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60화 (260/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2) >

워킹 스트리트(Walking Street).

파타야(Pattya), 태국.

태양은 수평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구 대기에 둔각으로 비산된 가시광선은 수면은 물론,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요트들까지 전부 황금빛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파타야 거주민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었지만, 관광객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몇 관광객들은 아예 해변에 자리를 잡고,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품에 솔직한 감탄을 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변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에 곽용신이 있었다.

곽용신과 김승섭은 파타야의 대형 쇼핑몰 센트럴 페스티벌, 현지인들은 줄여서 센탄이라고 부르는 쇼핑몰 앞 백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용신 시선의 방향도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를 향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석양에 대한 감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그 망할 놈의 모용진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홍성민이 그랬다. 모용진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곽용신도 알았다.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다고 못 찾겠구나 하면서 손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식하게 발품을 팔면서 모용진이 갈 만한 곳들을 빠짐없이 돌아다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일어나 썽태우(트럭을 개조해 만든 버스)를 타고 나끌루아로 가서 수산 시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시장을 둘러보고, 해변을 둘러보고,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콘도 단지와 현지인들이 이용한다는 사창가, 그리고 파타야에 유일하게 실내 스쿼시 코트를 가진 스포츠 클럽을 돌아보았지만, 소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중간중간 햄버거와 콜라로 칼로리와 당을 채우면서, 그렇게 온종일 파타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석양이 질 때쯤 이곳, 센탄 앞 해변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람도 없다. 정보도 없다. 하물며 지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용진을 찾아내는 것은, 아니, 찾아내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모용진이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곽용신은 신조를 지니고 있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때려치울 수가 없었다.

경인이었다. 그것도 전직 1급, 해외정보실장이 연관된 경인이었다.

곽용신은 황금빛에서 검붉은 빛으로 변해 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토해 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곽용신은 하루 종일 고민하고 또 고민한 계획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때 김승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곽용신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승섭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김승섭의 얼굴이 보였다. 지긋이 정면을 향한 눈, 굳게 다문 입술. 오랜만에 보는 후배의 진지한 얼굴이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습니다.”

곽용신은 김승섭의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는 진한 피로의 향기를 맡았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을 안 하는 김승섭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국정원 요원이었다. 국정원 1급이 관련된 경인이 가지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곽용신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참, 힘드네요.”

김승섭이 말했다. 곽용신은 후배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떤 말을 해 주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했다. 평소 같았다면 뒤통수라도 때리면서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질책했을 터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위로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곽용신은 시선을 수평선으로 향했다.

저 석양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은 아니지.”

곽용신이 말했다.

“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거야.”

곽용신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김승섭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몇 번이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실제로 포기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래. 포기했던 것 중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몇 개나 되었을까? 내가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도망치기 위해서 그렇게 믿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강요한 것은 아닐까?”

곽용신도 고개를 돌려 김승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가능이란 생각, 안 들 수가 없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잖냐.”

김승섭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답을 원하는 김승섭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 들 수 있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번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 예전에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진짜로 불가능했는지, 그 생각을 이겨 냈다면 어떻게 이겨 냈는지.”

“진짜로 불가능했는지, 어떻게 이겨 냈는지…….”

김승섭은 곽용신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김승섭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녀석은 아니야.”

저 석양 때문이야.

낮간지러운 소리를 했다고 생각한 곽용신은 엄한 석양을 탓했다.

김승섭의 시선이 다시 수평선을 향했다. 곽용신은 굳게 다문 입술이 유난히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쉽게 포기하는 녀석은 아니다…….”

김승섭이 말했다.

“그래. 내가 아는 한 그런 녀석은 아니지.”

곽용신이 말했다.

“쉽게 포기하는 녀석은…….”

김승섭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는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실제로 불가능한지 아닌지는 해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곽용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죽을 때까지 배움에는 끝이 없고, 꿈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늦고 빠르고가 없고!”

석양을 반사한 김승섭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 결의라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곽용신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응?”

“아무리 태국어가 어렵다고 해도, 씨바, 사람이 쓰는 말인데. 끊임없이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복할 수 있겠죠. 형님 말이 맞습니다. 포기하면 그 순간 끝이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김승섭이 말했다.

“태국어?”

“네. 요즘 계속 고민 중이었다니까요. 태국어 이거 장난 아니에요. 유튜브 보면서 좀 공부해 봤는데, 자음이 마흔네 개, 모음이 기본 스물한 개에 조합에 따라서 성조가 바뀌는데 그게 엄청 골 때리더라구요. 발음도 뭐 입에서 공기 뿜어내는 정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나 어쩐다나. 뭐 공기 반 소리 반도 아니고. 참말로.”

“……태국어?”

“그리고 문자는 진짜 더 장난 아니라니까요. 아니. 지랄맞기는 문자가 더 지랄 맞지. 뭐냐, 그 유튜브에서 언어 분석 하는 놈이 그러는데, 태국어 공부할 때 문자 먼저 외우려고 하지 말래요. 우선 발음부터 익히면서 문자를 자연스럽게 배워야지, 처음부터 문자 전부 다 외우려고 하는 거 삽질이래요. 왜 한국어 배울 때는 우선 기역니은부터 다 배우고 시작하잖아요. 근데 태국어는 그러면 안 된다네. 하지만 외우고 또 외우면 그거 못 외우겠습니까. 저는 쉽게 포기하는 녀석이 아니니까요.”

김승섭이 곽용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곽용신은 다시 시선을 수평선으로 돌렸다.

바다는 완전히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핏빛.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타야 앞 바다는 검붉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저 석양 때문인가.

핏빛 바다를 바라본 곽용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는 슬리퍼를 살포시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김승섭의 옆구리에 혼신의 돌려차기를 꽂아 넣었다.

***

해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자, 곽용신과 김승섭은 어김없이 워킹 스트리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곽용신은 다시 이곳으로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국정원 태국 지부 요원 홍성민과 만나기로 한 장소가 이곳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한 사람은 홍성민이었다. 정확히는 홍성민과 김승섭이었다.

곽용신은 파타야에 온 첫날 윈드밀 아고고에서 홍성민을 만난 후, 다음 약속 장소는 자신이 정하겠다고 주장했다. 워킹 스트리트의 유흥업소는 생각하고 논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곽용신 주장의 근거였다.

그러나 홍성민과 김승섭이 강하게 반발했다.

모용진이 파타야에 남아 있다고 가정할 때, 밤 시간대에 우연히 만나기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워킹 스트리트만 한 곳이 없다는 것이 김승섭의 논리였고, 홍성민이 그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과반수 원칙에 따라 약속 장소는 다시 워킹 스트리트로 정해졌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워킹 스트리트를 걸어가던 곽용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김승섭은 돌려차기를 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서도 손목을 잡아끄는 프로모션 걸들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승섭이 모용진을 잡겠다는 의도로 워킹 스트리트를 고집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곽용신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업보다. 다 내 업보다.

물론 다수결에서 밀렸다고 곽용신이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워킹 스트리트를 약속 장소로 하되 조건을 하나 내 걸었다. 욕조가 없고 알몸의 댄서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성 상품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윈드밀처럼 하드코어한 장소는 생각하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 곽용신의 주장이었다. 물론 김승섭의 얼굴을 가득 채운 미소도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용신이 형 은근히 순수하시다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소오프트한 곳으로.

홍성민의 대답이었고, 그가 지정한 곳이 ‘바카라 아고고’였다.

워킹 스트리트 입구에서 중심거리를 따라 1백여 미터 걸어가자 바카라 아고고의 간판이 보였다.

입구에 도착한 곽용신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천천히 아고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튼이 열리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파동의 형태로 곽용신을 덮쳐 왔다. 시작은 윈드밀과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욕조가 없었고, 알몸의 무희도 없었다. 알몸의 무희를 희롱하는 늙은 백인도 없었고, 조명도 훨씬 밝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곽용신은 천천히 안으로 발을 옮겼다.

손님의 인종구성도 달랐다. 서양인들, 특히 나이 많은 서양인들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윈드밀과 달리, 바카라 아고고는 동양인, 특히 북방 몽골계의 얼굴을 한 동아시아 남자들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맥주 한 병씩을 손에 들고, 매의 눈으로 여자들을 흩어보고 있었다.

같은 동양인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으니 이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곽용신은 생각했다.

곽용신이 들어가자 웨이터가 다가왔고, 곽용신과 김승섭, 두 사람을 스테이지 바로 옆에 소파로 안내했다.

무대에서 춤추는 댄서들과 너무 가까워 곽용신은 그 자리를 거절하려 했지만, 눈치를 챈 김승섭이 얼른 소파에 앉아버렸다.

곽용신은 그런 김승섭을 잠시 노려보다 한숨을 쉬고 그 옆에 앉았다.

고개를 들자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은 댄서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적어도 나체는 아니었기에 곽용신은 조금 덜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맥주를 주문하고, 이제 홍성민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발견한 것은 김승섭이였다.

“와······.”

김승섭의 감탄이 곽용신의 귀에 들려왔다.

곽용신은 김승섭을 돌아보았고, 그의 시선이 위쪽, 천장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곽용신의 시선도 위로 향했다.

그리고 곽용신도 ‘그것’을 보았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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