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3) >
야닌이 창고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이는 장면은 십여 명의 남성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전부 무력화되어 있었다. 살려 달라고 말한 남자처럼 의식이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아직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이들도 사지를 제대로 가누질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인들이 맞았다. 창고로 진입한 요원들이 쓰러져 있던 남자들을 수색했다. 그들 중 몇몇은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대신 손도끼나 접칼 등이 그들의 품 안에서 나왔다.
다행이라면 총기처럼 NIA 요원들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될 만한 무기는 없었다. 창고에 진입하기 전 긴장한 것치고는 탈북자 조직의 무장은 형편없었다.
야닌은 몸수색이 끝난 북한인들은 한쪽 구석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신체 통제력을 아직 되찾지 못한 그들을 요원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끌어 한구석으로 몰아야만 했다.
야닌은 그 모습을 보면서 창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미스터리 소설의 사건 현장처럼, 모순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우선 북한인들의 상태였다.
그들은 몸의 통제력을 상실한 채로 창고 바닥에서 좀비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외상이 없었다. 외부적 충격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창고에도 싸움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 흔한 핏자국 하나 없었다.
창고에서 보이는 단서라고는 진동하는 생선 비린내와 북한인 중 한 명이 쏟아 낸 토사물뿐이었다.
무력화 가스의 흔적도 없었다. 약물도 아니다. 음식의 흔적도 없었고, 버려진 주사기도 없었다. 설사 주사기가 있었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건장한 남성 십여 명이 예방주사를 맞는 어린아이처럼 줄을 서서 주사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한인들이 끄렁떠이의 아지트를 떠난 게 몇 시간 전이다. 고작 몇 시간 전. 그 몇 시간 사이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야닌은 창고 구석에 모여 있는 북한인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들 중 한 남자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야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눈을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야닌의 관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놈인가?”
야닌이 처음 창고로 돌입한 요원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요원이 답했다. 문이 열리고, 어설픈 억양의 태국어로 살려 달라고 말한 남자가 그라는 이야기였다.
야닌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려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니 그리 젊지 않은 남자였다.
서른? 마흔? 적어도 마흔 가까이 되어 보였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북한을 탈출해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았을 테니, 고생이 나이의 형태로 얼굴에 묻어났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말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야닌이 말했다.
턱이 손에 잡히고 억지로 시선이 맞춰진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고 싶나?”
야닌이 다시 말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야닌은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토사물 위에 누워 있던 남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저놈이 두목이군.
야닌은 그 시선을 그렇게 해석했다.
남자는 토사물 남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닌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야닌은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네놈이 대답할 건가?”
그러나 토사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야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닌은 그 눈빛을 마주 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오른발로 그의 머리를 차 버렸다.
머리를 맞은 토사물 남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데려가.”
야닌이 말했다. 그녀의 지시에 곁에 서 있던 요원 둘이 쓰러진 토사물 남자의 팔짱을 끼고 창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다른 북한인들은 그 모습을 우려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창고 밖에서 들려온 총성에, 그들의 눈에 깃든 우려가 공포로 바뀌었다.
야닌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 말을 걸었던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실제로, 밖에 끌려간 남자는 죽지 않았다.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 야닌의 방법이었다.
“자, 이제 말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이놈도 데려가.”
야닌이 말했다. 다른 요원 둘이 그 중년 남자에게 다가왔다.
“그, 그 남자입니다!”
요원이 다가오는 것을 본 남자가 외쳤다. 어설픈 억양의 태국어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빠른 말투에 울음이 섞이면서, 안 그래도 어설픈 태국어가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그 남자가 호, 혼자서, 우, 우리 전부를…….”
하지만 야닌은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혼자서. 그 남자 혼자서.
***
그 남자. 십여 명이 넘는 북한인들을 혼자서 무력화한 한규호는 이미 방콕에 들어와 있었다.
김택경의 캠리를 타고 시계를 넘자마자 차량을 외곽 지역에 버렸다. 도로에서 오토바이 택시를 잡고 톤부리의 아바니 리버사이드 호텔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짜오프라야 강을 건너 BTS(Bangkok Mass Transit System) 사판 탁신(Saphan Taksin)역에서 전철을 탔고, 실롬(Silom)에서 MRT로 갈아탔다.
한규호의 목적지는 데이빗 박의 명의로 며칠간 사용했던 아속역 인근 트윈픽스 콘도가 아니었다.
한규호는 그곳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트윈픽스 콘도는 이미 노출되었고, 따로 챙겨 올 짐도 없었다.
설사 태국 경찰이나 다른 누군가가 그곳을 수색한다 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문 하나, DNA 하나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버려질 거점이었다.
한규호가 마련해 놓은 두 번째 거점은 후웨이꽝(Huai Khwang)지역에 있었다.
MRT 후웨이꽝역 인근, CCTV가 없는 적당히 외진 골목에 있는 오래된 레지던스였다. 월세가 싼 대신 관리인이 24시간 상주하지 않았고, 인근에 공장이 있어 소음이 심했다. 공실도 많아 다른 입주민과 마주칠 가능성도 적었다. 그런 레지던스를 중국 국적의 위장 신분으로 임대해 놓았다. 선불로 임대료 3개월치를 미리 지급해 놓았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확보한 서용석을 구금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러나 서용석을 추적할 단서가 끊긴 상황에서 레지던스의 목적이 바뀌어 버렸다.
한규호는 그곳에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면 ‘그녀’는 분명 그 손을 잡아 줄 것이다. 연락 달라고 했으니, 누군가 중간에서 장난질을 치지만 않는다면, 분명 ‘그녀’는 전화를 걸어 올 것이다.
하지만 한규호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서용석을 추적하기 위한 끈이 끊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 불쾌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녀와 계속 엮이는 것이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규호는 잘 알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한규호의 전화기가 진동을 한 것은 그가 탄 MRT가 막 펫차부리역에 진입하던 순간이었다. 목적지인 후웨이꽝역까지는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한규호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액정에 뜬 화면을 확인했다. +852로 시작하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한규호는 잠시 그 번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번호가 홍콩의 지역 번호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한규호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전화의 번호를 알려 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조금 전, 사뭇쁘라깐에서 빠져나오며 전화를 걸었던 김형원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홍콩 지역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한규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인삿말은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의도대로 전화기 너머에서 먼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화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한규호가 말했다.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
포츈지 선정 100대 기업 리스트에 10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린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사(社)는 사세 확장을 위해 아시아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새로 설립된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는 홍콩에 본사를 두고, 한국과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아시아 시장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계획을 위해 시애틀,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본사에서는 아시아 본부 설립을 위해 본사 직원 몇 명을 홍콩에 파견했다. 그리고 파견된 직원 중에는 얼마 전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에 입사한 마리 H 스완슨(Marie H. Swanson)이 있었다.
도버 아메리칸 보안감사부 소속으로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 지부의 보안 프로토콜을 점검하는 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마리가 그녀의 직속 상사, 미국 본사의 보안감사 부문 부사장 신시아 챔버의 전화를 받은 것은 막 미팅을 진행하기 위해 막 회의실로 들어서던 그 순간이었다.
신시아 챔버의 전화임을 확인한 마리는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고, ‘그’가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소식을 전한 신시아 챔버가 전화기 너머에서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을 들은 마리, 얼마 전까지는 규라는 이름으로, 또 그전에는 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젊은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신시아 챔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평상시에는 연락도 없다가 뭐가 필요할 때만 찾고. 그런 거. 솔직히 난 마음에 안 들어.
딸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로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전화하지 말까요?”
완이 웃음을 참으면서 물었다.
-좋은 생각이야. 전화 달라고 바로 전화하면 안 돼. 남자들은 단순해서, 그러면 자기들이 우위에 섰다고 생각한다니까.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도 웃음이 묻어 있었다.
완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괜찮아? 힘들지는 않아?
“괜찮아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부사장님은 어떠세요? 시애틀에는 별일 없죠?”
-부사장님이라는 말 별로다. 아무튼, 자기가 없으니까 집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야. 앤도 요즘 우울한지 말수도 줄고. 먹는 것도 줄고.
“마리아는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요?”
완이 최근에 머다이나 저택의 새 식구가 된 챔버가 막내딸의 근황을 물었다.
-그나마 마리아라도 있으니까 다행이지. 만약 마리아마저 없었다면 정말 집안 분위기가 끔찍할 뻔했어. 예전에, 앤하고 단둘이서만 살 때는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어. 마리도 어서 빨리 거기 마무리하고 다시 시애틀로 돌아와. 보고 싶어.
“저도 보고 싶어요.”
완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시애틀로 돌아올래? 꼭 마리가 거기에 없어도 일은 할 수 있잖아.
신시아 챔버의 말을 들은 완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그리고 신시아 챔버도 잘 알고 있었다.
챔버가에 구금되어 있던 그녀는 CIA의 밀러 국장과 인터뷰를 하고 CIA의 일을 돕는 조건으로 부분적인 자유를 얻어 냈다. 그리고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를 설립하는 일이 그녀에게 내려진 첫 번째 임무였다.
그녀는 당분간은 홍콩을 떠날 수 없었다.
“그가 왜 전화를 해 달라고 했는지는 아세요?”
완이 주제를 전환했다. 신시아 챔버와 이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슬슬 ‘그’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아니. 그저 연락을 달라는 그 이야기뿐. 트레이시도 전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였어.
“화가 났을 거예요, 트레이시는.”
-목소리가 안 좋기는 했지. 바로 전화할 거야?
“그럴까 하는데요.”
-조금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해.
“알겠어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전화할게요. 통화가 끝나면 바로 다시 전화드릴게요.”
완이 말했다.
CIA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그녀가 ‘그’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CIA에 보고할 의무가 생겼다는 의무이기도 했다.
물론 CIA는 그녀의 통화를 감청하겠지만, 절차에 따라 보고는 해야 했다.
-그래. 불가능한 부탁이다 싶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가능한 부탁이라도 바로 들어주지 말고. 자고로 남자라는 생물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수록 더 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 혹시 결혼하자고 하면 우선 내 허락부터 맡아야 한다고 해. 바로 나에게 전화하라고 해.
신시아 챔버가 다시 한번 농담을 섞어 경고했다.
“알겠어요. 바로 전화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짧은 통화가 끝났다.
완은 끊어진 전화기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은 다시 회의실로 가서, 본사와의 통화가 길어져 미팅에는 참석하기 어렵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회의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참석자들은 괜찮다며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허락을 받은 완은 자신에게 배정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잠그고, CIA 공식 절차에 따른 도청 방지 절차를 이행한 후에 다시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조금 더 기다리겠다는 신시아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녀가 전달해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 짧지 않은 통화 연결음 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여보세요’라는 인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완은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인사가 들려오지 않자 입술을 샐쭉거리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전화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완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그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쭉거리던 그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2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