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73화 (273/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5) >

***

야닌은 점심시간이 거의 지나고서야 NIA 본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뭇쁘라깐읍 짜오프라야 강변의 버려진 창고에 호송 차량을 불러 북한인들을 태우고, NIA가 사용하는 비밀 구금 시설로 그들을 옮기고, 주요 인물로 보이는 몇 명을 심문해 정보를 얻고 나서야 다시 NIA 본부로 돌아온 것이다.

야닌은 자신의 사무실이 아닌 상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작전의 실질적 통제권자인 제이크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야닌이 상황실로 들어서자 제이크가 그녀를 맞이했고, 두 사람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콘도는?”

자리에 앉자마자 야닌이 물었다.

탈북자 조직이 알려 준 주소, 데이빗 박이 묵고 있던 아속역 인근 트윈픽스 콘도를 확보했냐는 질문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요원들을 보냈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자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 주변에 요원들을 잠복시켜 놓았습니다.”

제이크가 말했다.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야닌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 남자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콘도를 확보하고, 감식팀을 보내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수집하라고 해. 그래 봤자 별로 건질 수 있는 것은 없겠지만. 콘도 소유주는 찾았나?”

“찾았습니다. 지금 데려오는 중입니다.”

야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이크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냐고?”

“네.”

야닌은 대답 없이 몇 시간 전, 북한인 조직의 두목을 심문했던 내용을 회상했다.

***

공교롭게도 그녀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준 북한인은 처음 어설픈 태국어로 살려 달라고 말한 남자가 아니었다.

창고에서 토사물을 위에 뒹굴고 있던 두목이 밖으로 끌려 나갔고, 이어진 총소리에 그 남자는 겁을 먹었고, ‘그 남자 혼자’라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자 다른 북한인이 그에게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

야닌은 소리친 남자도 밖으로 끌어냈지만 한 번 닫힌 북한인 조직원들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조직을 이끌던 두목, 토사물이 묻어 있던 남자였다.

고문도 필요 없었다. 그저 입을 열지 않으면 라오스에 있는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버리겠다는 말 한마디에 두목의 입이 열렸다.

두목은 끄렁떠이의 촌장에게서 일을 주선 받았고, 의뢰인이 찾아왔고, 의뢰인이 데이빗 박의 사진을 건네주며 사지 멀쩡하게 생포해달라는 의뢰와 함께 선금으로 90만 바트를 건넸다고 순순히 불었다.

다행스럽게도 두목은 의뢰인이 건네준 데이빗 박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고, 야닌은 그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야닌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 데이빗 박이었다.

그리고 이 얼굴을 가진 남자가 야닌이 도착하기 얼마 전까지 창고에 있었다는 사실을 조직 보스가 확인해 주었다.

***

“종합해 보면, 그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가. 아니, 그가 데이빗 박이 맞군요. 얼굴이 확인되었으니. 치앙마이에서 사라져 미얀마를 가로질러 탈출한 그 남자가 지금 방콕에 있다. 그는 잔뜩 술을 먹어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태로 북한인 조직에게 납치가 되었다가 두목이 온 것을 확인하자 언제 취했냐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 혼자서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열네 명이나 되는 범죄조직원들을 박살을 내고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맞습니까?”

제이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야닌이 해 준 말을 정리했다.

“그래.”

야닌이 답했다.

“믿기지 않는데요. 이야기만 들어 보면 사람 같지가 않군요. 마치 귀신같달까.”

제이크는 처녀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닌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상관에게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녀가 귀신처럼 독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지, 귀신같은 행보를 보여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데이빗 박은 정말 귀신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놈은 사람을 찾고 있어. 서용석. 북한 놈이라는군. 그놈을 찾고 있다고 했어.”

야닌이 말했다.

“북한 놈을 방콕에서 찾는다니. 이상하군요.”

“두목 놈도 같은 말을 하더군.”

“흠, 이해할 수 없군요.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데이빗 박은 그 서 뭐라는 북한 놈을 찾으려고 일부러 탈북자 조직에 잡혔군요. 그리고 차논과 북한인 조직에 의뢰를 맡긴 그 인물은 데이빗 박의 동료, 적어도 협력자이고.”

“그래. 차논이 받은 금덩이가 몇 개였지?”

“세 개입니다. 처음에 선금으로 하나, 나중에 잔금으로 두 개.”

“차논에게 골드바 세 개, 북한 조직에 준 의뢰비 90만 바트. 며칠 동안 술집에서 물 쓰듯 쓴 돈. 그 정도 자금력에 협력자. 조직이 움직이는군.”

“한국 국정원일까요?”

“가능성은 제일 크겠지. 지금 한국 놈들이 몇 명이나 들어와 있지?”

“백색 요원이 대사관에 하나, 위장 회사에 둘, 치앙마이와 파타야에 각 한 명씩 있습니다.”

“블랙은?”

“트라이앵글 사건 이후로 전부 철수했습니다. 이후에는 확인 안 되었습니다.”

“움직임은 없고?”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야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방콕에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대니얼 양은 박물관연대 이인자인 패트릭 키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에 책상에 올려놓은 대니얼 양의 전화가 진동했고, 패트릭은 사무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로드.”

대니얼 양이 전화 걸어온 상대를 말해 주었다. 태국경찰청 정보본부에 근무하는 박물관연대 협력자의 코드명을 말했다. 상대를 말해 준다는 것은 패트릭이 자리를 뜨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패트릭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니얼 양이 로드에게 북한 쪽 해결사들을 수배해 줄 것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인부들은 확보했고?”

대니얼 양이 물었다.

패트릭은 시선을 통화하는 대니얼 양에게서 손에 든 서류로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패트릭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하는 대니얼 양을 보고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대니얼 양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패트릭은 대니얼 양의 목소리와 그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손에 든 서류를 정리했다.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대니얼 양이 조금 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일단 대기. 다른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알려 줘.”

대니얼 양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패트릭은 그런 대니얼 양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기간 대니얼 양과 같이 일해 온 패트릭은 알고 있었다. 그의 상사 얼굴에 떠오른 저 표정은 일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보통은 나쁜 쪽으로 일이 커졌다.

“나에게 줬었나?”

대니얼 양이 물었다.

“뭘 말입니까?”

패트릭이 되물었다.

“김승섭. 국정원 김승섭의 인적 사항.”

“이틀 전 오후 보고서에 있을 겁니다.”

패트릭이 말했다.

대니얼 양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고서 파일 중에서 패트릭이 말한 파일을 정확히 꺼냈다.

대니얼 양은 파일을 열고, 김승섭 관련 보고가 적혀 있는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서류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대니얼 양이 말했다.

“이걸 놓쳤군.”

패트릭은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묻고 싶었다. 조금 전 방콕에서 온 전화는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만약 그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면 대니얼 양이 말해 줄 것이다.

“왜 이걸 못 봤지?”

대니얼 양이 서류를 패트릭에게 넘겨주었다.

패트릭은 서류를 확인했다.

김승섭에 대한 대략적인 인적 사항과 그의 여권에 등록된 출입국 기록이 적혀 있었다.

“여기.”

대니얼 양의 손가락이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방글라데시에 입국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날짜를 확인하니, 특정 시점과 일치했다.

“트라이앵글에서 일하시던 시기와 비슷하군요.”

“비슷한 게 아니지. 일치하지.”

패트릭은 고개를 들어 대니얼 양을 바라보았다.

대니얼 양이 트라이앵글에서 식양의 정보를 캐기 위해 위장 잠입 했을 당시 김승섭은 방글라데시 치타공에 입국한 기록이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트라이앵글과 방글라데시 치타공, 직선거리만 900km 떨어진 두 곳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은 두 장소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다.

“로드가 방콕에 있는 탈북자 조직을 수배하려고 알아보고 있는 와중에 재미있는 사실을 입수했더군. NIA가 움직였다는 거지.”

“NIA가 말입니까?”

“그래. NIA가 북한 놈들을 들쑤시고 있다더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고.”

“설마.”

“그래.”

“데이빗 박입니까?”

대니얼 양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탈북자 놈들이 데이빗 박을 잡겠다고 날뛰다가 NIA에 감시망에 걸렸다는군. 중국 놈들, 태국 놈들, 그리고 라오스 군벌의 눈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도망친 내 친구 데이빗 박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그 시점에 방글라데시에 입국한 기록이 있는 김승섭이 태국에 있다. 재미있지 않나? 재미있군. 너무 재미있어.”

패트릭 키츠는 그의 보스가 데이빗 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을 알고 있었다.

모용진을 포섭한 것도, 그를 파타야에 데려간 것도 전부 그 집착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니얼 양의 생각대로 데이빗 박에 대한 흔적이 포착된 것이다.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패트릭 키츠가 말했다.

“4조를 준비시켜.”

그러나 대니얼 양은 패트릭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지시를 내렸다.

패트릭은 하마터면 ‘4조를 말입니까’ 하고 되물을 뻔했다.

4조(組). 박물관연대가 운용하는 조직 중 하나였고, 박물관연대에서 유일하게 무력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가장 빠른 방콕행 항공편을 수배하고, 파타야로 보내. 김승섭을 잡아들여.”

“국정원 요원을 말입니까?”

패트릭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승섭은 국정원 요원이었다. 정보기관의 요원을 납치한다는 것은 그 정보기관과 척을 지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평소의 대니얼 양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대니얼 양은 되묻는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패트릭은 그 눈에 담겨 있는 분노를 읽었다. 하지만 대니얼 양의 명령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직접 일을 벌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요원을 납치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절대로 국정원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NIA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국에서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패트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대니얼 양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길. 그자가 방콕에 있습니다. 흔적이 남으면 길이 분명히 알아챌 겁니다.”

패트릭이 ‘길(Gil)’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국정원과 NIA에도 반응이 없던 대니얼 양이 길이라는 이름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길, 방콕에서 활동하는 동종업계 경쟁자의 이름이었다. 만약 박물관연대나 대니얼 양이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다면 길은 절대로 그 실수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패트릭은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보스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데이빗 박에 대한 단서가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캄보디아나 말레이시아에 있는 회사를 통해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적당히 크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 않는,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회사를 내세우고 파타야 조직에 일을 의뢰합니다. 단, 기존에 한 번이라도 같이 일했던 인원은 전부 배제합니다. 새로 생겨난 신생조직, 막 일을 시작한 겁 없는 어린애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패트릭이 대안을 제시했다.

“어린애들에게 일을 맡기자고?”

대니얼 양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흔적을 남겨 역추적 당하는 것보다 일을 망치는 것이 낫습니다.”

패트릭이 말했다.

대니얼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런 패트릭을 바라보았지만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계획은 여기에서 짭니다. 실력 있는 직원을 파타야로 보내 현지 조직을 통제하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 것입니다. 대신 뒷길로 보내야 합니다.”

뒷길. 밀입국을 의미했다.

“어디에서?”

“시아누크빌이 지금에서는 최선입니다.”

캄보디아 남부의 휴양지인 시아누크빌과 파타야 항로는 유명한 밀입국 루트였다. 밀입국용으로 개조된 스피드보트를 이용하면 8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선 김승섭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위치를 파악하고, 동선을 확인한 후에야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현지 조직을 수배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그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10만 바트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 놈들이 많습니다. 여차하면 필리핀 애들을 활용해도 됩니다. 마약 조직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김승섭의 확보가 끝나면 모두 지워 버려야 합니다. 회사를 포함해서.”

패트릭이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는데도 데이빗 박에 대한 집착으로 일을 진행하겠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패트릭은 대니얼 양의 눈을 바라보았다.

길이라는 이름이 나온 이후로 대니얼 그의 눈에 담겨 있던 분노는 사그라졌지만, 그렇다고 집착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아누크빌에 여행사가 하나 있지.”

대니얼 양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패트릭이 답했다.

술과 여자, 그리고 카지노를 보유한 시아누크빌은 파타야를 대신할 새로운 섹스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박물관연대는 중국의 부호들을 접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행사 하나를 시아누크빌에 설립해 놓았다.

“그곳을 통해 일을 진행하도록. 보트도 확보해 놓고. 현지 통제는 4조 부조장이 진행한다. 청소까지 염두에 두라고 해.”

“알겠습니다.”

패트릭은 그렇게 답했다.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대니얼 양이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획도 현지에서 수립한다.”

대니얼 양이 말했다. 그가 직접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만류하려던 패트릭은 대니얼 양의 눈을 보고는 단념했다.

이 정도로 물러나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프놈펜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편을 예약해.”

패트릭은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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