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38화 (239/386)

< MISSION 04 : 츠바키 (66) >

한규호가 트레이시를 입에 올렸다.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트레이시는 어떨까? ‘왜’는 나중으로 미뤄 두고 일단 ‘어떻게’부터 생각해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용기 승무원 역할이나 맡던 젊은 아가씨에게 미국과 일본의 차세대 전투기 계약서 작성 사전 조율을 맡겼다. 당연히 그와 관련한 사전 지식이나 실무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트레이시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한규호가 국장에게 물었다.

국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 해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을 맡겼을까? 이유는 하나뿐,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한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할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앞서 말했지만, 미국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미국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니까. 협상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 아무리 짐빔이 장난질을 치고, 트레이시가 일을 망친다고 하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트레이시라는 ‘개인’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재미있군.

국장이 말했다.

“성급하시군, 이제 시작인데.”

한규호가 말했다.

-기대되는군.

국장이 말했다.

“부담되는데.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면, 이제 ‘왜’라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트레이시를 위해 만들어진 함정이라면, 이유가 필요하다. 왜 트레이시를 함정에 빠트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한규호는 마치 강의를 하는 강사 같은 말투로 말했다.

“조금 더 들어가서, 얼마 전까지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권한도 없는 하급 요원에 불과했던 트레이시가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올 정도의 권한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녀의 가치가 올라간 것일까? 젊고 아름다워서? 물론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짧은 순간에 높은 자리로 올라간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트레이시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했을 것 같지는 않군, CIA에서 그런 방법이 통한다는 생각도 무리가 있고, 아마도 나와의 접점. 그 이유 때문이겠지. 앤 챔버에게는 챔버 부인이 붙어 있다, 잠깐 대화를 나눠 본 것이 불과하지만 그녀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더군.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백악관에 끌려간 국장을 대신해 상황실을 지킬 정도의 권한은 가지고 있다. 단순히 능력 덕분일까? 아니지. 그녀가 가진 가장 큰 가치는 앤 챔버의 옆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위치를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 다시 트레이시로 돌아와서, 트레이시도 분명 가치가 있다.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나와 접점이 있고. 그런데 그녀 또한 챔버 부인처럼 대체 불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지. 그래서 트레이시가 대체 불가의 존재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번 작전이 계획된 것이지. 테스트. 트레이시의 자격시험. 그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 그리고 그 시험 문제가 나. 당신들이 기프티드라고 의심하는 바로 나. 그게 바로 내가 여기 와 있는 이유.”

한규호가 말했다.

-기프티드인가?

국장이 물었다.

“서용석은 지금 어디에 있소?”

한규호가 되물었다.

국장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중에 만나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하기로 하고, 오늘은 간단히 정리합시다. 챔버 부인이 그러더군. 나와 잠을 자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그 말을 듣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꼭 말로 해야만 ‘지시’가 아니다. 채점자는 그 항목도 점수를 매길 것 같다는 그런 생각. 그렇게 테스트는 계속 진행되었고, 그녀는 몰랐겠지만, 채점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그리고 낙제점을 받았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통화를 했으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내가 시애틀과 통화를 한 그 순간, 당신들은 트레이시에게 대체 불가가 아니라는 성적을 매겼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떠올렸겠지. 시애틀에 연금되어 있는 ‘그녀’.”

한규호와 밀러 국장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CIA와 같이 일을 하겠다고 하던데, 들었소?”

-들었네.

“계약금을 잔뜩 안겨 줬으면 좋겠군. 월급은 많고, 할 일은 없는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고.”

-생각해 보지.

“아무튼 ‘그녀’가 트레이시의 자리를 당장 차지하지는 못하겠지. 아직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누가 남았지? 나와 접점이 있는 또 한 사람. 앤 챔버가 남았군.”

한규호가 앤 챔버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런데 그녀는 안 될 것 같은데. 남녀가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임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출산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테니까.”

한규호가 앤 챔버의 제한 조건을 말했다.

“자, 트레이시는 이제 낙제 확정, 그런데 ‘그녀’는 아직 안 된다. 앤 챔버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녀가 맡고 있던 가교 역할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지? 기밀도 알려 주면서 내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그런 인물이 누가 있지?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가교가 필요할까? 직접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으니, 그래서 타이밍 좋게 등장하신 거지. CIA의 국장님께서, 친히 서용석이라는 카드를 들고.”

거기까지 말한 한규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의미로.

***

국장은 스크린 너머 한규호가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그의 제스처와는 달리, 스크린에 투영된 그의 눈에 장난스러움 같은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밀러 국장은 스튜가 일반적인 독립 요원, 용병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 대화를 통해서 그에 대한 평가를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대 이상이군.

밀러 국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스튜가 말한 것이 전부 다 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한된 요소들을 가지고 이 만큼의 결론을 도출해 낸 한규호의 모습은 국장에게 신선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익과 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베네수엘라 작전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행된 스튜의 심리 분석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저 계약금을 잔뜩 안겨 주고 좋은 집과 아름다운 여자를 붙여 주는 것만으로 그를 영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용석.

스튜가 그를 원했다. 그자가 스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스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용석 카드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도 스튜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는커녕, 살짝 놓을 뻔한 주도권을 다시 가져가 버렸다.

CIA의 국장인 자신이 직접 나섰음에도 말이다.

밀러 국장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재미있군.”

밀러 국장은 말했다.

***

-재미있군.

화면 너머의 밀러 국장이 말했다.

“재미있다니 쓸데없이 떠든 보람은 있군.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시다. 다는 당신들을 믿지 않소. 정확히 말하면 어디도 믿지 않지.”

-그런 것 치고는 태청무역을 고집하더군.

“함께한 시간이라는 것은 가치가 있으니까.”

-시작이 있어야 함께한 시간이라는 것이 있지.

“CIA와는 이미 시작되었지. 그리고 당신의 장난질이 그 시간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고.”

-장난질?

“그 여자. 날 죽이러 온 이스라엘 여자.”

한규호가 말했다.

“당신들은 알고 있었지. 챔버 부인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당신은 알고 있었지. 그 여자가 왜 접근했는지,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는지.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지. 뭐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야. 나는 그쪽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트레이시는? 트레이시에 관해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조직이라면 더더욱 믿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요원들을 부품처럼 쓰고 버리는 조직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 말에, 국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규호는 국장의 침묵이 당황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황할 정도로 양심이 있는 인물이라면 저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겠지.

그것이 한규호의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았겠나 싶은데.”

한규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베팅을 마무리했다.

다시 국장이 베팅할 차례였다.

한규호는 국장이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했다.

-사과하지.

한규호의 예상과는 다르게 국장은 순순히 사과했다.

“말뿐인 사과는 가치가 없는데.”

그런 국장의 사과를 한규호는 일단 거부했다.

-사과의 의미로 무엇을 지불하면 되겠나.

국장이 물었다.

“서용석.”

한규호가 오늘 여러 번 언급된 이름을 다시 테이블에 올렸다.

“지금 어디에 있지?”

-그건 말해 줄 수 없겠군.

국장이 말했다.

“마지막 히든카드 한 장은 가지고 있으시겠다?”

한규호가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국장이 말했다.

진짜일까?

한규호는 국장의 솔직함에 의심부터 들었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규호도 생각은 했다.

트레이시에게 그 이름을 꺼낸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만큼 알아낸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다.

비행기 탑승 기록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CIA 정도 되었기에 5년 전 기록을 이토록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한규호는 국장이 이미 서용석의 소재를 찾아냈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었으면 싶었다.

서용석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했으면 하는 것이 한규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서용석이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찾을 수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한규호가 말했다.

-살아 있다면 우리가 찾겠지. 죽었다면 그 시체가 어디 묻혀 있는지도 찾아낼 테고. 우리가 못 찾으면 아무도 찾지 못하겠지.

국장이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찾는데, CIA만큼 확실한 흥신소는 없다.

한규호의 지금 기분 같아서는 일본이고, 미국이고 상관없이 당장 방콕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1천4백만의 인구,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이 방문하는 대도시에서 서용석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용석은 사람이기에 밥은 먹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 중에 돈으로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은 폭력밖에 없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찾아 나간다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밀러 국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탈출을 도운 조력자가 있다면, 그래서 폭력을 팔아야 할 필요가 없다면, 그를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으로서는 CIA가 서용석을 찾아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미리 목에 목줄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한규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지금의 협조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군. 더욱 돈독해지는 방향으로.

국장이 말했다.

“장난만 치지 않는다면, 나빠지지는 않겠지.”

한규호가 답했다.

-사과의 표시를 하고 싶군.

국장이 말했다.

“그럼 몇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서로의 돈독한 협조 관계를 위한 가계약 조건으로 들어주시면 좋겠군.”

한규호가 말했다.

-계약은 이진법이지. 0 아니면 1. 계약은 맺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계약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밀러 국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하자는 말이지.”

한규호가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6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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