이건 욕먹어도 할 말 없다. 순간적으로 고민하게 되더라. 생각이 복잡해지고. 뭐, 옷 벗는 거야 벗는다고 쳐도, 까놓고 원장 지시인데. 좀 후달리기도 하고…….”

“이해한다.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지.”

곽용신이 홍성민에게 말했다. 김승섭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 아무튼, 그랬어요.”

홍성민이 곽용신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흠,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럼 차는 뭐야? 준비하라고 누가 지시한 거야? 이것도 원장이?”

“아니요. 방콕에서. 지부장이 어젯밤에 전화했어요. 차 보낼 테니까 형님에게 전달해 주라고.”

“어젯밤? 몇 시?”

“9시쯤.”

“……9시라. 그럼 유만호 전화가 먼저네.”

곽용신이 말했다.

“유만호? 유만호가 전화했어요?”

유만호라는 이름을 들은 홍성민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요? 유만호?”

김승섭이 홍성민에게 물었다.

“방콕 지부장이 유만호 라인이에요. 유만호는 김훈 라인이고. 지금…… 무슨 협회에 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홍성민이 곽용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협회?”

곽용신이 물었다.

“뭐, 방콕지부장이 말하길 윗사람들 정치 싸움판에서 살짝 몸 빼려고 그리로 갔다고 하던데. 뭐 모르지. 실제로는 밀려났는데 자기 라인이라고 좋게 말한 건지도. 아무튼, 확실한 것은…….”

거기까지 말한 홍성민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그 얼굴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이런 씨발.”

잠시 생각하던 홍성민이 욕설을 짧게 내뱉었다.

김승섭은 불안한 눈으로 홍성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씨발’이 불길하게 들렸다.

“뭐야, 왜 그래요. 갑자기 불안하게.”

“유만호는 협회에 나가 있다 이 말이죠. 형님은 김형원에게 지시받고 여기 온 거고?”

곽용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데요?”

김승섭이 물었다.

“두 사람 다 국정원 소속이 아니야.”

홍성민이 말했다.

“네?”

김승섭이 물었다. 홍성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둘 다 밖에 나가 있다는 이야기야. 본부의 정식 지시가 아니라는 이야기야. 그리고 본부 사람은 김훈뿐이고.”

홍성민이 말했다.

곽용신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만. 정리 좀 해 보자.”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

곽용신은 마치, 찢어진 장막으로 가려진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장막 뒤에 그림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했지만, 어떤 그림인지는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저, 찢어진 틈 사이로 그림 일부분이 보일 뿐이었다.

모용진, 김형원, 유만호, 그리고 김훈.

곽용신이 국정원에 입사하고 몇 년 동안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높은 사람들이 이번 사안과 관계되어 있었다.

곽용신을 이곳으로 보낸 사람은 김형원이였다. 모용진을 찾으라는 지시였다.

모용진. 전직 해외정보실장. 전직 국정원 1급. 차기 국정원장 후보 중 하나였고, 지금은 경인으로 추적당하는 인물. 경인이라고 했다. 경인. 일본과 관련된 배신. 진짜로 모용진은 배신했을까?

유만호. 김형원과 마찬가지로 데이빗 박, 한규호 과장을 구출하는 방글라데시 작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 그런데 김훈 라인? 지원팀을 만나러 가라?

김훈. 소문을 내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알지 못하게? 유일한 본사 인물이자, 국정원의 최고 결정권자가?

곽용신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김형원, 모용진, 유만호, 김훈, 경인, 국정원 1급, 배신, 방글라데시, 데이빗 박, 탄치, 지원팀을 만나라. 김형원은 이번 작전에서 배제되었다. 알겠나? 만나면 알겠군. 소문을 내라고 하더군요. 두 사람 모르게.

이름과 얼굴, 말과 단어들이 마구 뒤섞이면서 기형적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기형적으로 뭉친 생각들은 서로 만나고 분리되면서 단어 하나를 만들었다.

함정.

그 단어가 곽용신의 머리에 떠올랐다.

곽용신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곽용신은 막힌 호흡을 뚫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홍성민과 김승섭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곽용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숨을 뱉어 낸 곽용신이 입을 열었다.

“꼬리 자르기.”

곽용신이 말했다.

“꼬리 자르기?”

김승섭이 말했다.

홍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원, 그리고 유만호. 그 유만호가 진짜로 외부에 나가 있는 유만호라고 한다면, 이번 작전에서 본사 인물은 김훈뿐이야.”

곽용신이 말했다.

“그런데요?”

김승섭이 물었다.

“김훈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고, 직접 지시를 내렸어. 그 사실을 본부 내 다른 직원들이, 김훈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홍성민이 말했다.

“아니. 모르겠지. 이번 작전을 김훈이 직접 통제한다면 그 자체로 기밀이 될 테니까. 김훈, 그리고 외부에 나가 있는 유만호와 김형원만이 이번 작전에 관계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야. 나는 태청무역 소속이고, 너는 아직 인도 소속이고, 우리 중에 본부 소속은 성민이 하나뿐이야.”

곽용신이 말했다.

“그런데 성민이 형도 여기 나와 있고, 방콕 지부장은 유만호 라인이고. 여기서 누가 죽어도 본사에서는 책임지지 않고. 이런 씨발.”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한 김승섭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직 몰라. 꼬리 자르기인지, 지금 이 상황이 함정인지. 그리고 지금 당장에는 알 수도 없어.”

곽용신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김승섭이 물었다.

“이대로 생각하지 않는 장기판의 장기 말처럼 움직일 수는 없어. 너무 위험해.”

곽용신이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최선은…… 당장, 여기서 철수하는 거야. 홍성민 너도 포함해서.”

곽용신이 말했다.

곽용신의 말에 김승섭과 홍성민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시 없이 현장에서 이탈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항명(抗命)이었다.

국정원은 군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군대에서 상관이 명령을 내리면 부하는 그 명령을 따라야 했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때 벌을 받아야 했다. 최고 사형에까지 이르는 벌이었다.

군형법처럼 항명했을 때 처벌한다는 법 규정이 국정원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시 없이 현장을 이탈했을 경우 단순히 옷을 벗는 것만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세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항명도 아니고 국가정보원 원장 김훈에 대한 항명이었다.

“목숨은 건지겠군요.”

홍성민이 말했다.

“그래.”

곽용신이 말했다.

“그 방법이 최선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김승섭이 물었다.

곽용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종이컵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곽용신이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3분의 1 정도 남아 있는 커피를 마셨다.

“생각하는 장기 말이 되는 거지.”

곽용신이 손에 든 종이컵을 꽉 쥐면서 말했다.

홍성민이 곽용신의 말을 받았다.

“지시에 따른다. 정확히 말하면 지시에 따르는 척을 하면서 상황을 파악한다. 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런 지시가 내려왔는지를 알아본다.”

곽용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운 좋게 잘 풀리면 감옥 가는 것으로 끝날 수 있겠네요. 젠장, 배신자 잡으러 왔다가 배신자 되어 버렸네.”

김승섭이 투덜거렸다.

홍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겁니까?”

김승섭이 곽용신에게 물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대로 지시에 따른다. 최대한 빨리 현장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시에 따르는 척을 하면서 상황을 파악한다.

김승섭은 곽용신에게 지시를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셋 중 어떠한 방법을 채택할 것인지를.

“일단 너는 호텔로 돌아가.”

곽용신이 김승섭에게 말했다.

김승섭은 곽용신의 말과 눈빛에서 곽용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돌아가서, 짐 싸라고?”

곽용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여기 남고?”

곽용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너도, 준비해.”

곽용신이 홍성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곽용신의 말을 들은 홍성민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곽용신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셋 다 이곳에서 몸을 빼낸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곽용신이 남는다면? 이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곽용신이 두 사람에게 몸을 빼내라고 지시하고, 그가 남아서 장기 말 역할을 한다면?

김승섭과 홍성민은 면죄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곽용신은 혼자서 그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답답한 양반 같으니.

홍성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곽용신이 승진하지 못하고 외부로만 떠도는 이유는 그가 국정원 요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가를 받은 이유는 곽용신이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념에 따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요원다운 사람이기에, 요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바로 그의 사수였던 곽용신이였다.

홍성민은 김승섭을 돌아보았다.

김승섭은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곽용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승섭.”

홍성민이 그를 불렀다.

김승섭의 시선이 홍성민을 향했다.

“까놓고 물어보자.”

홍성민이 물었다.

“……성민이 형, 지금 그 말. 실수한 거야.”

“아니. 까놓고 물어보는 거야. 니 말대로 잘 끝나야 감옥이야.”

“그래서.”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어.”

“그래서. 감옥 간다고, 여차하면 죽는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나 혼자 한국 가라고? 지금 장난해? 지금 두 사람만 남고, 나는 한국 가겠냐고 묻는 거야?”

김승섭이 소리쳤다.

“김승섭!”

곽용신이 김승섭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해. 진짜 형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다 패 버리기 전에 그만해. 나 지금 진짜 열받았으니까.”

김승섭이 곽용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곽용신도 분노의 찬 김승섭의 눈을 보았다.

“형님, 이 자식 말 안 들어요. 알잖아요.”

홍성민이 말했다.

곽용신은 홍성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합시다.”

홍성민이 말했다.

“일단. 일단 지시를 듣는 척은 해야 하니까. 형님은 공항 갔다 와요. 가서 지원팀인지 뭔지 좀 만나 보고, 그 자식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봐요. 그리고 승섭이 너는 일단 호텔에 짱 박혀 있어. 형님 공항 갔다 올 때까지.”

“홍성민.”

곽용신이 홍성민을 불렀다.

“형님, 집에 갈 거예요? 갈 겁니까? 간다면 나도 가고. 승섭이도 가고. 안 가면 우리도 안 가고. 알면서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맙시다.”

홍성민이 곽용신에게 말했다.

“씨발, 나는 형들이 간다고 해도 안 가.”

김승섭이 말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곽용신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이 미친놈들아…….”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용신이 형은 공항 가고, 난 짱 박혀 있다 치고, 형님은 뭐 할 건데요?”

김승섭이 홍성민에게 물었다.

“나는 밖에 나가 봐야지.”

“나가서 뭐 하려고요?”

“원장님께서 소문내라고 했으니 소문내야지.”

“무슨 소문? 우리가 모용진 찾는다고?”

“바보냐? 배신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배신해야지. 밀항 루트로 수상한 놈들이 파타야에 기어들어 왔다고 말해 봐야겠다. 대충 테러 같다는 냄새만 흘리면 시끄러워지겠지.”

홍성민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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