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66화 (266/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8) >

차논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에 끌려오고 나서 몇백 번이나 한숨을 내뱉었건만, 아무리 길게 숨을 내뱉어도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응어리는 풀리질 않았다.

그렇지만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표류객의 심정으로, 숨을 뱉어 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을 뱉어 내면서 차논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된 결정이었을까?

NIA 시험을 보고 요원이 되겠다는 결정? 도청기를 설치하기 위해 치앙마이 샹그릴라 호텔 총지배인을 협박하겠다는 결정? NIA에서 쫓겨난 뒤 정보업계에서 계속 일을 하겠다는 결정? 정체불명 의뢰인을 만나겠다는 결정? 그거 꺼내 든 골드바를 내 것으로 하겠다는 결정? 보험을 들어 놓기 위해 NIA에 연락해야겠다는 결정?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논은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과 후회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야닌의 지시대로 의뢰인을 만나 전화번호를 전달한 차논은 이대로 끝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T det69를 찾아온 NIA 요원 두 명에 의해 그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 두 명의 요원에게 팔을 잡힌 채로 다시 끔찍한 NIA 본부 지하의 한 사무실로 끌려온 차논은 불빛 하나 없는 이곳에서 며칠을 감금당해 있었다.

며칠이라는 것은 차논의 생각이었다.

사실 차논은 이곳에 끌려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휴대전화는 압수당했고, 이곳에는 창문이 없었다.

대여섯 번의 식사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전직 요원이었던 차논은 NIA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밥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논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좁은 사무실, 조립식 철제 의자에 앉아서, 생각과 후회를 반복했고, 뇌가 버티지 못하면, 의자에 앉은 잠깐 졸았다. 그렇게 졸다가 깨어나면 다시 후회하면서 억겁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차논이 다시 끝없는 후회를 시작하려던 그 순간에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그중에 여자는 차논이 아는 사람이었다.

“앉아 있어.”

야닌이 말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던 차논은 다시 철제 조립식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사람을 본 차논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곳에 끌려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감옥에 간다면 그게 언제인지.

그러나 차논은 바보가 아니었다.

야닌이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질문할 권한이 없음을 알았다.

“북한인들을 어떻게 찾아냈지?”

야닌이 차논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끄렁떠이의 촌장(村長)에게 소개받았습니다.”

그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촌장(นครินทร์)?”

야닌이 물었다.

“끄렁떠이의 정보상입니다. 끄렁떠이에서 가장 많은 정보와 인력, 상품을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끄렁떠이를 지배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탈북자로 이루어진 조직이 끄렁떠이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촌장에게 북한 사람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촌장이라는 자가 전화번호를 알려 줬다?”

“맞습니다.”

“전화번호는?”

“네? 아, 저기. 제 휴대전화. 거, 거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차논이 말했다.

야닌은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 눈짓을 받은 남자가 테이블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며칠 만에 보는 차논의 휴대전화였다.

차논은 본능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했다. 하지만 생각과 후회를 반복한 그의 뇌는 잡혀 온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는지 빠르게 계산을 하지 못했다.

대신 시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전 1시 24분이었다.

“전화해.”

야닌이 말했다.

차논은 고개를 들어 야닌을 바라보았다.

“북한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알려 달라고 해.”

그리고 차논의 예상대로, 야닌은 말했다.

차논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새벽에 촌장에게 전화하라고?

그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야닌의 눈을 보고, 자신은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차논의 명줄을 잡고 있는 사람은 야닌이었다. 빈민가의 지배자보다 눈앞에 이 여자가 더 위험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차논은 고개를 숙이고는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land lord’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

야닌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차논은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책상에 전화기를 올려놓았다.

잠깐 신호가 울리고는 전화가 그대로 끊겨 버렸다.

수신이 거부된 것이다. 새벽 한시가 넘어 있었고, 당연한 결과였다.

차논은 당황한 눈으로 야닌을 바라보았다.

야닌도 차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해.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차논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명줄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그런 기분이었다.

다시 짧은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차논은 그 통화 연결음을 들으면서 어떤 소리라도 들려오기를 기도했다. 분노로 가득 찬 욕설이라도 상관없었다.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다.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정말로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차논의 기도가 통했는지, 전화기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차논은 마치 천사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도와주십시오.”

차논이 말했다.

-뭐라고?

노인이 말했다.

“그 북한 놈들. 정보가 필요합니다.”

차논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북한 놈들?

“네. 그자들이 어디 사는지, 그리고 의뢰인을 만났습니까? 뭐 하려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차논이 다급하게 물었다.

차논의 다급한 목소리와 대비되는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차논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내 잠을 깨운 것으로는 내 분노를 끌어내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지?

노인이 말했다.

차논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차논은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간청에 울음이 스며 있었다.

-살려 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자기 묫자리를 파면서 살려 달라니. 그래, 알겠어. 울먹이는 목소릴 들으니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지금 누가 옆에 있구만. 옆에 있는 놈이 시켰구만. 그놈이 네 목에 칼을 들이밀고 북한 놈들이 뭘 하려는지 알아보라고 했군. 그렇지 않고서는 네놈이 이런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스피커폰인가? 옆에 있는 놈도 잘 들어 두라고. 지금부터 맛있는 거 많이 먹어 둬야 할 거야. 저승에 가면 더는 못 먹을 테니까.

노인이 으스스한 어투로 하는 말을 사무실에 있는 세 사람이 들었다.

차논은 눈물 젖은 눈으로 야닌을 바라보았다. 당장 전화가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야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논이 시선을 조금 더 올리자, 야닌의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오랜만이네. 악어(จระเข้).”

야닌이 처음으로 대화에 개입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답이 없었다.

차논은 전화기가 끊어진 것이 아닐까 하며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았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십여 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전화기 너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악어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요. 그 목소리도 오랜만에 들어 보고.

노인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확실한 것은 차논과 대화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촌장이라고 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었군. 아직 살아 있다니 명이 길어.”

야닌이 말했다.

-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래. 그 나이쯤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고 보니 네놈 넷째 딸년이 나랑 비슷한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결혼은 시켰나?”

야닌이 물었다.

다시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시는군요. 본론으로 넘어가시지요.

잠시의 침묵 후에 노인이 말했다.

“결혼 시켰냐고 물었다.”

야닌이 말했다.

-……시집보냈습니다.

“그래. 그렇군. 신솟도 많이 받았겠지. 얼마였지?”

야닌이 신솟(สินสอด:결혼할 때, 신랑 측에서 신부 부모에게 지급하는 지참금)에 관해 물었다. 민감한 질문이었다. 아는 사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백만을 받았습니다.

“푼돈이군. 사위는 뭐 하는 집안이지?”

야닌이 말했다. 1백만 바트, 미화로 환산하면 4만 달러가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끄렁떠이의 지배자 소리를 듣는 이 자에게는 그리 많은 돈이 아니었다. 그의 예쁘장안 막내딸이 고작 1백만 바트의 지참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신랑 측 집안이 제대로 된 신속을 지불할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촌장이 양보할 정도로 힘이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였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

“대답해.”

야닌이 말했다.

-……경찰입니다.

“재미있군. 빈민가에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의 막내딸이 경찰의 아들과 결혼했다. 아주 재미있어. 드라마로 만들어도 아주 괜찮을 것 같아. 네 딸년, 얼굴이 곱상했더랬지. 애도 있겠군. 손녀가 있나? 손녀도 역시 예쁘장하겠지?”

-…….

“그래.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언제 날 죽이러 올 거지? 그 전에 움직이고 싶은데. 네놈의 사돈은 참 안 되었군. 아들이 결혼을 잘못하는 바람에 집안이 박살이 날 테니. 예쁘장한 손녀도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군. 짜오프라야강의 물고기 밥이 될 테니까. 어쩌겠어. 다 할아버지를 잘못 둔 죄지. 옛정을 생각해서 머리는 남겨 두도록 하지. 손녀가 보고 싶을 때 사진보다는 실물이 더 좋지 않겠어?”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인들의 위치, 의뢰인을 만났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래.”

-이 번호로 전화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다리시는 것을 싫어하시죠.

“아직 치매는 안 걸렸군.”

-아침에 전화드리겠습니다. 9시 괜찮으십니까.

“늦어.”

-……최대한 빨리 전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그런 야닌을 차논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촌장이라고 불리는 노인은 20년 넘게 끄렁떠이를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지역의 경찰청장도 노인의 눈치를 볼 정도로 그 세가 적지 않았다.

그런 촌장을 야닌이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알고 있는 것을 넘어 촌장을 마치 길거리의 양아치처럼 휘두르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야닌이 물었다.

멍한 표정으로 야닌을 바라보던 차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정했고,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그 의뢰비로 받, 받은, 고, 고, 골드바.”

그러나 차논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야닌이 몸을 일으켰다. 차논의 시선이 몸을 일으키는 야닌을 따라 위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경멸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몸을 일으킨 야닌은 몸을 돌렸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몇 개?”

야닌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차논에게 물었다.

“네?”

“골드바. 몇 개 받았는데?”

“두, 두, 두 개입니다.”

차논이 말했다.

“다행이군.”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그도 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노잣돈이 그렇게 풍부하니 저승 가는 길이 편안하겠어.”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

“말씀이 맞군요.”

차논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온 제이크가 야닌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뭐가?”

“길거리에 싸 놓은 똥 같다고 하셨죠. 퇴비로도 못 쓰겠는데요, 저 정도면.”

야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NIA가 저런 쓰레기를 요원으로 뽑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디 한 서너 달 가둬 놨다가 풀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분수를 알게 되면 다시는 이쪽에 얼씬거리지도 않겠죠.”

제이크가 말했다.

“잠복조는?”

야닌은 주제를 바꿨다. 북한인들을 감시할 잠복조가 준비되었는지를 물었다.

“대기 중입니다. 언제든 투입 가능합니다.”

제이크가 말했고 야닌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는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반보 뒤에서 야닌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터미널21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를 놓친 후, 그녀는 상부에 보고했다. 정식 작전으로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제이크는 1급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새로 작전을 시작하는 것은 득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제이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부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작전에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몇 차례 요청이 반려된 후에야 제이크가 이번 작전을 총괄하는 것으로 승인이 떨어졌다.

그사이에 며칠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고, 그 며칠의 시간 동안 야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바심을 느꼈고, 조바심이 그녀의 걸음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 늙은 놈이 전화해 올까요?”

제이크가 물었다.

“해 올 거야. 손녀의 잘린 머리를 보고 싶지는 않을 테니.”

“위치만 확보되면 바로 잠복조를 투입하겠습니다.”

제이크가 안심하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부탁해.”

야닌이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이번 일 제가 책임자입니다.”

제이크가 말했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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