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6) >
문이 닫히자 의뢰인의 모습은 차논의 시야에서 완전하게 사라져 버렸다.
차논은 다시 소파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골드바를 바라보았다.
UBS 은행의 일련번호가 박혀 있는 24k 골드바는 조금 전 남자가 내려놓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골드바에서 냄새가 났다. 위험한,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났다.
태국에서는 절대 금기의 영역이 세 개 있었다.
우선 왕실과 왕족은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정을 장악했다고 해도, 쿠데타를 국왕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다.
승인을 받지 못하면 총과 칼을 가지고 있어도 쿠데타는 실패였다. 비단 정치 부분을 넘어, 태국에서 왕실과 척을 진다는 것은 전 국민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불교와 관련된 일에도 관여해서는 안 되었다. 헌법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불교는 태국의 국교(國敎)라고 할 수 있었다. 왕위 계승자는 공식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출가를 해야 했고, 불교와 관련된 심볼을 문신으로 새기면 형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정도로 태국에서는 불교가 신성시되었다.
마지막은 이슬람이었다. 정확히는 급진 이슬람 분리독립주의자들이었다. 이슬람 분리독립주의자들은 그 이전에도 태국 남부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거리였는데, 2015년에 스물두 명이 사망한 방콕 폭탄테러 사건 이후 급진이슬람분리주의자들은 태국 정부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었다.
왕실, 불교, 이슬람과는 절대로 엮여서는 안 된다.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목숨값으로는 부족하니까.
정체불명의 의뢰인은 끝까지 무엇을 원하는지, 북한 출신 해결사로 무엇을 하려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대신 골드바를 테이블 위에 올린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차논은 잠시 골드바를 바라보다가 전화기를 들고 약속된 코드를 전송했다. 지금 문을 나간 그를 미행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을 받은 그의 부하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을 추적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낼 것이다.
물론 의뢰인의 뒤를 캐는 행위는 이 업계에서 금기였다. 그러나 차논은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차논은 단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 실수 때문에 NIA 옷을 벗어야 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지.”
차논은 골드바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T DET69를 나온 의뢰인, 자신을 백금이라고 불러 달라던 남자는 문을 열고 나왔다. 전등 하나뿐인 어두운 아고고에 있다가 작열하는 오후 햇살이 난반사하는 야외로 나오자 자연스럽게 눈이 찌푸려졌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천천히 도로로 다가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노랑과 초록의 배색을 가진 도요타 택시가 남자의 앞에 섰다. 남자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택시 뒷문을 열고 탑승했다.
“터미널 21.”
남자는 택시 기사에게 영어로 아속(Asok)에 있는 대형 쇼핑몰의 이름을 말했다.
손님이 외국인임을 알게 된 택시 기사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속?”
택시 기사는 목적지를 재확인했다. 그런 택시 기사에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택시 기사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면서 바가지를 씌울 것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뒷좌석의 남자는 짧은 순간 택시 기사를 잠식했던 욕망을 눈치챘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방콕 택시 기사들의 바가지 수법도 뻔했다. 택시 미터기를 누르지 않고 평소보다 2~3배 되는 요금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다른 길로 뱅 돌아가거나 하는 수법이었다.
백금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한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최단거리가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상황적으로는 더 좋았다.
그러나 택시 기사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소이 인타마라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하면서 전승 기념탑(อนุสาวรีย์ชัยสมรภูมิ)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속으로 가는 최단루트였다.
전승 기념탑까지 이어지는 파혼요띤(PhahonYothin)도로(路)는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차량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고, 택시는 가다서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뒷좌석의 남자는 그 상황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원하던 상황이었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대략 20여 분이 흐르고 나서야 택시는 겨우 전승 기념탑 인근에 다다를 수 있었고, 그제야 조금씩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어우야.”
무언가를 본 택시 기사가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뒷좌석에 탄 남자는 고개를 돌려 택시 기사가 감탄사를 뱉게 만든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전승 기념탑 회전 로터리에 차량 서너 대가 서 있었다.
접촉 사고 치고는 피해가 큰 듯, 차량 한 대는 앞 범퍼가 날아가 있었다. 저 사고가 로터리를 중심으로 극심한 교통 체증을 만든 것 같았다.
택시는 사고 지점을 빠져나오고 나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뒷좌석에 앉은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회전 로터리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사고 현장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사고 현장을 빠져나오는 차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미행을 한다면 모습을 드러내기 딱 좋은 타이밍 이었다. 막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택시를 따라오려면 그 존재감을 드러내리라 판단했고,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누군가가 그의 시선에 잡혔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 랍짱(오토바이 택시기사)의 표식인 오렌지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
방콕에서 랍짱으로 일하고 있던 쏨차이가 차논을 알게 된 것은 1년 전이었다. 같은 사무실 소속이던 친척 형이 어느 날 쏨차이에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고, 그리고 차논을 만나게 되었다.
차논은 쏨차이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지금처럼 랍짱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면서 차논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랍짱 월평균 수익의 1.5배를 지급하며, 맡은 일을 하나씩 할 때마다 추가로 1천 바트의 수당을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쏨차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지루함도, 손님을 찾아다녀야 하는 귀찮음도 없이, 그저 소이 인타마라 인근에서 대기하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가끔씩 차논이 내리는 지시, 물건을 배달한다거나, 누군가를 데려온다거나 하는 등의 일도 힘들 것이 없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1천 바트가 수당으로 떨어졌기에 오히려 더 많은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쏨차이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차논이라는 남자가 지시하는 일이, 그리고 자신이 수행하는 일이 합법의 영역 밖에 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1.5배의 월급, 그리고 건당 1천 바트의 수익은 너무나도 달콤한 과실이었다.
차논이 지시하는 일 중에서 미행은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손님을 모셔오거나 물건을 배달하는 일보다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
목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쏨차이는 미행하는 일을 좋아했다. 미행할 때마다 스파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날도 쏨차이는 약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아드레날린을 느끼면서 30여 m 앞에 택시를 놓치지 않게 신경 써서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다.
택시는 천천히 남쪽으로 향하다가 시암 디스커버리를 끼고 좌회전하면서 스쿰빗으로 접어들었다.
쏨차이는 슬슬 목적지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립경기장에서 아속까지 이어지는 스쿰빗 도로에는 방콕의 주요 호텔들이 모여있는 중심지였다, 만약 자신이 미행하는 중년 남자의 목적지가 이곳이라면 택시가 어디에서 멈춘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쏨차이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 택시는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몇 번이나 쏨차이를 긴장시켰다.
“좋아. 이래야 미행하는 것 같지.”
솜차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택시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면서 오토바이를 몰았다.
시암역을 지나치면서 쏨차이는 터미널21이 목적지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택시는 수쿰빗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달려 터미널 21, 아속역에 중심 쇼핑몰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터미널 21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쏨차이의 일은 끝이 났다.
그러나 쏨차이는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터미널 21에 도착한 남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사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등 추가 정보를 알아낸다면 그의 고용인은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내려 줄 가능성이 있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저 중년 남자가 터미널21과 연결되어 있는 그랜드센터포인트호텔에 투숙하는 것을 쏨차이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쏨차이는 터미널21 근처에 랍짱 대기 장소에 오토바이를 세우면서도 택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택시 문이 열리고, 조금 전 T DET69에서 나온 중년 남자가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쏨차이는 재빠르게 랍짱임을 보여주는 오랜지색 조끼를 벗어 버렸다.
조끼를 벗고 있는 그에게 안면이 있는 다른 랍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 쏨차이, 오랜만이네. 요즘 얼굴 보기가…….”
그러나 쏨차이는 그와 인사를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중년 남자가 터미널 21 입구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 나, 나 화장실. 화장실 급해.”
쏨차이는 동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르게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하지 마. 자연스럽게 행동해. 뛰지 마. 자연스러운 빠른 걸음으로. 시선은 분산시키고. 자연스럽게, 쇼핑몰을 찾는 손님의 모습으로.
쏨차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편으로 스파이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선 쏨차이는 조금 전 자신이 속으로 되뇌었던 원칙, 당황하지 말라는 원칙을 바로 어겨버릴 수 밖에 없었다.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쏨차이와 남자의 시간 차이는 고작 10여 초에 불과했는데, 그사이에 중년 남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쏨차이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는 세 개의 엘리베이터와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상점과 상점이 만들어 낸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작 10초. 그 10초 만에 목표를 놓쳐 버렸다.
어떻게 하지? 어쩌지?
쏨차이는 빠르게 생각했다. 이대로 돌아가 보고할까? 목적지가 터미널21이라는 것만으로도 차논은 만족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터미널21에 들어간 것은 확인했습니다. 쇼핑몰 입구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잠시 속도를 늦추었는데 그가 사라져 버렸고, 이렇게 빨리 사라지려면 호텔 연결 통로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빨리 호텔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막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문틈 사이로 그 남자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14층, 17층에 멈추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보고하자. 차논은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결론을 내린 쏨차이는 터미널21과 연결되어 있는 그랜드센터포인트호텔 로비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자신을 백금이라고 불러 달라던 남자는 터미널 21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왼쪽에 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선 다음, 입구를 내려다보자 입구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조끼를 벗어 던졌지만, 그를 미행하던 오토바이 랍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오토바이 기사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갑자기 호텔 쪽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추어군.
2층에 선 남자는 랍짱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남자는 몸을 돌렸고 BTS 아속역과 연결되어 있는 연결 통로로 빠져나와 역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BTS 아속역은 주변에 많은 건물과 이어져 있었다. 남동쪽으로는 익스체인지 타워와 인터체인지21 빌딩, 북서쪽으로는 쉐라톤그랜드호텔과 웨스턴그랜드호텔, 그리고 타임스퀘어 쇼핑몰까지 열 개가 넘는 연결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미행하는 랍짱이 2층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속역까지 따라붙었다 하더라도, 복잡한 연결 통로를 가진 아속역에서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중년 남자는 방콕에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아속역의 수많은 행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연결 통로를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차논이라는 남자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정보상에서서 차논을 소개받았다. 태국 정보부 출신이고, 실력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런 차논이 미행자를 붙였다.
그건 그럴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차논의 입장이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를 미행자로 붙였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골드바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을 때, 차논의 눈에 떠오르던 욕망도 마찬가지였다.
대안이 필요하겠군.
남자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 MISSION 05 : 바 파인(Bar Fine)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