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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63화 (263/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5) >

22시간 30분 만에 다시 숙소로 돌아온 곽용신은 제일 먼저 옷을 벗어 던지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땀에 절어 있는 옷을 입은 지금 상태 이대로 침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대로 12시간은 미동도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땀에 절어 소금기가 묻어난 옷을 벗어 던지고, 차가운 물로 피부에 묻어 있는 찝찝함을 털어 내자, 육체적 피로는 조금이나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다 닦아 내지도 않고, 하반신에 적당히 수건만 걸친 채로 곽용신은 침대 가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53분이었다.

태국보다 2시간 빠른 한국은 새벽 6시 53분이라는 이야기였다.

곽용신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로 잠시 고민했다. 지금 전화를 할까? 아니면 나중에 전화할까?

아침 7시. 상사에게 전화하기에 그리 적합한 시간은 아니었다.

곽용신은 상사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조금 더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기분을 맞출 수 있었다면 태국이 아니라 내곡동 본부에 그의 책상이 있었을 것이다.

“젠장. 인도에 계속 있을 것을 그랬어.”

곽용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전화기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막 전화번호부 탐색 버튼을 누르려던 그 타이밍에 맞춰 전화기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김형원 사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 양반…… 진짜 귀신인가?”

곽용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으로 눌렀다.

-통화 괜찮나?

김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곽용신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김형원 사장이 회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찍 출근한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

곽용신의 생각처럼 김형원은 회사에 있었고, 일찍 출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20시간 넘게 회사에 남아 있었었을 뿐이었다.

23시간째 깨어 있는 곽용신은 20시간째 회사에 있는 김형원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파타야를 탐색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런 상황에서 김승섭이 아이디어를 냈다.

모용진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흘려, 모용진을 보호하고 있는 세력에게서 반응을 끌어낸다.

그런 내용이었다.

“몇 시간 후에 문서로 작성된 계획서가 나오면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할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조금은 변동 사항이 생길 수도 있지만, 큰 그림에서는 지금 보고한 내용과 크게 차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10여 분 동안 이어진 곽용신의 보고가 끝이 났다.

보고가 끝났음에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끊어졌나?

곽용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고, 화면을 확인했다. 연결 중이라는 시그널이 화면에 떠 있었다.

이 양반 자나?

곽용신이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가는 순간 김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김형원의 대답이었다.

곽용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상사라는 종족은 만족하는 법이 없다. 아무리 완벽한 보고서를 가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일단 던지고 보는 종족들이 상사라는 종족이었다.

상사가 백 퍼센트 만족하는 계획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할 수는 없었다.

“변수를 줘서 상황을 흔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으리라고 판단됩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뭐 좋은 생각 있으시면 사장님이 말씀해보시든지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김형원의 말에 곽용신의 눈이 커졌다.

-너무 위험해.

위험하다. 몇 시간 전 홍성민이 했던 말이었다.

홍성민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홍성민과 곽용신, 김승섭의 관계는 단순한 국정원 동료,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나 김형원은 상사였고, 부하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상사의 일이었다. 특히 국정원에서는 더욱 그랬다.

곽용신은 상사인 김형원에서 홍성민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통제 가능합니다.”

-일단 대기하지. 지원 방법에 대해서 본사와 이야기해야겠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리하지 않도록 진행하겠습니다.”

곽용신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는 위험할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고, 부하는 괜찮다고 하겠다고 말한다. 서로 상대의 관점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국정원 요원이 되고 이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반대라면 많이 있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다. 곽용신은 그 침묵이 어쩐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곽용신이 다시 말했다.

-일단 대기. 전화를 주지. 그때까지 움직이지 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도 말고.

김형원이 선을 그었다.

“……알겠습니다.”

곽용신은 미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지금 거기에 누가 있지?

“홍성민이 있습니다.”

-친분이 있나?

“믿을 만한 녀석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아니야. 일단 대기하도록.

김형원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곽용신은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고, 잠시 바라보았다.

***

전화를 끊은 김형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면서 곽용신이 해 준 이야기를 다시 정리했다.

곽용신은 자신을 미끼로 내걸 생각이었다. 모용진을 낚겠다기보다 모용진을 보호하는 조직을 낚겠다는 의도였다.

이해는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 중 하나라는 것에도 김형원은 동의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지금 태국에서 진행되는 작전은 국정원 공식 작전이 아니었다. 태청무역에서, 정확히는 정보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비공식 작전이었다.

이번 작전은 비공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전직 1급의 배신이라는 사안은 국정원 원장인 김훈에게는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김훈 원장보다 더 윗선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정치 역학적인 과점에서 이번 작전은 비공식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태국에 가 있는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지원도 못 받는 상황에서 일을 해결하겠다고 자신들을 미끼로 내걸겠다는 이야기다.

“젠장할.”

김형원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설을 내뱉으며, 책상 위에 던져진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흐릿한 담배 연기 사이로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침이 숫자 8에 거의 접근해 있었다.

김형원은 피곤을 느꼈다. 잠깐씩 토막 잠을 자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토막 잠이 피로를 더욱 가중했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몸과 마음을 잠식하는 피로가 잠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김형원은 알고 있었다.

김형원은 잠시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부를 스크롤해서 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수출입 4과장. 한규호의 번호였다. 김형원은 그 번호를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규호는 국정원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태국에서의 작전은 온전히 국정원 내부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국정원 내부의 일을 한규호에게 의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국정원 원장이자 정보위원회 위원장인 김훈은 이번 일에 한규호가 관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김훈이 허락한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한규호가 받아들여야 했다.

한규호는 태청무역을 통해 의뢰를 받았고, 의뢰가 끝나면 다음 의뢰가 들어오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작전과 작전의 시간 동안 한규호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태청무역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할 수 없었다. 한규호는 태청무역과 수평적인 관계였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다.

물론 김형원과 한규호가 단순하게 업무적으로 엮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가 독립 요원이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 업무적인 관계,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관계를 위해서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김형원은 한동안 한규호의 전화번호를 바라보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번호부를 다시 스크롤했다.

그리고 유만호의 이름을 찾아 번호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쩐 일입니까, 아침부터?

유만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어디긴. 회사 가지.

“잠깐 보자. 할 말이 있다.”

김형원이 말했다.

***

대한장비협회 상근 부회장이자 국정원 2급 요원인 유만호는 석촌역 3번 출구 계단을 올라가면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회사를 가기 위해 석촌역에서 지하철을 탄 게 40분 전이었다.

잠실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건대입구에 와서야 겨우 자리가 났다.

이제 편히 가겠구나 하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김형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할 말이 있다고 다시 석촌역으로 오라고 했다.

“젠장, 누가 상사야.”

유만호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송파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갔다.

약 1백여 미터를 걸어가 송파1동 주민센터 맞은편에 있는 맥도날드 석촌역점으로 들어간 유만호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고향 선배를 확인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침부터 뭔 난리요.”

유만호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김형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형원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커피 두 잔 중 한 잔을 그에게 쓱 하고 밀었다.

“사람이 필요해.”

김형원이 말했다.

“사람 필요하면 인력 사무소를 가셔야지.”

김형원이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태국.”

김형원이 말했다.

태국이라는 말에 유만호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유만호는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간 다음 한 모금 홀짝였다.

“어쩌시려고?”

김형원은 곽용신이 몇 시간 전에 전해 준 태국 상황을 유만호에게 전달해 주었다.

보안 설비가 완비된 국정원 지하 회의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맥도날드 석촌역점 한구석에서 흘러나왔다.

유만호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아무 말 없이 김형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만호의 커피가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김형원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이야기를 다 듣고서도 유만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빈속에 커피 마시면 속 쓰린데.”

침묵 후의 유만호의 첫 마디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위의 생각. 일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죠.”

유만호가 말했다.

김형원은 유만호가 말하는 ‘위’가 김훈 원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 둘을 데려오는 거라면 어떻게 이야기라도 해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이상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은 불가능할 거요.”

“그러면 복귀시켜.”

김형원이 바로 말했다.

유만호는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고향 선배이자, 국정원 선배. 하지만 직급은 그보다 낮은 김형원의 고지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지.

유만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상황에서 유만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이야기해 봅시다. 기다려 봐요.”

“시간이 없어.”

김형원이 유만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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