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37화 (238/386)

< MISSION 04 : 츠바키 (65) >

방콕(Bangkok).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영원한 보석의 도시, 인드라 신의 난공불락의 도시, 아홉 개의 고귀한 보석을 지닌 장대한 세계의 수도,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하늘 위의 땅의 집을 닮은 왕궁으로 가득한 기쁨의 도시, 인드라가 내리고 비슈바카르만이 세운 도시(กรุงเทพมหานคร อมร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มหินทรายุธยา มหาดิลกภพ นพรัตน์ราชธานีบุรีรมย์ อุดมราชนิเวศน์มหาสถาน อมรพิมานอวตารสถิต สักกะทัตติยะวิษณุกรรมประสิทธิ์)라는 긴 이름을 가진 태국 수도의 대외적 명칭.

그곳으로 서용석이 갔다. 밀러 국장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방콕?”

한규호가 되물었다. 그 말투에 의심이 묻어 있었다.

카라카스에서 방콕으로 갔다고?

한규호의 생각이었다.

-위장 여권을 가지고 육로를 통해 콜롬비아로 출국했지. 타치라(Tachira)에서 국경을 넘었고, 베네수엘라가 아직은 국가 구실을 하던 때라서 기록이 남아 있었지.

밀러 국장이 한규호의 의심을 풀어주겠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보고타에서 라탐항공으로 칠레 산티아고로, 산티아고에서 콴타스를 타고 시드니로 향했고, 시드니에서 싱가포르 항공을 타고, 싱가포르를 거쳐 방콕에 도착했지.

“흠…….”

밀러 국장의 말을 들은 한규호는 베네수엘라에서 도밍게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밍게즈는 서용식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했다.

들었다고 했다.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 서용석이 조국을 버렸다고?

도밍게즈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서용석이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갔다면?

그렇다면 100% 탈북이다.

그 서용석이 조국을 등진 것이다. 북한은 다른 나라와 달리 국민이 자유롭게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게 두는 나라가 아니니까.

그리고 밀러 국장의 지금 말이 사실이라면, 서용석이 일본계 브라질인의 여권을 들고 몇 번이나 비행기를 타고 방콕으로 갔다면, 가설 하나를 세울 수 있다.

서용석의 출국을 도운 조력자가 있다는 것.

한규호는 밀러 국장을 바라보았다.

밀러 국장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얼굴을 보면서 방콕으로 가는 비행 편을 당장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민간 항공사의 정기편이든, CIA가 가지고 있는 전용기든, 주일 미군이 운용하고 있는 군용기든 가용한 비행기를 타고 당장 방콕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도심권에 1천4백만 명이 사는 그 대도시로 날아가 골목 하나하나를 다 뒤져서라도 서용석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었다.

“빠르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트레이시에게 서용석이란 이름을 알려 준 것이 며칠 전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CIA는 서용석이라는 이름을 특정하고, 과거 행적을 조사하고, 어디로 향했는지까지 찾아낸 것이다.

밀러 국장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지금 방콕에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밀러 국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규호도 밀러 국장이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면 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됩니까?”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사인할 텐가?

밀러 국장이 물었다.

한규호는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본 이후 처음으로 한규호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국장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스쳤다.

***

카멜리아는 자신의 새 거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남자가 말한 대로 양동이라도 넣어 주려나 생각하던 그녀에게 두 사람이 다가와 손에 수갑을 채우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다음에 이 공간으로 옮겨 온 것이다.

먼저 수갑이 풀리고, 보자기가 벗겨지자 새로운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옮기기 전의 공간과 같이 특색 없는 벽, 특색 없는 이동식 접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방 한구석에 변기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진 변기였다. 미국 교도소에서나 볼 수 있는 변기다.

미국 교도소의 거친 수용자들은 도기로 만들어진 변기를 깨서 무기를 만들거나 자해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교정 당국은 변기를 전부 스테인리스강 재질로 교체해 버렸다.

역시 미국일까?

스테인리스강 재질의 변기를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빨간불이 점멸하는 CCTV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누워 있건, 변기에 앉아서 일을 보건, 카메라는 그 모습을 담을 것이다.

인권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비단 지금 상황뿐만 아니었다.

아키타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곳이 어딘지, 왜 이곳에 왔는지, 변호사의 조력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인권을 보호받고 있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멜리아는 살짝 웃었다.

인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그녀 스스로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조국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시에 따라 그녀는 남자를 유혹했고, 정사를 벌였으며, 정사 중에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인권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진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녀의 코드명, 동백꽃의 학명인 카멜리아(Camellia).

라다 쉬이라(שירה רָדָא)라는 이름을 버리고 얻게 된 두 번째 이름, 그리고 창부(娼婦)를 의미하는 오래 된 은어(隱語).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가 1848년 출간한 소설 ‘카멜리아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는 파리 사교계의 유명인사이며, 동시에 고급 창부(娼婦)였다.

그 여주인공의 이명이 카멜리아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당시 유럽에서는 카멜리아라는 단어에는 창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조적인 의미로 그 이름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 그뿐이었다.

그녀는 창부가 아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폐병으로 외로이 죽어 가면서까지 남자를 위해 순정을 다 바치는 마르그리트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예후딤(유대인)은 민족의 중흥이라는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녀가 옷을 벗고, 몸을 허락하며, 목표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마르그리트처럼 창부 짓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한규호는 밀러 국장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확신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챔버 부인이 그러더군요. 당신에게 물어보라고.”

한규호는 조금 더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당신들은 그 여자의 정체를 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그리고 정체를 알고 있는 여자가 나에게 접근하도록 두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아니면 당신들이 계획했거나.”

조금 강하게 도발했다.

-그 여자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더군.

밀러 국장이 말했다.

그의 어투와 눈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군.

“우선, 그 여자에게 죽을 뻔한 당사자가 나이니까, 채권은 내가 가지고 있고. 두 번째로, 당신들에게 맡겨 두고 싶지 않아서.”

한규호가 말했다.

밀러 국장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왜 CIA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지 설명하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국장의 눈빛을 읽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밀러 국장은 그의 상사가 아니었고, 설사 상사라고 하더라도 한규호는 눈빛으로 하는 지시 같은 것은 따를 생각이 없었다.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먼저 손을 든 것은 국장이었다.

-이유를 듣고 싶군.

“당신들을 믿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이유를 묻고 싶군.

국장이 물었다.

“여자는 누굽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

밀러 국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한규호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용석 때문에 밀러 국장 쪽으로 이동한 주도권을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다.

-그녀를 놓아주면 예루살렘에서 감사를 표할 것이네.

밀러 국장이 말했다.

예루살렘?

한규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이스라엘?

첩보 세계에서 이스라엘은 유명했다. 나쁜 의미로 유명했다.

민족과 혈족 위주로 조직을 운용하는 모사드는 자국 요원들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신뢰하지 않았다.

국제법을 어기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아주 작은 원한이라도 잊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국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믿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답을 했으니, 이제 한규호가 답을 할 차례라는 의미였다.

한규호는 국장의 요구를 묵살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스크린 너머, 기계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는 밀러 국장에게 한 방을 먹이기 위해서 그의 요청을 무시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서용석.

CIA가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밀러 국장의 말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CIA가 가장 이용 가치가 높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규호는 CIA를 이용할 생각이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다.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짐빔.”

한규호가 말을 꺼냈다.

“짐빔은 미국에 불리한 무기 도입 계약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과연 CIA는 모르고 있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방위산업 관련 계약을?”

한규호가 국장에게 말했다. 물론 국장은 대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CIA의 대단함을 보여 주기 위한 팸투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짐빔이라는 그 양반이 걸렸단 말이지. 뭐, 의심은 이쪽 업계에서는 직업병 같은 거니까.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찝찝한 기분을 떨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생각했지. 생각할 시간은 많았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한규호는 다시 국장의 눈을 보았다. 물론 국장은 무표정한 얼굴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저놈의 눈동자가 떨리는 모습을 보려면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겠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미국이 원하지 않는 계약을 만들던 짐빔이 죽었다. 그것도 딱 좋은 시점에. 미국이 짐빔을 죽였다? 아니, 뭐 직접 죽이지는 않아도 방임했다 정도로 해 둘까요?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짐빔이 죽었는데, 왜 나를 이곳으로 불렀을까? 마치 휴양이라도 즐기라는 것처럼 위장을 했지만, 실제로 상황은 엉망진창인 이곳에? 함정일까? 일이 어그러지면 그 책임을 묻기 위한 함정일까?”

거기까지 말한 한규호는 자연스럽게 팔장을 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어그러지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사실 미국은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일본 그 멍청한 놈들이 차세대 전투기 도입을 위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한다? 러시아제 수호이? 크레믈린의 불곰들도 안 믿을 이야긴데.”

한규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짐빔이 죽으면? 그다음 협상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까? 미국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단 한 번도 불리한 조건으로 사인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그러할 테고. 설사, 일이 어그러진다고 해도, 방위산업 계약 건을 고작 독립 요원인 나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나를 여기로 불렀을까?”

-생각이 듣고 싶군.

국장이 말했다.

“트레이시.”

한규호가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6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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