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79화 (279/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1)

유만호의 전화를 받은 다음 날, 홍성민이 유만호의 말처럼 호텔로 찾아왔다. 오후 4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호텔 로비로 내려간 곽용신에게 홍성민은 주차장에 서 있는 토요타 야리스(yaris)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저 차 타고 가면 됩니다.”

“니 차야?”

곽용신이 물었다.

“회사 차예요. 방콕에서 보내온 거니까 사고 안 나게 조심해요.”

홍성민이 말했다.

“사고 같은 소리 한다. 내가 너 유모차 탈 때부터 운전했어. 임마.”

곽용신이 말했다.

“참 나, 형님이나 나나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우측 핸들 운전해 봤어요?”

홍성민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곽용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나 인도에서도 운전해 본 사람이야.”

“인도에서는 사고 나도 그냥 가잖아.”

홍성민이 말했다.

옆에서 김승섭이 거들었다.

“그렇지. 사람 안 죽고 차 움직이면 그냥 가지.”

곽용신이 말했다.

“시끄러워, 임마. 그런데 보험은 들었지?”

“방콕지사 차량인데 보험이야 들어 놨겠지. 그래도 사고 나면 안 돼요. 보험 들었다고 한국이랑 똑같다고 안심하면 안 되니까.”

“어떻게 다른데요?”

옆에서 듣던 김승섭이 물었다.

“외국인이잖아. 과실비율 깔고 간다고 생각해야지. 피해자와 가해자 바꿔치기 안 당하면 다행이지.”

홍성민이 나쁜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뭐, 사고 나면 우리 홍성민 요원이 알아서 하겠지. 그럴 때 쓰라고 예비비 있는 거니까.”

곽용신이 홍성민에게 말했다.

“다 썼다고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는겨.”

홍성민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나 몇 시까지 오라는 이야기 못 들었는데, 지금 출발해야 하나?”

“못 들었어요? 난 9시까지라고 들었는데.”

“9시? 밤?”

“네, 21시. 시간 맞춰서 준비하라고 지시받았지. 여유 있게 두 시간 전에 출발하면 될 겁니다. 19시 정도에.”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승섭이 물었다.

“7시 출발이라 해도 세 시간이나 남았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수?”

“아니. 뭐 밥이나 먹자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할 이야기도 있고. 뭐 겸사겸사. 점심은 몇 시에 먹었어요?”

홍성민이 물었다.

“뭐 아점으로 대충 먹었지. 그래. 밥이나 먹자.”

곽용신이 말했다.

“맛있는 것 좀 먹으러 갑시다. 진짜 이제 편의점 도시락, 샌드위치 지겨워 죽겠소.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토 나올 것 같아.”

김승섭이 말했다.

“우리 승삽이는 태국에서 일 몬하겄네.”

홍성민이 말했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태국 아니라 한국에서도 편의점 음식만 먹고 살라면 못 산다 아닙니까. 내가 뭐 고시원 사는 취준생도 아니고.”

“알았다, 알았어. 뭐 먹고 싶은데?”

“짬뽕.”

김승섭이 말했다.

“짬뽕?”

“여기 한국식 중국집 있다 안 했습니까? 얼큰하게 짬뽕 국물 한 사발 들이키러 갑시다.”

김승섭이 말했다.

“형님은 짬뽕 괜찮아요?”

홍성민이 곽용신에게 물었다.

“잘해?”

곽용신이 물었다.

“뭐, 나름. 먹을 만해요.”

홍성민이 말했다.

“그래. 나도 얼큰한 거 먹고 싶네.”

곽용신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거 타고 갑시다.”

홍성민이 방콕에서 보내온 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

비치로드와 세컨드로드가 만나는 돌고래 상에서 남쪽으로 50여 미터를 걸어 내려가면 현지인들이 파타야의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다.

코리아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대여섯 개의 한국식 식당과 한국식 미용실, 그리고 한국식 당구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왕래 객들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파타야를 찾는 관광객이나 파타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파타야 코리아타운의 유일한 한국식 중식당 동원각도 한국인에게 유명한 명소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중식을 배웠다는 태국인 주방장이 한국식 중국식당과 거의 비슷한 짜장소스와 짬뽕 국물 맛을 만들어 냈다. 특히 근처 나끌루아 수산시장에서 공수한 신선한 해산물로 국물을 우려낸 짬뽕이 호평이었다.

김승섭은 숟가락을 들어 호평 받는 짬뽕 국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얼큰한 짬뽕 국물이 혀를 자극했고, 이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갔다.

“크으. 죽이네, 이거.”

김승섭이 홍성민을 보면서 말했다.

“오버하긴. 뭐, 나름 먹을 만은 하지.”

홍성민이 말했다.

“이 정도면 나름 먹을 만한 게 아닌데. 끝내주는구먼.”

김승섭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마셨다.

“진짜 국물이 괜찮네. 한국보다 좀 더 얼큰한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짬뽕을 시킨 곽용신도 괜찮다는 평가를 했다.

“너무 오랜만에 한식을 먹어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거지.”

홍성민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국물을 떠먹었다. 얼큰한 국물이 오랜만이라는 상황을 고려해도 나쁘지 않은 국물이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했다.

“소주 한잔할까요? 용신이 형은 운전해야 하니까 안 되고. 우리끼리 한 잔 딱?”

짬뽕을 반 정도 먹은 김승섭이 홍성민에게 물었다.

“야, 놀러 왔냐? 우리가 여기 놀러 왔어?”

곽용신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김승섭을 보며 말했다.

“뭐, 까놓고 놀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일하겠다고 하는데, 하지도 못하게 하고. 호텔에만 처박혀 있고.”

김승섭이 말했다.

“이제 일 시작한다고, 임마.”

곽용신이 말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한잔 적시자 이거죠. 노가다 아저씨들도 밥 먹을 때 반주로 소주 한 글라스씩 때리고 일 시작하잖아.”

“무슨 쌍팔년도 이야기를 하고 있네. 야, 임마. 요즘은 건설현장에서 음주측정 하는 거 몰라?”

홍성민이 말했다.

“참 나. 세상이 이리 각박해서야. 소주 한 잔도 허용하지 않는 이놈의 세상. 정 없구나. 정 없어.”

김승섭은 반쯤 포기한 듯 그렇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소주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메뉴판을 열어 소주 가격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소주가…… 250 바트네. 얼마야 이게?”

“만 원.”

홍성민이 말했다.

“만 원?”

“그래. 요즘 바트화 미쳐 날뛰어서 250바트면 만 원 조금 넘네.”

“뭐야, 소주가 한 병에 만 원? 미쳤네. 내가 아무리 미쳐도 소주 한 병을 만 원 주고 사 먹을 수는 없지!”

김승섭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이 자식아. 좀 조용히 좀 말해. 임마.”

홍성민이 식당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카운터의 식당 사장은 기분 나쁜 시선으로 김승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렇잖아. 소주 한 병에 만 원이라니. 양주도 아니고. 아니, 어떤 의미로는 양주인가? 물 건너왔으니, 아니. 아무리 물 건너왔다고 해도…….”

“닥치라고, 임마.”

곽용신도 가세했다.

김승섭은 투덜거리며 메뉴판을 덮었다.

“그나저나 뭔데.”

곽용신이 홍성민에게 물었다.

“네? 뭐가요?”

“할 말 있다며?”

홍성민의 젓가락질이 멈추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곽용신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식당 사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밖에서 이야기할까?”

홍성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 가서 커피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합시다.”

홍성민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승섭은 재빨리 남아 있던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

홍성민이 가져온 차를 타고 그들이 홍성민의 일터인 ‘한인 전문 오라오라 여행사’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여행사를 지키고 있던 태국 직원은 홍성민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후 손님을 모셔오겠다며 여행사를 나갔다.

홍성민은 직접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담아 소파에 앉아 있는 곽용신과 김승섭에게 건네주었다.

“원두 없습니까? 에스프레소 머신 없어요?”

김승섭이 종이컵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처먹지도 않으면서 에스프레소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홍성민도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말했다.

“짬뽕 다음에는 에스프레소지. 센스 없기는.”

김승섭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할 말이라는 게 뭐야.”

곽용신도 커피를 홀짝거리며 홍성민에게 물었다.

“통나무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홍성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통나무집,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통나무집? 언제?”

곽용신이 물었다.

“형님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그다음 날 아침. 집주인이 전화했어요.”

“집주인?”

종이컵을 홀짝이던 김승섭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통나무집의 집주인. 김훈 원장이었다.

“뭐라던데?”

곽용신이 물었다.

“소문을 내라더군요.”

홍성민이 말했다.

“무슨 소문요?”

김승섭이 물었다.

“모용진을 찾는다는 소문.”

홍성민이 말했다.

***

-원장이네.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말했다.

이런 씨이발.

홍성민이 속으로 외쳤다.

국정원에서 전화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껏해야 해외정보실에서 전화를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장의 전화를 받을 줄이야.

모용진, 전직 1급이 관련된 사안이니까, 김훈 원장이 관심을 가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개 요원인 자신에게 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온다?

정식 명령 체계와도 맞지 않았고,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장 라인을 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진과 사내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홍성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뭔가 꼬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홍성민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흔적은 찾았나?

김훈 원장이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홍성민이 답했다.

-설명해 봐.

김훈 원장이 말했다.

홍성민은 지금까지 상황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곽용신과 김승섭이 찾아왔고, 그들을 도와 모용진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수확은 없었다.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김승섭이 고안한 계획, 미끼를 내걸어 모용진을 보호하고 있을지 모르는 조직을 끌어내는 계획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해도 당사자인 곽용신이나 김승섭이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김승섭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김훈 원장이 물었다.

이미 보고했군.

홍성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홍성민이 말했다.

-왜 이야기 안 했지?

김훈 원장이 물었다.

젠장. 승진은 물 건너갔군.

홍성민은 다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보고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계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훈 원장이 물었다.

의도가 뭘까?

그런 생각이 홍성민의 머리를 스쳤다.

원장이 원하는 대답이 있을 것이다. 원장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대답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대답을 찾기 위해 생각할 시간도 부족했고, 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원 없이 진행하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홍성민은 솔직하게 말했다.

젠장, 이미 찍혀 버린 거. 모르겠다.

홍성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곽용신은?

“숙소에 있습니다.”

-김승섭도?

“그렇습니다.”

-그렇군. 지금부터 내 지시만 받는다. 보고도 나에게만 한다. 이해했나?

김훈 원장이 말했다.

꼬였다.

홍성민이 속으로 외쳤다.

그에게 지시를 받으라는 김훈 원장의 말에서 어쩐지 굉장히 일이 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을 내. 두 사람이 모용진을 찾고 있다고. 단, 곽용신과 김승섭은 모르게. 알겠나?

김훈 원장이 말했다.

홍성민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

“원장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소문을 내라고?”

홍성민의 이야기에 김승섭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목소리에 격양된 감정이 실려 있었다.

홍성민은 김승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홍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고? 원장이?”

김승섭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눈빛에 담긴 분노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 두 사람 모르게 소문을 내라고 하더라.”

홍성민이 말했다.

김승섭은 손에 들려 있던 종이컵이 찌부러졌다.

그 손가락 사이로 커피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게 소문을 냈어? 김훈이 시킨 대로 우리는 모르게 낚싯대를 드리웠어? 미끼로 우리를 걸어서?”

김승섭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달려들기 직전 맹수의 으르렁거림처럼.

홍성민은 김승섭의 분노를 이해했다.

김훈의 지시와 김승섭의 계획은 결과적으로는 동일했다. 모용진을 찾는다는 소문을 내고 두 사람이 미끼가 되는 것은 같았다.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이 스스로를 미끼라고 인지하는 상황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끼로 낚싯대에 걸리는 상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김승섭은 거기에 분노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홍성민의 멱살을 틀어잡을 것 같은 김승섭을 만류한 것은 곽용신이였다.

“잠깐만, 김승섭. 잠깐만 기다려 봐.”

김승섭이 곽용신을 돌아보았다.

“성민이 이야기 끝까지 들어 보자.”

곽용신이 김승섭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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