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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72화 (272/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4) >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전화기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한규호가 그녀의 질문을 되물었다.

-오랜만이라고 할 게 아니라, 미안해. 내가 먼저 여보세요 하고 인사를 해야 했는데. 이렇게 말했어야죠.

그녀의 투정 섞인 말에 한규호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지금 막 ‘그렇군’이라고 하려고 했죠? ‘그렇군’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렇군. 그런가. 전부 다 금지.

마치 한규호의 마음을 투시하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했다.

막 ‘그렇군’이라고 말하려던 한규호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음…… 전화가 걸려 온 곳이 홍콩이라서. 미국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한규호가 말했다. 변명하는 것 같아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변명이 맞았다.

-음, 괜찮은 변명이네요. 나쁘지 않아요.

“변명이 아니라……. 아니야. 그건 그렇고. 지금 시간이 괜찮아? 조금 길게 통화할 수 있을까?”

한규호가 말했다.

후웨이꽝역까지는 아직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탁할 내용은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잠시 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말을 돌리네요. 얼마나 길게요? 그리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한 여섯 시간 정도? 하지만 당신이 필요하다면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좀 더 만들어 볼게요.

그녀의 농담에 한규호는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참아 내야 했다.

-주변 소음이 있네요. 지금 밖인가요?

“그래.”

-전화번호를 보니 태국이네요.

“그래.”

-이제 ‘그래’도 금지해야겠어요. 단답형은 상대방을 섭섭하게 만들어요.

“……방콕이야. 지금 지하철 안이라. 조금 시끄럽군. 언제부터 홍콩에 있었지?”

-한 달 조금 안 되었어요. 3주하고 며칠?

“그렇군.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한규호가 물었다. 홍콩으로 간 그녀가 ‘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 H. 스완슨이에요. 마리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미스 스완슨. 스완슨 양께서는 홍콩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요?”

-저 취직했어요.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들어 봤나요?

“들어 본 것 같군. 미국계 보험사. 아시아에 지사가 있던가?”

-시애틀에 본사를 두고 있는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는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을 수립했어요. 한국과 일본, 대만, 싱가포르와 홍콩을 우선 타깃으로, 점차 아시아 전역에 영역을 확대할 생각이죠.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의 본부는 홍콩에 설치될 거예요.

“그렇……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그 회사는 막 입사한 신입사원도 해외 파견을 보내는 건가?”

-신입사원 아니에요. 경력을 인정받아 헤드헌팅 된 거라고요. 사원(staff)이 아니라 과장(Manager) 직급으로. 절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니에요?

“……과장치고는 나이가 너무 어린데.”

-스물일곱 살짜리 과장은 그리 드물지 않아요.

“스물……일곱?”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죠.

“재미있군. 스물일곱 살 마리 과장님에 대해서 알고 싶군요.”

-재미있다니 다행이네요. 저에 대해서 알고 싶다기보다 지금 본론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맞죠?

“뭐. 둘 다라고 해 둘까.”

-뭐. 나는 상관없어요, 당신과 대화할 수만 있다면. 마리는 부산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어요. 생모는 친권을 포기했고,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생후 10개월 만에 태평양을 건너 스완슨 가문에 입양되었어요. 스완슨 부부의 집은 버지니아 알링턴 카운티에 있었어요. 워싱턴 DC에 근무하는 고위공무원들이 사는 대표적인 부촌이죠. 덕분에 마리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백인 중심의 사립학교에서 인종차별은 피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했죠, 하지만 스완슨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유색인종 입양아라는 트라우마를 이겨 냈어요. 그리고 마켓(Marquette)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밀워키?”

-맞아요. 잘 아네요. 거기서 정치학을 공부했어요.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한규호가 물었다.

-마켓 대학교는 Les Aspin center를 소유하고 있어요. 들어 본 적 있나요?

“……처음 들어 보는군.”

-정식 명칭은 Les Aspin center for Government, 줄여서 LAC라고도 해요. 마켓 대학교가 소유한 건물이자 운영하는 정부 인턴십 프로그램의 이름이에요. 워싱턴 DC, 캐피털 힐에 있어요. 마리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국무부 인턴십을 수료했어요. 그 경력을 바탕으로 행정부 부처 사업을 수주하는 회사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경력을 쌓았죠. 그런 마리를 눈여겨본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에서 그녀를 헤드헌팅 했죠. 경영감사부서 과장으로.

한규호는 고개를 좌우로 작게 저었다.

지독한 CIA 놈들 같으니. 분명히 할리우드에서 작가들을 스카우트해서 가짜 신분을 만드는 일을 시키고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리 스완슨 과장님은 회사에서 기대를 받고 있나 보군요. 그렇게 대접받는 것을 보니.”

-H를 빼먹지 마세요. 마리 H. 스완슨이에요.

“중간 이름? 요즘치고는 드문데.”

-마리의 양부모님은 그녀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녀 생모의 성을 중간 이름으로 붙였어요. 보통 생모와의 연을 단절하기를 바라는 다른 입양 가정과는 달랐죠.

“H는……‘한’의 이니셜?”

-맞아요. 맞힐 줄 알았어요.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중간 이름을 정한 것은 CIA의 작가들이 아니라 그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주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일은…… 뭐 힘들지 않아? 홍콩은 있을 만한가?”

-질문 하나를 빼 먹었어요. 이미 답을 알기 때문에 질문을 안 한 거겠죠?

못 당하겠군. 한규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는 큰 회사라 그런지 복지가 좋아요. 시내 중심가에 전망 좋은 맨션을 얻어 줬어요. 방 두 개에, 풀옵션. 옷 가방만 들고 여기에 왔죠. 거기에 월급도 많고, 체류비가 추가로 나오니까, 경제적으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요.

“그렇군.”

-그 말은 금지어예요.

“……부럽군.”

-부러워요? 그럼 여기로 올래요? 온다면 자리를 만들어 줄게요. 제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과장이지만 신생법인이라 권한이 작지 않아요. 부하 직원 한두 명 정도는 제가 뽑을 수 있을 거예요.

“부하 직원?”

-싫어요? 내 밑에서 일하는 건?

한규호는 다시 미소 지었다.

서용석을 찾아 방콕에 온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돈을 물 쓰듯 써 대는 데이빗 박을 연기할 때는 술집에서, 클럽에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때로는 우렁찬 폭소를 보여 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날은 벌써 몇 번째나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 싫다는 것은 아닌데…….”

-아닌데?

“보험회사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경비 말고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군. 중국어도 못 하고. 물론 광둥어도.”

-그러면 그냥 와도 괜찮아요. 당신 먹여 살릴 정도의 월급은 되니까요. 자주는 아니라도 카지노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용돈도 줄 수 있어요. 대신 집은 얻어 주지 못하겠네요. 홍콩은 집값이 비싸니까. 우리 집에서 자야 해요.

“카지노도 갈 수 있다니. 솔깃하군. 방이 두 개라고 했지?”

-말 안 했네요. 방 하나는 드레스 룸으로 쓰고 있어요.

완이 말했다.

“부하 직원 아니면 기둥서방이라. 기둥서방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막상 해 보면 금방 적응할 거예요.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말로는 그녀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는 한규호가 우위에 서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한규호는 그렇게 미소 짓거나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

“잠시만 기다려 줘.”

MRT에서 내려 숙소에 복귀한 한규호는 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며칠 동안 비어 있던 숙소를 둘러보았다.

그의 감각에 도청기나 카메라 같은 감시 장비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규호는 시간을 들여 다시 한번 꼼꼼하게 숙소를 점검한 후에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조용해졌네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나요?

완이 물었다.

“그래. 부탁할 것이 있어.”

한규호가 말했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를 끝낼 시간이었다.

-네. 무엇을 해 주면 되죠?

완이 물었다.

한규호는 그 목소리에 어쩐지 섭섭함이 묻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 회사가 이 전화를 듣고 있을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그렇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한규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서용석을 찾는다는 것은 CIA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방콕에 온 것이 그 때문이라는 것도 쉽게 유추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용석을 찾는다는 것을 일부러 숨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말은 조심해야 했다.

CIA와 같이 일하게 된 완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통화 때문에 그녀가 식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미국에 말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니까. 그러나 한규호 스스로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방콕으로 갈까요?

완이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이쪽에서 활동하는 실력 있는 정보상을 소개해 줬으면 해.”

-정보상요?

완이 물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 그자가 방콕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정보상.”

전화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규호는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도 말을 고르고 있다. 그녀의 회사가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한규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당신 회사도 알고 있어. 내가 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을.”

한규호가 말했다.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렇군요. 회사도 알고 있나요? 그 사람에 대해서?

“그래.”

한규호가 말했다.

-저는 듣지 못했어요. 알려 줄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직접 말해 주면 내가 찾아…….

“아니.”

한규호가 완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실력이 있는 사람만 알려 줘. 그걸로 충분해.”

-어머. 내 실력을 못 믿겠다는 의미인가요?

완이 다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한규호는 의식적으로 입을 닫았다. 지금 완의 그 말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다가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조금 위험하군.”

한규호가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그런가요.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식양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서요?

한규호는 눈을 감았다.

결국에는 그 단어가 나오고야 말았다.

“그래. 당신 회사가 알고 있나?”

한규호가 물었다.

-아니요. 이야기 안 했어요. 듣고 있다면 지금 알게 되겠네요.

완이 내용의 무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완이 말했다.

“…….”

-당신은 태국에 있고 도움이 필요해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 선택은 하나뿐이에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도울 거예요.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회사에 들어왔어요. 그런 나에게 식양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당신을 돕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간단하죠?

한규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바보 같군. 당신은.”

-틀렸어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고맙다고 해야죠. 아니, 사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하지만 당신은 고맙다고 안 하겠죠. 내가 방콕으로 갈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소개만 해 줘.”

-여전히 고집불통이네요.

“당신도.”

-후회하나요?

“뭐를.”

-나에게 전화 달라고 한 것을.

“……그래.”

한규호가 말했다.

-나는 기뻐요.

“기쁘다고?”

-네.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금 전 행동과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고개 저음이었다.

“못 이기겠군.”

-방콕으로 갈까요?

“아니. 나중에 당신이 필요하면 그때 부탁하지.”

-고집불통.

“사람이나 소개해 줘.”

-알았어요.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죠?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전해 줘.”

한규호가 말했다. 그녀는 더 전화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완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홍콩에 들르도록 할게.”

한규호가 말했다.

-항상 그런 식이에요. 사람 마음은 다 상하게 해 놓고,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면 화낼 수가 없잖아요.

“그런가.”

-또 그런가. 하지만 봐줄게요. 약속했어요. 당신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죠.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래.”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규호는 잠시 동안 끊긴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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