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76화 (276/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8)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들은 한규호의 입가가 올라갔다.

의도한 미소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흥미롭군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한규호는 눈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와 지금 상황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열심히 이야기한 보람이 있군요.”

피터라는 남자도 미소를 지어 주며 답했다.

한규호는 그 미소를 보면서 앞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 피터라는 남자가 가져다준 500mL 페트병이었다.

페트병을 들어 올린 한규호는 뚜껑을 따고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입으로 페트병을 가져간 한규호는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페트병을 내려놓지 않고, 오른손에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피터의 귀에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군요.”

한규호가 페트병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한규호는 어설픈 부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눈앞에 이 남자가 정말 실력 있는 정보상이고, 한규호가 데이빗 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알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노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다.

만약 한규호가 행동을 잘못해서 그 이름이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이 정보상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라면, 차라리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 이 남자를 소개해 준 완이 이름을 흘렸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가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규호는 피터라는 이 남자가 어떻게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페트병을 집어 든 것이다.

“컵을 가져다드릴까요?”

피터라는 남자가 물었다.

“머그컵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종이컵입니다만.”

“그럼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규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본 피터라는 남자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500mL 페트병은 사실 꽤 괜찮은 무기죠. 명치 같은 급소를 정확히만 찍으면 상대방을 바로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피터라는 남자는 한규호에 손에 들린 페트병, 네슬레社에서 나온 퓨어라이트 500mL 페트병에 시선을 맞춘 채로 말했다.

“효율로만 따지면 명치보다는 안구가 더 좋죠. 무력화는 물론, 영구적 장애라는 부가 효과도 안겨 줄 수 있으니까. 이 녀석은 두께가 좀 아쉽군요. 환경 보전이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원가절감이 목적일 것이 뻔하죠. 하지만 뭐 이 정도 두께라도 상관없습니다. 안에 충분한 물이 들어 있다면.”

한규호가 피터라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농담을 하실 줄 아시네요.”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여대생들에게 먹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재미있다니 다행이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박물관연대를 아십니까?”

피터라는 남자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들어 보았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그 이름을 들어 보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군요. 1년 전?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그 박물관연대에서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를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몇몇 정보상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실도 아십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수엘라에서 엘 오로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

엘 오로(El Oro). 베네수엘라를 지배하는 삼두사(三頭蛇) 중 한 명이었으며, 카라카스 동부 상업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금융 마피아.

베네수엘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가 에비앙을 건네주며 말했었다.

-박물관연대(Museum Union)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홍콩을 중심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일종의 사설 정보 회사입니다. 아니, 정보 조직이라고 보는 게 좋겠네요. 얼마 전 그곳에서 흥미로운 제안을 보내왔습니다. 아, 저도 정보를 사고파는 일을 하니까요. 그쪽 제안은 태국·라오스·미얀마 접경지대인 트라이앵글에서 사고를 친, 한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국적은 한국, 이름은 데이빗 박.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는 무엇이든 사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몇몇 단골 고객들에게는, 저처럼 교류가 많고 믿을 수 있는 고객들에게는 얼굴 사진도 보내왔습니다.

***

당시 한규호는 일본계 미국인 3세 인류학자 스즈키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엘 오로는 그가 데이빗 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한규호는 데이빗 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니얼 양은. 아, 대니얼 양은 박물관연대를 이끄는 정보상입니다. 그 대니얼 양이 데이빗 박이라는 사람에게 매우 관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사진까지 뿌려 가면서 정보를 사들이려고 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죠.”

“그자가 당신에게도 사진을 보냈다는 말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저에게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사진을 입수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전부 저에게 들어오니까요.”

피터라는 남자가 한규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실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들어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이 처음 나온 장소는 트라이앵글 프라이멀 카지노였습니다. 그때 방콕이 조금 시끌시끌했습니다. NIA하고 태국투자청에서 두어 명의 목이 날아갔거든요. 그것도 상당히 고위급으로.”

“몰랐군요. 그렇게 인기인이 되어 있을 줄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너무 안일하게 행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용석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한규호의 이름과 얼굴을 노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출하고 폐기할 생각으로 데이빗 박의 얼굴을 사용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깊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었다.

개인적인 일이었고, 위장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국정원이나 다른 기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마침 트라이앵글 작전에 들어가면서 만들어진 데이빗 박이라는 신분과 데이빗 박의 얼굴로 찍어 놓은 사진이 있었다. 데이빗 박을 찾아 달라고 북한인 조직에 넘겨준 사진이 그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났고,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이 남자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설명될까요?”

피터라는 남자가 물었다.

“조금 부족하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어떤 부분이 부족한가요?”

“사진을 입수했다. 그래서 얼굴을 알았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사진만으로 얼굴을 기억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여자 나체사진도 아닌데, 매일 밤 사진을 보면서, ‘이 얼굴을 기억해야지’ 하지는 않았을 테고. 기껏해야 두어 번, 많아도 서너 번에 본 것에 불과할 것 같은데, 나를 보자마자 데이빗 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렵군요.”

한규호가 피터라는 남자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제가 남들보다 유달리 기억력이 좋아서 사진 속 얼굴을 기억했다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세한 동공의 축소도, 진동의 주기도 변하지 않았다. 남자의 호흡에도 변함이 없었다. 한규호는 그 눈동자에서 어떠한 거짓의 징후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규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한규호가 말했던 것처럼 상식선에서 말이 안 된다.

“그건 그렇겠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제 밥줄에 속한 영역이라 말씀드리기 좀 껄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만약 제가 말씀드리지 않으면 그 페트병을 계속 들고 계시겠죠?”

피터라는 남자가 다시 페트병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떨까요?”

한규호가 말했다.

“이거, 너무 내 패만 보여 드리는 것 같아서 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만. 뭐, 좋습니다. 밥줄보다 시력이 더 소중하니까요. 오늘 새벽 NIA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NIA가 직접 움직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테러나 왕궁, 타국의 정보기관 관련 사안이 아니면 그들이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끄렁떠이라면 테러나 타국 정보기관 관련 사안일 가능성이 있는데, 제가 알기로 방콕에는 그런 이슈는 없는 상황입니다. 정보를 다루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상황입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상황. 이해하십니까?”

피터라는 남자가 물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NIA에 심어 놓은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뭐랄까. NIA에 카드를 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기도 어렵지만 사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한 필살기 같은 것이라서요. 아무튼, 진짜 아껴 두고 아껴 둔 카드를 사용해서 두 개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나가 귀하의 이름이고, 하나는 크라쓰이(กระสือ)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라쓰이가 뭡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크라쓰이는 영어로 하면 Witch? 아니, Virgin Spirit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정확히는 좀 다른 관념이지만. NIA에서 가장 실력 있는 여성 요원의 별명입니다. 그녀가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러고 보니 귀하하고는 구면일 수도 있겠군요. 그녀도 프라이멀카지노에 잠입해 있었으니까요.”

한규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규호에게 괜찮은 패를 건네주던 돼지 아줌마.

그녀도 NIA의 요원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완이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라면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만했다.

한규호는 손에 든 페트병을 테이블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설명이 되었는지요?”

그 모습을 바라본 피터라는 남자가 물었다.

“그렇군요.”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는 믿을 수 있으실까요?”

“아니. 아직.”

피터라는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무엇을 말씀드릴까요?”

“왜 이 의뢰를 받아들였는지.”

한규호가 말했다.

피터라는 남자는 한규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고객이 원하시면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재미있군요. 그런 농담은 학생들에게 좀 먹히나요?”

한규호가 말했다.

“이 농담은 모르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미 패를 까 보였는데, 나머지도 다 보여 드리죠. 저는 차논과는 다릅니다. 아무 의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검증된 고객들에게만 도움을 드리는 편입니다. 몇 시간 전에 싱가포르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의뢰 전화였죠. 그저 일을 의뢰하고 싶다. 그리고 전화번호 하나. 그뿐이었는데 저는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움직임이 없던 식양 네트워크에서 온 연락이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죠.”

피터라는 남자는 한규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시선에는 지금까지 담겨 있던 약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남아 있는데, 눈빛에는 사라진 상태였다.

“왜 얼굴을 보여 주는 거지?”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식양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나왔던 장소가 바로 프라이멀 카지노. 식양, 프라이멀 카지노, NIA와 크라쓰이. 그리고 데이빗 박.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게도 당신 이름이 나오고 식양 쪽에서 전화가 왔으니까. 당신을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그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한규호는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피터라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눈에서 단 한 번도 거짓의 징후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군요. 이렇게 모든 패를 까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이제 궁금한 것이 모두 설명되었습니까?”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입가에, 눈빛에 다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하나 더.”

한규호가 말했다.

“못 말리겠군요. 말씀하시죠.”

“당신 이름.”

한규호가 물었다.

“길. 스펠링은 GIL입니다. 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의뢰비는?”

“이제야 물어보시는군요. 보통 그걸 제일 먼저 물어들 보시죠.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른 고객님보다 많이 받고 싶지만. 식양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그 대신으로 도와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한규호는 잠시 고민했다.

묻고 싶었다. 이 남자가 식양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정확히는 완이 식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만약 이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녀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 묻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한규호에게 중요한 것은 서용석이였다. 서용석을 찾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차논 같은 삼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했고, 한규호는 그 사실을 확인했다.

이 남자라면 서용석을 찾아줄 가능성이 있었다.

물어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 것인지. 한규호는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한규호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눈앞에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식양에 대해서 알고 있소?”

“이상한 질문이군요. 식양을 통해 저에게 연락 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제는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그의 눈에는 놀람과 의문이라는 감정이 떠 있었다.

한규호는 그 감정이 진짜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용석.”

한규호가 말했다.

“서용석?”

“전직 북한군인. 정확히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직할 535 특수작전대대 정찰대 특무상사. 방콕에 들어올 때 사용한 이름은 파울로 까밀로 스즈키(Paulo Camilo Suzuki). 일본계 브라질인. 산업폐기물 수입업자. 그 신분으로 방콕에 입국했소. 경로는 보고타, 산티아고, 시드니, 싱가포르. 그를 찾아 주시오.”

한규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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