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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74화 (274/386)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6)

한규호는 후웨이쾅에 위치한 레지던스 객실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리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가진 한규호라 해도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수면은 필수적이었다. 더군다나 한규호는 납치되고, 두들겨 맞았고, 십여 명의 남자들과 싸움을 벌였으며, 그 상태로 한 시간가량을 운전했고, 완과 통화를 했다. 피로가 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잠을 자고 있다고 해도, 한규호의 감각은 여전히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맡에 놓아 둔 전화가 진동했을 때, 그의 감각은 그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진동을 감지한 감각은 한규호를 깨웠고, 눈을 뜬 한규호는 머리맡에 놓아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한규호는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한국의 지역 번호도, 홍콩의 지역 번호도 아니었다.

한규호는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완과 통화했던 시간이 정오가 되기 이전이었다. 대략 대여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한규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굴로 가져갔다. 언제나처럼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사람을 찾고 있소.”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시죠. 주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피터 팀장을 찾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규호는 전화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뭔가 다르군.

한규호가 그동안 만나 본 정보상들과는 달랐다.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 줄도 몰랐고, 첫 통화가 이렇게 짧게 끝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보상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보상들은 의심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사고판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오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신뢰의 담보라는 선결 조건이 필요했고, 그 신뢰를 담보하는 것은 목숨이었다. 구매자들은 잘못된 정보의 환불을 정보상의 목숨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정보상들은 직접적인 만남을 회피했다.

물론 차논처럼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정보상보다 해결사 일의 비율이 더 많은 경우에는 직접 의뢰인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정보상들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려 하지 않았다.

차논처럼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런 업계 신참 이거나, 아니면, 직접 필드에서 뛰는 비율이 높은 해결사일까?

한규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이 연락을 했을 것이다. 식양이었던 그녀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햇병아리 정보상을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한규호의 손에 들려 있던 전화기가 짧게 진동했다.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고 메시지에는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한규호가 링크를 클릭하자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실행되었다. 그리고 방콕 시내의 한 지점이 액정 화면에 떴다.

Town Foreign Language Institute.

한규호가 정보상을 만나러 가야 할 장소였다.

***

통로(Thong Lo)는 방콕 중심도로라고 할 수 있는 스쿰빗로(路) 동 측에 있는 지역의 이름이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 방콕의 리틀도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지역은 작고 아담한 카페와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퓨전 레스토랑이 많아, 관광객들은 물론 방콕 시민들도 즐겨 찾는 관광 명소 중 하나였다.

한편, 최근 통로 지역에는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외국어 학습이었다. 통로가 외국어 학습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통로에는 예전부터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습소가 있었다. 그러다 중국어가 부상하고, 한국어 등 기타 외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어 교습소는 외국어 학원의 형태로 진화했고, 통로역 인근에 있는 방콕 대학교 학생들이 유입되면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타운 외국어 학원(Town Foreign Language Institute)도 최근 방콕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외국어 학원이었다.

사실 타운 외국어 학원이 처음부터 지금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어 교습소로 시작한 통로 인근의 다른 학원들과는 달리 타운 외국어 학원은 영어가 주력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타운 외국어 학원이 통로에서 유명 학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재미있게도 한국어 클래스를 개설하면서부터였다.

전통적으로 한국어는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그리 인기 있는 언어는 아니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ODA를 쏟아부으며 태국을 경제적으로 잠식한 일본, 그리고 엄청난 인구를 바탕으로 폭발적인 경제성장이 진행 중인 중국에 비해 한국은 극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그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한국인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가이드 정도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괄시받던 한국어가 갑자기 태국에서 인기 외국어로 부상하게 된 것은 ‘90일 비자 협정’ 때문이었다.

한국과 태국이 양국을 상호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90일간 비자를 면제하는 협정을 맺은 시기는 1981년이었다.

협정을 맺을 당시만 해도 90일간 비자 면제는 태국 국민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81년의 한국은 태국만큼, 어떤 부분에서는 태국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양국 간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90일 비자 면제가 조금씩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자 면제가 상당한 경제 유발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거기에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POP의 인기도 한국어의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갔다.

타운 외국어 학원은 통로에서 가장 먼저 한국어 강습을 개설했고, 한국문화원, 방콕 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지정 한국어 강습 학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방콕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방콕의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현재는 통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 학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물론 다양한 영어 클래스도 타운 외국어 학원의 인기 요소 중 하나였다.

바로 그 타운 외국어 학원 앞에 한규호가 서 있었다.

한규호는 학원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을 보면서 여기가 목소리 시원한 그 남자가 찾아오라고 한 그곳이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학원으로 찾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규호는 그저 위장용으로 학원 명칭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보상들은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학원이었다. 그냥 학원도 아니고, 서울 종로2가에 있는 대형 외국어 학원들처럼 건물 하나를 사용하는 초대형 학원이었다.

외국어 교재를 든 젊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학원을 드나들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으로 오가고 있었다.

한규호는 잠시 학원 건물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옮겨 학원으로 들어갔다.

지도상의 그 위치였다. 상호도 같았다. 시원한 목소리를 가진 그 남자가 알려 준 그곳임은 분명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분주하긴 건물 안이 더 했다. 수강 신청 기간인지 수많은 수강생이 여기저기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입구로 들어선 한규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했다.

한규호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May I Help You?’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를 본 한규호는 다시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외국어 학원의 안내 직원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피터 팀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도 외국어 학원의 사무실처럼 보였다. 스무 명가량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한규호를 안내한 여직원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고, 귓속말을 들은 직원은 몸을 일으키더니 한규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하러 오셨군요. 그런데 어쩌죠? 지금 피터 팀장님은 수업 중이신데. 괜찮으시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직원의 말을 들은 한규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인터뷰? 수업 중?

그리고 한 단어를 도출해 냈다.

함정.

한규호는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이 말했다.

***

제이크는 야닌의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이크는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그리고 답이 없었음에도 손잡이를 잡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제이크의 생각대로 야닌은 사무실에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제이크는 잠시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곤할 만도 했다.

새벽에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들은 그녀는 끄렁떠이의 빈민가로 직접 달려갔다. 그곳에서 다시 또 사뭇쁘라깐 읍으로 갔고, 그곳에서 북한인들을 체포했다. 체포한 북한인들을 구금시설로 데려가 심문했고, 데이빗 박을 확인한 다음 NIA 본부로 복귀해 제이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번 작전에 인원과 예산을 더 투입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점심도 거른 채 상부에 가서 보고하고, 북한인들을 추가 심문하고 나서야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토막잠을 자는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제이크는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이대로 자게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깨워야만 했다. 토막잠보다는 지금 제이크가 가져온 정보를 그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새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

제이크가 잠들어 있는 야닌에게 말했다.

“1분만 기다려 줘. 미안.”

제이크의 말을 들은 야닌이 눈을 감은 채로 작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이크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후 눈을 뜬 야닌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켜면서 몸의 관절을 풀어 냈다.

제이크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점심을 걸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콘도에는? 그 자식이 모습을 나타냈나?”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야닌이 제이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상처럼 아속역 콘도에는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감식팀이 내부를 수색했지만 거의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그 자식은 프로니까. 새 정보가 들어왔다고?”

“한국 쪽 백색을 감시하다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제이크가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야닌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야닌은 서류를 들어 눈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다 읽고, 다시 한번 더 읽은 후에 시선을 돌려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모용진? 이자가 누구지?”

야닌이 서류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정체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수완나품 공항을 통해 입국한 기록은 확인되었습니다.”

“이자의 위치 정보를 구매한다는 정보가 한국 국정원과 관련 있는 기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실제 구매자는 파타야에 있는 두 명의 한국인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상하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한국 쪽 요원 하나가 모용진이 입국한 다음 날 수완나품 공항을 통해 입국한 것도 확인했습니다.”

“한국에서 우리에게 통보했나?”

“아닙니다. 정보상 정보 거래 사이트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이름이?”

“김승섭입니다.”

야닌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김승섭. 김승섭이라. 현재 위치는? 파타야?”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용진의 정보를 구매한다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명으로 추측됩니다.”

“파타야에 한국 백색이 있다고 했지?”

“네. 여행사 사장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돕겠군. 둘 중 한 명이겠고.”

“가능한 가설입니다.”

“데이빗 박이랑 관계가 있을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이크가 말했다.

“그래.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공통점이라면 있지. 한국인 모용진, 그 모용진을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되는 김승섭, 북한에서 온 서용석을 찾는 데이빗 박.”

야닌이 말했다.

“한국.”

제이크가 말했다.

“그래. 한국.”

야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진과 서용석, 둘 사이에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소개로 트라이앵글 카지노를 찾았던 데이빗 박과 한국 쪽에서 흘러나온 모용진이라는 인물과, 파타야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김승섭 사이에는 한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제이크는 야닌의 말을 듣고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씩 하고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솔직했던 것 아니었어?”

야닌도 제이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 항상이라고는 말 못 하겠는데요. 아무튼, 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자식에 대한 내 집착?”

“맞습니다. 뭐. 평소답지 않다고 할까요? 다른 상황이라면 몰라도 승진이 바로 앞인데도 이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걱정했는데?”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퍼즐처럼 단서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저도 조금 욕심이 나기 시작합니다.”

“욕심?”

“데이빗 박. 그 자식을 꼭 잡고 싶다는 욕심. 어찌 되었건 지금 보이는 단서들은 한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자식이 국정원 요원이거나, 한국의 일을 돕는 중이라면 파타야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제이크의 말에 야닌도 씩 웃었다.

“이제 너도 ‘그 자식’이라고 부르는군.”

“정식 코드명으로 지정하도록 하죠.”

“괜찮군. 파타야로 가야겠어.”

야닌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말입니까?”

제이크가 되물었다.

“더는 눈앞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

야닌이 제이크를 보면서 말했다.

제이크는 야닌을 보면서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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