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MISSION : 협상 테이블 (2) >
JR니시니혼(西日本)에서 운영하는 오사카 순환선 텐마(天滿)역 플랫폼은 퇴근 시간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혼잡한 텐마역 플랫폼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색 가죽 재질의 서류 가방을 두 팔로 소중히 안은 남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역을 나서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북쪽 출구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북쪽 출구로 나오자마자 그가 향하는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맥도날드 텐마역 앞점(天満駅前店).
남자는 잠시 맥도날드 간판을 바라보다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가게 안으로 발을 옮겼다.
1층에 있는 주문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남자는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 지하에도 텐마역처럼 많은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려는 직장인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각자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온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서류 가방을 안고 있는 남자가 그 사람 앞에 서자, 막 한입 가득 햄버거를 베어 물려던 중년 남자는 햄버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번에 잘 찾아오셨군. 어서 오시오.”
서류가방을 안고 있는 남자, 전 국정원 요원 김규택은 그 남자, 지난번 오사카에 왔을 당시 스트립쇼 공연을 하는 동양극장에서 만난 그 중년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지난 만남에서 이 중년 남자가 김규택에게 제안을 했었다.
같이 일할 생각이 있냐고,
같이 일할 생각이 있으면 데이빗 박에 대해서 알아오라고,
데이빗 박에 대해서 알아오면 그때 한 식구가 될 수 있다고,
한 식구가 되면 다시 국정원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1급 실장을 달게 해 주겠다고 그가 말했었다.
그리고 김규택에게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권과 함께 서류 봉투를 넘겨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자에게 휘둘린 김규택은 얼빠진 표정으로 항공권과 봉투를 받았다.
간사이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화장실에서 서류봉투를 열어 볼 수 있었고, 봉투 안에는 미화 3만 달러가 적혀 있는 수표가 들어 있었다.
김규택은 한국으로 돌아와 수표를 현금화하고, 그 현금을 바탕으로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들고 오늘 이곳, 어리숙한 표정으로 그에게 휘둘렸던 맥도날드에서 다시 그를 만난 것이다.
“빈손이시네.”
중년 남자가 김규택을 보면서 말했다.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가 담긴 가방을 두 팔로 소중히 안고 있는 김규택은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했소. 장소에서는 장소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수상쩍지 않다고 안 그랬소? 맥도날드에 들어오려면 햄버거를 사서 와야지, 그냥 들어오면 어쩐단 말이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일단 앉으시오. 내가 규택 씨 햄버거도 미리 주문해 놨으니.”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햄버거 하나를 김규택의 앞에 놓았다.
김규택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년 남자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놓인 햄버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드시오. 수상쩍게 보이니까.”
중년 남자가 말했다.
“헛소리 집어치워.”
김규택이 낮게 말했다.
“참 말귀 못 알아듣네. 자꾸 그러면 의심받는다니까.”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말하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갈 테고, 앞으로는 영원히 볼 일 없을 거야.”
김규택이 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런 김규택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잠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바로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재미있군, 이 자식.
중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번에 보여 준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는지, 김규택은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중년 남자의 눈에는 그저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다.
중년 남자의 회사, 박물관연대에 새로 입사한 신입들도 김규택보다는 위압감이 느껴질 것이다.
이 자식은 안 되겠군.
중년 남자와 남자의 조직은 김규택을 적당히 써먹다 버릴 생각이었지만, 적당히 써먹지도 못할 것 같다고 판단 내렸다.
“뭐. 알겠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김규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가지고 오셨소?”
박물관연대 일본 관서 지부 지부장인 중년 남자는 김규택이 안고 있는 서류 가방을 보면서 말했다.
김규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년 남자의 시선이 서류가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중년 남자는 자신에게 시선을 유지하는 김규택을 보면서 이놈이 단단히 준비하고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타게 되었는데, 규택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
중년 남자가 말했다.
김규택은 역시 반응 없이 중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패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에게 보여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법이지. 뭐, 좋아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패를 까도록 할까.”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김규택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은 홍콩 HSBC은행에서 발급된 통장이었다.
“열어 보시지.”
중년 남자가 말했다.
김규택은 한 손을 뻗어 통장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미화 50만 달러가 찍혀 있었다.
김규택은 다시 통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앞으로 우리가 보내는 돈은 다 그리로 입금될 테니. 아,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 맞겠군.”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김규택은 통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날 어떻게 다시 회사로 넣어 줄 거지?”
김규택이 물었다.
“회사?”
중년 남자가 되물었다.
김규택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 아아, 국정원 말이군.”
중년 남자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김규택의 표정에 조금 분노가 서리는 느낌이었다.
“그걸 지금 확인시켜 달라 이 말이군.”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김규택의 얼굴을 보았다.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사실 그가 김규택의 입장이었어도 믿지 못했을 테니.
박물관연대가 아무리 민간 정보 기업 중에서는 대단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의 정보기관, 그것도 바로 적국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보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박물관연대는 국정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국회의원 하나둘 정도는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국정원에 누군가를 집어넣는 일은 불가능했다.
김규택에게 한 약속은 거짓이었다.
국정원에 넣어 줄 힘도 없었고, 설사 힘이 있었다고 해도 이미 버려진 패를 다시 억지로 끼워 넣을 생각은 없었다.
김규택이 국정원에 남아 있었다면 가치가 있었겠지만, 그가 그곳에서 나온 이상, 박물관연대에게 김규택이라는 패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걸 지금 어떻게 확인시켜 드리나.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하지 않소?”
중년 남자는 블러핑을 선택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그 서류 가방을 들고 가시오.”
중년 남자가 말했다.
별것 아닌 패를 가지고 블러핑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배짱이다. 중년 남자는 배짱을 부렸다.
당연히 김규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눈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보시오, 김규택 씨.”
중년 남자가 김규택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믿지 못하는 거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신의 패는 하나도 꺼내지 않고서 나에게만 패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규택 씨에게 우리가 해주려는 것들을 지금 당장 여기서 입증하라고 하는 것도 솔직히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규택 씨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중년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김규택에게 말했다.
이 테이블에서 절박한 쪽은 김규택이었다.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서류를 작성해 드렸겠지. 하지만 알지 않소.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중년 남자가 다시 말했다.
“피곤하게 이러지 맙시다. 앞으로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중년 남자는 김규택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김규택의 눈 깜빡임을 보면서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규택은 잠시 중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열고 봉투 하나를 꺼냈다.
김규택은 손에 든 봉투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김규택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중년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류 봉투가 테이블 위에 완전히 놓이자 웃음을 지으며 김규택에게 말했다.
“한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하오, 규택 씨.”
그렇게 말한 중년 남자는 팔을 서류 봉투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서류 봉투에 닿으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중년 남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좋겠네, 규택이. 새 식구도 생기고.”
중년 남자와 김규택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 사람의 남자가 서 있었다.
들려온 말은 한국어였고, 중년 남자는 그들이 한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말을 알아들은 김규택은 얼굴에는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
“이거예요?”
먼저 테이블로 다가간 김승섭이 말했다.
“아마도?”
한발 뒤에 서 있던 곽용신이 말했다.
김승섭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봉투를 열고 안에 있던 서류를 꺼냈다.
한 남자의 사진이 인쇄된 프로필이 한 장 들어있었다.
“맞아요?”
김승섭이 물었다.
“맞네.”
곽용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가 만든 가짜 데이빗 박의 프로필이 김승섭 손에 들려 있었다.
“다행이네, 읏샤.”
김승섭은 그렇게 말하면서 김규택 옆자리에 앉았다.
“이건 얼마나 들어 있나 볼까?”
김승섭은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통장으로 손을 뻗었다.
중년 남자는 김승섭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승섭이 통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중년 남자도 김승섭을 저지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움직이지 마.”
그런 중년 남자에게 김승섭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중년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승섭의 매서운 눈을 보았다. 그리고 움직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중년 남자의 손을 멈추게 했다.
중년 남자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김승섭은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통장을 집어 들고 열었다.
“어디 보자. 일, 십, 백, 천, 만, 십만, 흐미. 형님, 이거 50만 딸라네. 50만이면 얼마야 이거.”
통장에 찍힌 숫자를 헤아린 김승섭이 말했다.
곽용신은 천천히 다가와 중년 남자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시오. 누구시죠?”
곽용신이 중년 남자에게 영어로 물었다.
“일본 쪽 놈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앞에 앉아 있는 김승섭이 말했다.
“그런 것 같지? 규택이는 어떻게 생각하냐?”
김규택은 자신에게 물어보는 곽용신의 질문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잔뜩 얼어붙어 있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Korean NIS?”
중년 남자가 곽용신에게 물었다.
곽용신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김승섭이 다시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어쩔 거요. 날 체포할 거요?”
중년 남자가 곽용신에게 말했다.
“체포라,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마시고. 그저 잠시 이야기 좀 나눴으면 싶은데 말이지.”
곽용신이 말했다.
국정원 요원은 국가정보원법 16조에 따라 사법경찰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외에서 타국민에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중년 남자는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군요.”
어느새 여유를 찾은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잠시만.”
그런 그를 김승섭이 불렀고, 중년 남자의 시선이 김승섭을 향했다.
찰칵.
김승섭 손에 들린 휴대전화에서 사진 촬영음이 흘러나왔다.
“오케이. 사진발 잘 받으시네.”
김승섭은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조만간 봅시다.”
곽용신이 중년 남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중년 남자는 굳은 얼굴로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곽용신과 김승섭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 안에 김규택의 잔뜩 긴장한 얼굴이 들어왔다.
“규택아, 우리 누군지 알겠지?”
옆자리에 앉은 김승섭이 김규택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김규택은 그 둘이 누구인지 몰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국정원.
“규택아.”
앞에 앉아 있는 곽용신이 김규택을 불렀다.
“모용진 어디 있냐?”
곽용신이 물었다.
< INTERMISSION : 협상 테이블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