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75화 (275/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7)

한규호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안내받은 응접실에는 푹신한 소파와 에스프레소 머신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학원의 역사와 얼마나 많은 학생이 이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는지 등이 태국어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전형적인 외국어 학원의 응접실처럼 보였다. 의심할 요소가 없었다.

의심할 요소가 없는 것은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규호를 응접실로 안내한 직원은 한규호를 신임 강사로 알고 있었고, 그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고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함정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고, 설사 함정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직원이 나가고 한규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채 피터라는 사람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피터라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규호가 응접실에 오고 이십여 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말끔하게 생긴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몇 시간 전 한규호가 전화로 들었던 시원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 육체노동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을 그런 부드러운 손이었다.

“일단 제 사무실로 가실까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한규호는 그를 따라가면서 그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신장은 180cm에서 185cm 사이. 키를 고려해도 평균보다 넓은 어깨, 타이트하지 않은 셔츠 너머로 단단함을 보여 주는 등이 한규호의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체형이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반면에 걸음걸이에서는 특별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보기관이나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그쪽 출신이라고 해도 전문적인 전투 요원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한규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걸음걸이에서 특징이 드러났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걸어가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관찰하던 한규호는 당황하지 않고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안 먹었습니다. 저녁 시간치고는 이른 편이군요.”

“인터뷰가 끝나면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여기 괜찮은 초밥집이 있습니다.”

남자가 갑작스럽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감사합니다만, 날 것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한규호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 초밥이 아니면 다른 것은 괜찮다는 말씀이시죠? 자, 여기입니다.”

피터라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한 사무실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들어오시죠.”

한규호는 남자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외국어 학원 강사라기보다 대학교수의 연구실 같았다. 사방이 온통 책이었고, 책상에는 온통 서류였다.

피터라는 남자는 한규호를 소파에 앉힌 후, 문을 잠그고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려 시선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한규호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자,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우선 지원 분야는 영어. 발음을 들어 보니 미국에서 공부하셨군요. 하지만 네이티브는 아니시고.”

한규호는 대답 없이 피터라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이티브는 아닙니다. 대학 학위도 없습니다.”

한규호의 말에 피터라는 남자가 씩 하고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학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요하긴 얼굴이 더 중요하죠. 요즘 학생들은 얼마나 잘 가르치냐보다 얼마나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뭐, 아주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는 얼굴이니 괜찮을 겁니다. 여대생을 대상으로 개설하는 클래스가 있습니다. 어떻게, 괜찮으시겠습니까?”

한규호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으로 무언의 압력을 주고 있었다.

“좋은 눈을 하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학생들을 그런 눈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학생들은 소중한 고객님이시니까요.”

피터라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고객이라고 생각되는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더는 의미 없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거야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중한 고객님이 되실지,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되실지, 아니면 우리와 한 가족이 되실지 말이죠.”

피터라는 남자가 한규호의 말과 눈빛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이런 대화가 계속되면 지나가는 손님이 될 것 같군요.”

한규호가 경고했다.

***

자신을 피터라고 소개한 남자, 한규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직업은 타운 외국어 학원 영어 강사였다. 실력이 있었고, 거기에 언변도 좋았다. 생긴 것도 말끔해서 그의 강의는 인기가 좋았다.

물론 그가 단순한 강사는 아니었다. 그는 강사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며 수업을 배치하는 강사팀장이었다. 사실 단순한 팀장도 아니었다. 그는 학원의 경영권을 가진 이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강사나, 강사실장이나, 학원의 이사로 한규호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상으로 한규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태국 최고의 정보상이였다. 의뢰 접수비만 300만 바트, 미화로 10만 달러가 필요한 태국 최고의 정보상이 바로 이 남자였다.

의뢰 접수비라는 것은 단순히 의뢰를 접수하는 데에만 들어가는 비용을 의미했다. 실제 의뢰비는 업계 관행에 따라 그 열 배에 달하는 금액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검증된 고객만을 상대했다. 소위 하이 소사이어티, 왕족, 군부와 정부 고위직, 재벌 등 태국의 부를 독점하면서 태국을 지배하는 카르텔과 수천만 달러에서 수억 달러의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몇몇 외국계 기업들만이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다.

피터라는 남자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앞에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보상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 받아 보는 눈빛이었다. 그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너를 어떻게 신뢰하지?

눈앞에 남자는 그런 눈빛으로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터라는 남자는 그 눈빛을 미소로 받으며 말했다.

“모르는 일이죠. 가족이 될 수도 있을지. 일단 알겠습니다. 사람을 찾으신다고요.”

피터라는 남자가 한발 물러났다.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을 찾아 드리면 됩니까?”

하지만 한규호는 서용석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이 남자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아무리 완의 소개라고 해도 확신 없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 한규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저는 점을 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태국인인지, 아니면 외국인인지, 나이는 몇인지. 이런 것들을 알려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알려 주면 찾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못 믿으시는군요.”

“그렇군요. 못 믿고 있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우리가 못 찾는다면 아무도 못 찾습니다.”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예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었죠.”

한규호가 말했다.

CIA의 밀러 국장이 같은 말을 했었다.

“차논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한규호는 처음으로 의미 있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차논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피터라는 이 남자가 정말로 정보상이라면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차논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차논의 이름을 꺼낸 것이 단순한 추측인지, 아니면 한규호가 차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규호가 대답하지 않자 피터라는 남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새벽, 끄렁떠이 빈민가에 NIA 요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끄렁떠이에는 탈북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을 급습했죠. 조직원과 촌장이 NIA에 체포되었고. 아, 촌장은 정말 촌장이 아니라, 끄렁떠이에서 활동하는 정보상의 이름입니다. 정보상이라고 해야 할지, 마피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소동이 있었죠. 오전에는 사뭇쁘라깐 읍이 시끌시끌했었죠. 어디인지 따로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끄렁떠이의 북한인 조직들이 그곳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가 NIA에 잡혀들어 갔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경찰이 아니라 NIA가 움직였을까?”

피터라는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한규호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한규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눈빛으로 피터라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열쇠는 차논이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가 끄렁떠이의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곳에서 북한인 조직을 소개받았고, 그 이후 NIA 본부를 찾아갔다가 울상이 된 얼굴로 다시 아지트로 복귀했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NIA 요원들에 의해 본부로 끌려갔고, 아직 나오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끄렁떠이와 사뭇쁘라깐의 소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게 되었죠. 그러면 여기서 또 질문 하나가 나옵니다. 차논은 왜 촌장하고 전화했을까요?”

거기까지 말한 피터라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사무실 한쪽에 있는 냉장고로 다가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물 두 병을 꺼내어 한규호와 자신이 앞에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귀한 고객님이 오셨는데, 마실 것도 내오지 않고. 내가 목이 마르니 그제야 생각이 났네요.”

피터라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물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눈앞에 물에 손대지 않았다.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뭐. 차논을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친구가 실력이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전직 NIA 출신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손님이 없지는 않죠. 얼마 전에 한 손님이 그를 찾았죠.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손님이 차논을 찾았고, 차논이 끄렁떠이의 촌장에게 전화했죠. 그리고 끄렁떠이에 탈북자 조직이 움직였습니다. 탈북자 조직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하기 시작했고, 조직원 몇 명이 아속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어제, 아니, 오늘 새벽이 되겠군요. 스크래치독에서 만취해 나오는 취객 하나를 납치했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북한인 조직은 사뭇쁘라깐에서 NIA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들 중에 납치된 취객은 없었습니다.”

한규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춘 것이다.

“지금 그 내용이 내가 당신을 신뢰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한규호의 질문에 피터라는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민망하지만, 실력이 없지는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방콕에서 일어난 일은 몇 시간 내에 알 수 있습니다. 태국 전역에서 일어난 일은 24시간 이내에, 말레이반도에서 일어난 일도 늦어도 1주일 안에 알 수 있습니다. 믿고 일을 맡겨 달라는 의미죠. 그리고.”

“그리고?”

“소중한 고객님이 되실지, 아니면 지나가는 손님이 되실지, 어쩌면 한 가족이 될지 모르는 귀하가 앞서 말한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미스터 데이빗 박?”

피터라는 남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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