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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78화 (278/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30)

대한장비협회 상근부회장 사무실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건방진 새끼.”

전화를 끊은 유만호가 결국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이해했습니다.

곽용신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이 유만호의 분노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유만호는 일부러 김형원에게 따로 연락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확인을 위해서 알겠냐고 물었다,

-이해했습니다.

유만호의 질문에 대한 곽용신의 답이었다.

이해했다고 말했다. 알겠냐는 질문에 이해했다고 답했다.

‘이해했다’라는 말은 ‘알겠다’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어떤 의미인지 의미는 파악했다. 의미는 파악했지만 따른다는 보장은 없다.

곽용신의 ‘이해했다’에는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차라리 싫다고 했으면 유만호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곽용신의 말 안에 담겨 있는 건방짐이 유만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유만호는 지금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곽용신이 눈앞에 있다면, 아니, 서울에만 있었어도 당장 불러들여 정강이뼈를 걷어찼을 것이다.

곽용신은 국정원 3급에 불과했고, 유만호는 3급의 정강이뼈를 걷어찰 정도의 권한은 있었다.

“건방진 새끼.”

유만호는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무실 한쪽에 놓여 있는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이켰다.

뚜껑을 따고 물을 마시자 차가운 냉수가 식도를 타고 흘렀고, 냉기가 목을 통해 천천히 퍼져 나갔다.

물을 마신 유만호는 냉기를 머금은 생수병을 이마로 가져가 문지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당장 곽용신의 정강이뼈를 걷어찰 수 없는 상황에서 분노는 그 자신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차가운 물 한 모금, 이마에서 퍼지는 냉기, 그리고 깊은 심호흡 덕분에 유만호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사실 유만호도 알고 있었다. 곽용신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정강이뼈를 걷어찰 수 없다는 것을.

곽용신은 3급이지만 그냥 3급이 아니었다.

정보위원회 다음 기수의 첫 번째 멤버로 확정되었고, 차기 정보위원회 위원장, 차차기 국가정보원장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확률로.

물론 정해진 미래는 아니었다. 미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미래를 유만호가 바꿀 수 없었다.

그 미래를 바꾸는 권한은 이제 청와대에 있었다.

곽용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곽용신이 무너지게 되면 그 책임을 김훈과 유만호가 져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누그러들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만호는 다시 입으로 물병을 가져갔다.

유만호는 물을 마시며, 며칠 전 김훈 원장이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곽용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김훈 원장이 그렇게 물었었다.

곽용신이 유만호나 김훈 원장처럼 장기 말을 옮기는 자리에 올랐을 때, 그들처럼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유만호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유만호도, 그리고 김훈 원장도 곽용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던 시기가 있었다.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던 시기가 있었다. 만약 유만호가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리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계획을 수립하고 요원들을 움직여 조국과 조직을 수호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맞았다.

지금의 자리가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곽용신도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통화를 마친 후, 유만호는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보통 통용되는 공식이지만 가끔씩 통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형원이 그랬다.

곽용신이 김형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곽용신이 김형원 밑에서 일한 시간은 2년이 넘지 않았다. 막 입사해 김형원에게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보여 주는 곽용신의 모습이 곽용신의 본성이다.

유만호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물병을 들이켰다.

“일단 돌아와라. 뜯어 고쳐 주지.”

유만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

김승섭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곽용신의 얼굴을 보았다.

곽용신은 평소에도 약간 뚱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표정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만호?”

김승섭이 물었다.

“그래. 안다고?”

곽용신이 물었다.

“그때. 방글라데시. 기억 안 납니까?”

김승섭이 말했다.

방글라데시라는 단어를 들은 곽용신은 잠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김승섭에게 그 이름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방글라데시 시골의 하안(河岸)마을 탄치로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한규호를 구출하러 갔을 당시, 곽용신은 김형원의 전화를 받았다.

구출 대상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남자만 구출해 오라는 지시였다.

같은 시간이 김승섭에게 전화한 사람이 유만호였다.

구출 대상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상황의 여의치 않을 때, 여자만 구출해 오라는 지시를 했었다.

“기억났다. 그때 엮었었군.”

곽용신이 말했다.

“뭐랍니까? 그 양반이?”

김승섭이 물었다.

“내일 공항에 가서 지원팀을 만나라는군.”

“공항? 수완나품?”

곽용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팀이라. 지원팀이 필요한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김승섭이 중얼거렸다.

곽용신도 같은 생각이었다.

김승섭이 고안한 계획의 핵심은 두 사람을 미끼로 내거는 것이다.

만약 그 둘을 지키겠다고 지원팀이라는 이름으로 수상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알짱거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미끼를 끼워 낚싯대를 드리운 다음, 주변에 돌을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양반도 알고 있는 건가?”

김승섭이 물었다.

“그 양반?”

“삼도천 건너간 그 양반. 김형원.”

김승섭의 질문에 곽용신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연락하지 말라더군. 이번 작전에서 배제되었다고.”

“그래서?”

“이해했다고 했지.”

곽용신이 말했다.

“그 양반 열받았겠군요.”

김승섭이 웃으며 말했다.

“뭐 열받든 말든.”

곽용신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연락 안 해 볼 겁니까?”

김승섭이 다시 물었다.

“어쩔까 고민 중.”

곽용신이 답했다.

김승섭은 곽용신의 얼굴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곽용신은 김형원을 걱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작전에서 빠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신상에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전화를 주저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전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화했을 때, 발생할지도 모르는 피해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때요? 그 양반?”

곽용신을 바라보던 김승섭이 물었다.

“누구?”

“김형원.”

김승섭의 질문에 곽용신은 김형원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너무 위험해.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홍성민처럼 말했었다.

“……뭐, 그럭저럭.”

곽용신이 말했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믿을 만해.”

곽용신이 답했다.

답을 들은 김승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뭐. 그 양반 못 봤으니까.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형님이 믿을 만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겠지.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 그 양반에게 전화해 봤자 지시받을 것 같지도 않고, 괜히 일만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유만호 이야기 듣는 척하다가, 상황 봐서 전화하는 거지.”

“어떻게?”

“뭐, 음. 예를 들어서, 지원팀 만났는데, 지원팀에서 개같이 나온다. 뭐 지들이 통제하겠다 이러면 열받잖아요? 그때, 유만호에게 전화를 거는 거지. 1초만.”

“1초?”

“그냥 걸었다는 기록만 남기자 이거지. 나는 전화했어. 니가 안 받은 거야. 현장 판단에 따라 김형원에게 전화한 거야. 이렇게. 변명하기 좋잖아. 공무원이 전화 안 받으면 직무유기잖아. 니 잘못이다. 이렇게. 지가 전화 안 받았는데 뭐라고 할껴. 김형원 그 양반에게 전화해서 이르는 거지. 유만호가 지한테 지시받으라고 해 놓고 전화 안 받아요. 그렇게.”

곽용신은 말없이 김승섭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감탄했어요?”

김승섭이 웃으며 말했다.

“어.”

곽용신이 평소답지 않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 양반이 나 똑똑한 거 몰랐나 보네. 나 서울대 나왔잖아요. 뭘 또 새삼스럽게.”

김승섭이 어깨를 펴며 거만하게 말했다.

“문정규도 서울대 나왔지.”

곽용신이 얼마 전 낚시에 걸려 물먹은 국정원 입사 동기의 이름을 말했다.

“에이, 그 인간 이름이 왜 나와. 그 인간은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한 거고, 난 똑똑한 거고. 레베루가 달라요. 레베루가.”

김승섭이 학교 선배이자 국정원 선배를 헐뜯으며 말했다.

그 말에 곽용신은 씩 하고 웃었다.

“그나저나 둘 다 가랍니까? 공항에?”

김승섭이 물었다.

“아니. 나만. 너는 여기 있고.”

곽용신이 말했다.

“뭐 타고?”

“내일 홍성민이 차 가지고 온다대.”

“홍가 형이 움직인다라. 뭐 내곡동 지시가 맞기는 맞나 보네. 도대체 뭔 생각인지. 뭐 아무튼 내일 공항 가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김승섭의 말에 곽용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혼자 공항에 가라고 했단 말이지? 이로써 확정되었군.”

갑자기 김승섭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뭐가?”

곽용신이 물었다.

“나는 형님 믿고 있었어요.”

김승섭이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뭔 헛소리야?”

곽용신이 물었다.

“형님이 보고할 때, 내가 생각한 계획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말이죠. 우리 용신이 형은 후배의 공적을 가로채는 그런 얍삽한 인간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죠.”

김승섭이 말했다.

“확정이라는 건 뭔 말인데?”

곽용신이 물었다.

“참 나. 이 양반 답답하네. 내 승진이 확정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린데.”

“원래 심부름은 쫄따구들이 하는 거 아닙니까. 높은 양반들은 자리 지키고 있고. 공항으로 형님만 오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심부름은 곽용신이. 김승섭은 자리 지키고. 왜? 김승섭이 중요한 인물이니까. 본사에서 마음을 정한 거죠. 3급 승진. 3급! 김승섭 3급!”

곽용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승섭을 보고 있었다.

“추월당했다고 너무 섭섭하다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먼저 승진해도 한 번 형님은 평생 형님으로 모실 테니까. 아, 물론 일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내려야 되겠지.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뭐 어쩔 수 없이 욕도 하고 쪼인트도 좀 까고 하겠지만. 그거야 뭐 공적인 입장에서 하는 거니까 형님이 이해해야지. 안 그래요?”

곽용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더 빨리 승진시켜 줄게.”

눈을 뜬 곽용신이 이렇게 말하며 김승섭에게 다가갔다.

“이름 없는 별이 되면 바로 특진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김승섭 목에 초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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