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7) >
3일 후
소이 인타마라(Soi Inthamara).
방콕, 태국.
차논은 언제나처럼 T DET69 아지트에 있었다.
그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 그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차논은 손에 든 휴대전화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생각을 집중할 때 그만의 습관이었다. 이런 행동을 하다가 이미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떨어트렸기에 그의 휴대전화에는 네 귀퉁이에서 시작된 거미줄 같은 금이 자글자글 나 있었지만, 어차피 3개월마다 버려지는 전화기이기에 차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차논은 휴대전화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며칠 전 그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의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쏨차이에게 미행을 시켰다. 쏨차이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아속에 위치한 터미널21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그랜드센터포인트호텔에 투숙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차논은 부하들의 보고를 전부 믿지 않았다. 특히 미행을 시켰던 쏨차이는 더욱 믿지 않았다.
쏨차이가 돈만 밝혔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쏨차이는 최근 이쪽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씩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도 쏨차이의 보고를 들은 차논은 사람들을 풀어 그랜드센터포인트호텔과 아속역 인근을 감시하게 시켰고, 예상대로 정체불명의 의뢰인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의뢰인이 몸을 감춘 것과는 별개로, 차논은 북한 출신 해결사들은 이미 확보해 놓고 있었다. 막상 찾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쉽게 찾아냈고, 생각보다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만약 차논이 정체불명의 의뢰인과 북한인들 사이에서 일을 중계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의뢰인이 원한 것은 그저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뿐이었다. 차 논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어찌 되었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틀을 기다렸다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연락이 오면 확보해 놓은 연락처를 전달하는 것으로 차논의 일은 끝이 난다.
숙제를 미리 해 놓았다고 해도 차논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이대로 연락처를 남겨 줘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왜 북한 해결사들을 원하는지,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려고 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연락처를 알려 주기가 어쩐지 찝찝했다.
그렇다고 알려 주지 않기에 그가 제시한 금액이 컸다.
차논은 사무실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골드바를 바라보았다. UBS 은행의 로고와 일련번호가 찍혀 있는 1kg짜리 골드바. 하나에 미화 5만 달러의 가치가 농축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차논은 다시 골드바에서 눈을 떼고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돈은 죄가 없지.”
NIA를 나온 차논은 더 조국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요원이 아니었다. 사업자가 된 그에게 최고의 가치는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차논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휴대전화가 멈추었다.
이익은 극대화한다. 동시에 리스크는 줄인다.
어떻게?
차논은 손에서 돌리던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는 손을 뻗어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다음 깊게 빨아들였다.
“역시 이럴 땐 친정뿐이지.”
차논의 입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말이 흘러나왔다.
***
방콕 동부 외곽 후아막에 위치한 람캄행대학교(มหาวิทยาลัยรามคำแหง)는 태국에서 가장 많은 등록 학생 수를 가진 선발제 대학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태국 정부는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보유한 모든 태국 국민에게 대학 수업을 제공하는 공개 대학 제도를 1971년 시행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번째 공개 대학에 태국 문자를 만든 람캉행 왕의 이름을 붙였다.
한때 태국 전체 대학생 인원의 80%를 차지하기도 했던 람캉행 대학교는 1978년 공개 대학에서 선발제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태국에서 가장 많은 재학생을 보유한 대학교였다.
매년 10만 명의 신입생이 입학하고, 38만 명의 학생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5천 명이 넘는 교원들이 수업하고 있었다.
그 5천 명 중의 교원 중 하나가 위셋께우(วิเศษแก้ว)였다.
치앙마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위셋께우는 지난해부터 람캉행 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람캉행 대학교의 조교수는 다른 대학교의 교수들과는 조금 달랐다.
람캉행대학교는 물론 한국의 방송통신대학처럼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수업을 진행했고, 직접 교실로 찾아가 학생들을 대면하는 수업은 격주 목요일, 월 2회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위셋께우가 바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프라인 수업이 월 2회라고는 해도,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거기에 매주 인터넷으로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일을 해야 했다. 정치학과 대학원 수업도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스터디 그룹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도 위셋께우의 일이었다.
사실 스터디 그룹을 관리하는 일, 정확히 스터디 그룹을 감시하고 동향을 분석해 보고하는 일이 위셋께우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위셋께우는 람캉행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이면서 동시에 태국국가정보부(NIA) 요원이었으니까.
1976년 발생한 탐마삿대학교 사건 이후 태국 정부는 대학생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NIA는 대학교에 요원들을 심어 놓았다.
탐마삿 대학 총격 사건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전국 모든 대학, 모든 학과에 요원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소득 수준이 낮고, 불만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람캉행대학교에는 여전히 NIA 요원을 심어 놓고 있었다.
위셋께우의 임무는 람캉행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스터디 그룹을 관리하고, 불온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이었다.
위셋께우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하고 있었다.
리포트를 읽어 가는 위셋께우의 인상을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람캉행이라고 해도 명색이 대학생들인데, 리포트라고 제출한 과제의 수준이 처참했다. 그의 기준으로 본다면 F도 아까운 수준이었다.
처참하기는 그가 관리하는 스터디 그룹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이라는 놈들은 그저 돈밖에 관심이 없었다. 명색이 정치학과 학생인데, 그저 주식이 얼마나 오를지, 어디에 땅을 사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려면 어떤 언어가 경쟁력이 있는지에만 관심 가지고 있었다. 투표를 안 하는 것은 당연하고, 위에서 누가 무엇을 하든 당장 주머니만 걱정하는 바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보들이 태국의 미래였다.
리포트를 채점하면서 이런 바보들이 무섭다고 감시하고 있는 자신이 더 한심하다고 한숨을 내쉬던 위셋께우는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전화기가 진동했다.
위셋께우는 전화기를 가져와 화면 위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라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치학과에는 2만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이, 캐액(แขก). 오랜만이야.
전화 너머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셋께우의 몸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를 위셋께우 교수님이라고 불렀고, NIA 동료들은 그를 코드명인 버블로 불렀다. 캐액(แขก)은 그의 닉네임이었다.
태국인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식 서류에 사용하는 풀 네임과 지인들끼리 사용하는 닉네임이 그것이다.
태국인의 닉네임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닉네임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닉네임 또한 부모가 지어 준다는 것이었다.
위셋께우의 부모님이 지어 주신 닉네임이 캐액이었다. 손님이라는 의미였다.
위셋께우를 캐액이라고 부를 만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모두 휴대전화에 등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등록되지 않는 누군가가 그의 닉네임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
위셋께우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내 목소리 벌써 잊어버린 거야?
전화기 너머에서 섭섭하다는 뉘앙스에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지?”
위셋께우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물었다.
-섭섭한데. 나 차논이야.
“차논?”
-그래. 잘 지냈지?
위셋께우는 차논이라는 이름에서 섹션3, 치앙마이에서 근무할 때, 같이 일하던 동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와 차논은 서로 전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위셋께우는 차논을 싫어했고, 차논도 위셋께우를 싫어했다.
차논이 무언가 사고를 쳤고, 그래서 옷을 벗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위셋께우는 동료들을 모아 술을 살 정도로 위셋께우는 차논을 싫어했다.
그런 차논이 전화를 했다?
위셋께우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용건은?”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데 너무하는 거 아냐? 여전히 차갑고, 여전히 싸가지…….
“마지막으로 묻지. 용건은?”
위셋께우가 차논의 말을 끊었다.
람캉행 대학교에 처박혀 있기는 했지만, 위셋께우는 여전히 NIA 요원이었고, 차논은 민간인, 그것도 불법적인 영역에 한 발을 걸친 민간인이었다. 다시 말해 위셋께우가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다는 이야기였다.
-참 나, 까칠하기는. 그나저나 크라쓰이(กระสือ)가 방콕에 있다며?
차논이 물었다.
“무슨 개소리야?”
위셋께우가 말했다.
-왜 그래, 다 아는 사이에. 장난치지 말고.
“너와 내가 장난할 사이인가?”
위셋께우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뒷골목의 양아치 주제에 감히 NIA 요원에게.
그런 의미를 담은 낮은 목소리였다.
-정보가 있어.
“정보?”
-그래, 크라쓰이가 좋아할 만한 정보.
“나에게 말해.”
-이거 봐, 캐액.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
“경고한다. 그렇게 부르지 마.”
위셋께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놈들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 애초에 조금 어울려 주면 머리끝까지 올라서려고 하니까. 특히나 차논 이놈은 머리에 올라서는 것은 물론 멱을 따 가려고 할 놈이다.
-내가 직접 연락을 못 할 것 같아?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서 나오는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게 위셋께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라고?”
-내가 그 아줌마 전화번호를 못 알아내서 전화한 것 같아? 내가 직접 전화를 못 할 것 같아서 도와 달라고 너에게 전화한 것 같아?
“…….”
-이봐, 캐액. 그래. 뭐라고 불러 줄까? 아직도 예전 이름을 쓰고 있나? 버블? 좋아요, 버블 요원님. 쉽게 쉽게 가자고. 그래도 말이야. 응? 옛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내가 자네에게 전화를 준 거야. 자네와 내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정보도 주고받고 한다고 하면 위에서 자네를 좋게 보지 않겠어?
차논이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개소리로군.”
위셋께우가 말했다.
차논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우선순위 가장 높은 곳에 두는 놈이었다. 위셋께우가 아는 사람 중에 욕망에 충실한 개새끼를 세 명 뽑으라면 그중의 한 명은 무조건 차논이였다.
-자, 칭찬받아야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알려 주라고.
“할머니(ยาย).”
-응?
“조만간 할머니가 될 거야.”
-히야, 잘나가시네. 역시 귀신 중의 귀신은 처녀 귀신이지.
“그 말은 꼭 전해 주지. 정보의 등급은?”
-에이, 그러지 말라고. 등급은 T라고 하고 싶지만. 뭐, 아직은 그냥 S라고 해 둘까?
T라는 이니셜을 들은 위셋께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T. 테러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