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57화 (257/386)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9) >

NIA 본부에서 살아 돌아온 차논은 야닌의 지시를 정확하게 이행했다.

자신의 아지트, T DET69의 내실로 돌아온 차논은 단 한 발자국도 아지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야닌의 말처럼 쥐구멍의 쥐새끼처럼 겁에 질린 채로 NIA를 찾아간 자신이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돈도 확보하고, 위험도 분산하기 위해 NIA를 찾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의뢰를 받기 전으로, 그 남자를 만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해도 의뢰를 거절할 수는 있었다. 미리 받은 의뢰 접수비와 NIA 본부에 두고 나온 골드바 가치만큼의 돈과 계약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의뢰를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야닌은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지시했고, 차논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남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차논은 제발 의뢰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2일을 보냈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찾아 왔고, 의뢰인도 찾아 왔다.

이틀 만에 아지트에서 나온 차논은 의뢰인을 처음 만났을 때 앉았던 자리로 안내했다.

5일 전과 같았다. 의뢰인은 5일 전과 같은 옷을 입고, 5일 전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차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의뢰인을 바라보는 차논의 마음이었다.

5일 전 차논은 많은 의뢰 접수비를 지불한 의뢰인이 호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외뢰인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역신(疫神)처럼 느껴졌다.

차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북한 출신 해결사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는 쪽지를 넘겨주었다.

정체불명의 의뢰인은 쪽지를 집어 펴 들었다. 쪽지에는 084로 시작하는 열 자리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의뢰인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든 다음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 후에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간 후 통화가 연결되기까지 잠시 기다렸다.

차논은 최대한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역신이 얼른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축객령을 내리지 못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통화가 연결되었는지 의뢰인은 통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논은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논이 처음 들어 본 언어였다. 하지만 그 언어가 한국어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는 있었다.

통화가 끝났는지 의뢰인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열고, 전화기를 넣고, 약속한 골드바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차논은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려지는 골드바를 보면서도 5일 전에 느꼈던 욕망을 되살리지 못했다. 욕망이 생기기는커녕, 역신이 가져온 역병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골드바를 올려놓은 의뢰인은 차논을 바라보았다. 차논은 5일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이 심연을 더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소?”

의뢰인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차논이 예상해 놓은 질문이었다.

“없습니다.”

차논이 답했다. 준비된 답이었기에 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차논의 대답을 들은 의뢰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다음, 마치 정해진 대본에 따라 행동하는 연기차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작별 인사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의뢰인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차논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몸 내부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아고고를 전부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차논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런 차논을 방해하듯,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가 있는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논은 번호를 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본능에 따라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인가?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

-대기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마.

차논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차논은 통화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전화기를 귀 옆에 대고 있었다.

그의 심장박동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

T DET69를 나온 남자, 차논의 의뢰인은 5일 전과 마찬가지로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고 아속에 있는 터미널21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 기사는 방콕 택시 기사답지 않게 아무 말 없이 미터를 켜고는, 소이 인터마라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을 한 다음 최단거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5일 전과 마찬가지로 길이 막혔고, 5일 전과 마찬가지로 택시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전승 기념탑 앞 회전 교차로를 빠져나오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날은 사고가 없다는 것이었다.

뒷좌석의 앉은 남자는 사고가 없음에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5일 전과는 달리 미행한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서 따라오는 오토바이는 보이질 않았다. 다른 차들도 미행자라고 확신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시야에 들어온 차량의 번호와 특징을 전부 기억해 두었다. 10분 후에, 택시가 스쿰빗로에서 좌회전을 할 때 다시 확인할 생각이었다.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미행자가 없다고 안심할 정도로 남자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남자는 조금 전 차논의 모습을 떠올렸다. 표면적으로, 차논의 모습은 5일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차논에게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5일 전의 차논이라면 쪽지를 넘기기 전에 그 연락처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위험했는지, 얼마나 큰 비용이 들어갔는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인 비용이 얼마가 더 필요한지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골드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 차논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 욕망을 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다고 느껴졌다.

알아야 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했다. 대답을 미리 준비라도 했는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남자는 차논이 거짓말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변수. 무언가 변수가 생겼다. 그리고 그 변수가 차논에게 공포를 안겨 주었다.

무엇일까? 북한 쪽 애들에게 장난질을 쳤을까? 다른 곳에 정보를 흘렸을까? NIA가 개입했을까?

다양한 가설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상관없겠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논이 무엇을 했든, 어떤 것이 준비되어 있든, 어떤 변수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AT21 확인. 지시 바람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찰리 AT21 대기 중. 지시 바람.

무전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NIA 본부 지하 임시 상황실에서 무전을 듣고 있던 제이크는 통신을 담당하는 상황 요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브라보는 그대로 2선으로 이탈. 찰리는 인계하고. 델타는 준비.”

상황 요원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체불명의 남자를 미행하던 브라보 요원은 현장에서 이탈하고, 찰리 요원이 미행을 인계, 그리고 또 다른 미행 팀인 델타 요원이 추후 상황 인계를 위해 AT21, 아속역에 있는 터미널21 쇼핑몰로 향하라는 지시였다.

상황 요원을 바라보던 제이크는 시선을 상황실 모니터로 돌렸다.

모니터에는 터미널21을 비추고 있는 보안 감시용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터미널21 남측 입구를 비추는 1080p FHD 영상은 평일 오후임에도 쇼핑몰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을 깨끗한 화질로 보여 주고 있었다.

다행이군.

영상을 바라보는 제이크의 생각이었다.

2015년 방콕 도심 폭탄 테러 발생 이후, 태국 정부는 방콕 도심에 설치된 CCTV 설비 개선 사업을 진행했다. 기존의 저화질 CCTV를 고화질 디지털 영상으로 전환하는 사업이었는데, 방콕에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아속역은 1차 전환 대상지에 들어가 있었고, 덕분에 제이크는 깔끔한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목표가 탑승한 택시가 터미널21 입구로 들어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쇼핑몰 택시 하차지에 들어선 택시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크는 영상을 확대하고 싶었다. 남자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하게 보고 싶었다.

그러나 CCTV 관제 권한을 확보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NIA가 관제 권한을 얻고자 했다면 태국 경찰청이 가지고 있는 관제 권한쯤 얻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직속상관인 야닌이 1급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크게 득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이번 비공식 작전에 동원된 현장 요원이 고작 네 명에 불과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비공식이라고 해도 작전치고는 아주 초라한 규모였다.

택시에서 내린 남자가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쇼핑몰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찰리, 진입합니다.

무전이 흘러나왔고, 세 번째 현장 요원이 그를 따라 쇼핑몰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까지 지켜본 제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그가 더 할 일은 없었다.

임시 상황실을 나온 제이크는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야닌을 찾아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정체불명 남자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도는 확인한 후에야 야닌에게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크는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처음부터 이번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청한 짓을 하다 회사에서 쫓겨난 멍청이의 주장처럼 테러와 관련된 사안이라고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방콕에 있는 북한인들은 슬럼가의 캄보디아 갱단보다도 세력이 약했다.

북한인들은 지원받을 배경도 없었고, 돌아갈 조국도 없었다. 그저 이곳에서 최대한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방법뿐이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뛰어난 군인 출신이라고 해도, 대도시에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전투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지만, NIA가 손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고, 큰 위협이 될 가능성도 적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귀찮은 일거리만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북송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보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누군가 북한인을 찾는다고?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한국의 국정원, 미국의 CIA, 일본의 나이쵸 같은 정보기관은 물론, 특종을 노리는 언론사,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도 북한인들을 찾아다닌다. 혹시 돈이 될까 싶어 밀입국 브로커들도 북한인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NGO 단체도 북한인들을 찾아다녔다.

NIA에서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제이크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이크가 알면 그의 상관인 야닌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야닌은 이번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가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트라이앵글 작전의 후유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야닌의 경력에서 첫 번째 흠집을 낸 남자,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의 잔상이 집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야닌이었다면, 그녀는 절대로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1급 승진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

제이크가 임시 상황실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그가 사무실로 돌아온 지 30분도 안 지난 시점이었다.

상황이 변했다는 연락을 받고 빠르게 지하의 임시 상황실로 간 제이크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황 요원의 얼굴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목표를 놓쳤습니다.”

상황 요원의 보고였다.

“놓쳤다고? 어디서?”

“5층 피어21(Pier 21)이 마지막 장소입니다.”

피어21은 쇼핑몰 5층에 있는 대형 푸드 코트였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쇼핑몰에서도 유독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해도, 훈련받은 요원들이 그렇게 쉽게 놓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찰리는?”

마지막으로 목표를 미행한 요원이 찰리였다.

“현재 복귀 중입니다. 델타는 영상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상황 요원의 보고였다.

제이크는 신음을 삼켰다.

일단 현장 요원이 돌아와 봐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야닌의 번호를 찾은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9)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