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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43화 (244/386)

< MISSION 04 : 츠바키 (71) >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카멜리아는 횟수를 세어 보았다.

이곳으로 방을 옮기고 열한 번의 식사를 제공받았다.

하루에 3식이라는 기준으로 치면 방을 옮기고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방을 옮기기 전에, 의식을 잃고 있던 시간까지 감안하면 대충 4일에서 5일 사이가 될 것이라고 그녀는 판단했다.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조국은 지금 그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죽었다는 확신을 얻기 전까지 그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사망했다고 확인되면 그 시신을 확인하고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고, 이곳은 중동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아마도 미국과 관련되어있는 장소로 의심스러운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루할 뿐이었다.

카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세 가지 행동 중 하나, 잠을 청하거나, 밥을 먹거나, 그리고 배변을 하는 세 가지 중 마지막 행동을 하기 위해 변기로 걸어갔다.

여전히 카메라는 빨간 불을 깜빡이며 방 안을 비추고 있었고, 그녀는 그 빨간 불을 잠시 바라보다, 트레이닝복 바지를 내리고 변기 위에 앉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

한규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내부로 들어가려던 한규호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 카멜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변기에 앉아 있는 카멜리아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도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다시 밖으로 나오자, 문을 지키던 요원들이 한규호를 잠깐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피했다.

한규호는 그런 그들의 눈빛을 무시하고서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여유 있게 150까지 센 다음, 이번에는 가볍게 노크를 두 번 하고 잠시 텀을 둔 다음에서야 문을 열었다.

카멜리아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한규호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자신이 들고 온 접이식 철제 의자를 그녀의 정면에 놓고, 그 위에 앉았다.

“실례했군.”

한규호가 사과했다.

“괜찮아요. 처음도 아니고.”

카멜리아가 말했다.

“처음이지.”

한규호가 말했다.

“기억력이 나쁘시네요.”

카멜리아가 말했다.

“저번에는 의도가 담겨 있었으니까, 나에게는 잘못이 없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한규호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이 기분 나빴다. 마치,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그의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나신을 보이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그녀의 일이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 내면을 보여 주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속내를 들킨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나체를 보여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옷을 갈아입었군.”

한규호가 말했다.

그녀는 아키타 료칸의 유카타가 아닌,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가져다주더군요.”

카멜리아가 말했다.

“뭣 좀 먹었나?”

“밥은 주더군요.”

“다행이군.”

한규호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되나요?”

카멜리아가 물었다.

“늦어도 한 달.”

한규호가 말했다.

카멜리아는 태연하려고 했지만, 그 눈에 떠오르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당연히 ‘당신에게 달렸지’ 라던가, ‘당신은 누구지’ 같은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것이다.

한규호는 그녀의 눈에 떠오른 놀라움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군.

한규호는 그녀의 감정적 동요가 마음에 들었다.

“길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감정적 동요는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적 동요를 숨길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한규호는 밀러 국장을 떠올렸다.

눈동자를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그와 마주하고, 그 눈을 직접 보고, 진짜 서용석의 행적을 찾아냈는지, 정말로 방콕으로 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한규호도 그의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좋아하기에 한 달은 긴 시간이죠.”

“그래. 짧지는 않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건가요?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그 말을 하려고?”

“츠바키히메(つばきひめ, 椿姫).”

한규호가 말했다.

“카멜리아를 일본어로 츠바키라고 하지. 그래서 동백꽃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s)도, 오페라 라트라비아타(La Traviata)도 춘희(椿姫)로 번역되었지.”

한규호는 여자의 눈에 떠오르는 감정의 동요가 조금 더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동백꽃은 조매화지. 11월에 꽃을 피우기 시작해 2월에 만개하니까. 겨울에는 곤충들이 없고, 수정하기 위해서는 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 새를 유인하기 위해 다른 꽃들에 비교해 꿀이 달아야 하고 양도 많아야 하지.”

한규호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꽃이 질 때,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꽃잎이 전부 붙어 있는 채로,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지. 꽃잎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그 모습이 마치 목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일본에서는 그리 이미지가 좋지 않지. 반면에, 한국과 중국에서는 절개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겨울 추위를 이겨 내면서 피니까 그래서일 수도 있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죠?”

카멜리아가 물었다.

“꽃 이야기. 카멜리아라는 꽃 이야기.”

“왜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거죠?”

“그건 당신이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스라엘의 명령을 받는 요원이기 때문이지. 이스라엘에서도 카멜리아가 절개를 상징하는지 궁금해지는군.”

한규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카멜리아를 든 여인. 파리 사교계에서 화려한 삶을 살지만 매춘부라는 낙인은 지울 수 없지. 카멜리아라. 누가 당신에게 그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붙였다면 참 잔인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는 여자의 눈에서 감정을 읽었다.

그녀의 눈이 일렁이는 감정을 통해서, 밀러 국장이 이 여자에 대해 알려 준 말들이 사실임이 확인됐다.

“내가 이스라엘 쪽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놔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인가요?”

카멜리아가 물었다.

“그래.”

한규호가 답했다.

“위에서 용납하지 않을 텐데요.”

카멜리아가 말했다.

“용납?”

“양국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갈 테니까요.”

카멜리아의 말에 한규호는 작게 웃음 지었다.

“신뢰 관계라……. 그렇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국제 사회에서 신뢰받고, 외교적 관례를 철저히 지키는 신사적인 나라였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군.”

한규호가 말했다.

카멜리아는 한규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비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 어느 나라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나라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국제법은 물론이고, 타국의 법도 어겨 가면서까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모사드와 신베트가 있었다.

“안타깝군. 양국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내가 망치게 되었으니. 하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양국의 신뢰 관계가 두터운지 의심이 되는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받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카멜리아는 말없이 한규호를 노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당신의 조국이 얼마나 의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대되는군. 당신을 어떻게 구하려 할 것인지.”

한규호가 말했다.

“늦어도 한 달. 그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단지 여기만 벗어날 뿐이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한규호가 말했다.

“어디로 가나요?”

카멜리아가 물었다.

“비밀. 여기보다는 쾌적할 거야.”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루살렘은 절대로 잊지 않아.”

카멜리아가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규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든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밀러 국장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다음 대선을 준비 중인 대통령이 그가 건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서류를 보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밀러 국장은 스튜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몇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서로의 돈독한 협조 관계를 위한 가계약 조건으로 들어주시면 좋겠군.

가계약이라고 했지.

재미있군.

요즘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CIA에서 그 남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재미있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감히 CIA 국장에게 가계약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겠는가.

스튜가 원한 조건은 우선 카멜리아를 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책임지고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스튜가 원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거기에 트레이시 테일러를 동승시킬 것도 요구했다.

카멜리아를 옆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겠다는 이야기였다.

밀러 국장은 스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했다.

카멜리아를 감시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하필 트레이시일까?

그녀는 스튜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단순히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위험에 노출되기까지 했다.

그녀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튜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 그녀를 계속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흐음.”

대통령이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재미있군.”

보고서를 본 대통령이 감상이었다.

밀러 국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제, 이스라엘 총리가 전화를 해 왔지.”

대통령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뭐. 그놈들답지 않게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작을 하더군. 다음 선거에서 이기길 바란다거나, 미국 내 유태인들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거나. 양국의 우호 관계가 계속되길 바란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상당히 듣기 좋은 말들이었지. 그런데, 난 그게 그렇게 좋게 들리지 않더란 말이지.”

“요구 조건이 있군요.”

“그래. 자기네 사람 중 하나를 돌려 달라고 하더군.”

밀러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단하다면 대단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은데, 요원 하나 돌려받겠다고 직접 전화를 한다니. 아, 물론 뭐, 이스라엘과 우리 사이가 좀 특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알아보겠다고 했지. 그들이 원하는 요원이 보고서의 카멜리아라는 여자인가?”

“맞습니다.”

밀러 국장이 말했다.

“한국으로 넘긴다는 이야긴데. 난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군. 한국 정부가 이 여자를 왜 원하는 거지?”

대통령이 물었다.

“한국 정부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고 있습니다.”

밀러 국장이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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