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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36화 (237/386)

< MISSION 04 : 츠바키 (64) >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전화기가 벨소리와 함께 진동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이름과 번호가 떴다.

코시자와 회장은 전화가 왔음을 인식했음에도,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벽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20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전화기가 탁자 위에서 진동하도록 바라보다가, 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코시자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여보세요’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통화가 연결되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다른 이가 들었다면, 극도로 공손한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일본 정부의 수장, 총리대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군, 바쁜데.”

코시자와 회장은 건조하게 말했다.

전혀 미안함이 담겨 있지 않은 어투였다. 실제로도 미안하지 않았다.

총리에게 전화가 오기까지 20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어르신이 찾으시는데, 당연히 만사를 제쳐 두고 연락을 드림이 맞죠.

그러나 총리는 그런 코시자와 회장의 마음도 모른 채 여전히 저자세로 말했다.

“부탁이 있네.”

-부탁이라니요. 그저 하명하시면 됩니다.

일국의 수장인 총리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비굴한 언사였다.

“시마다.”

코시자와 회장이 시마다의 이름을 올렸다.

-시마다라고 하시면…….

총리가 말했다.

코시자와 회장은 총리의 말에서, 그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시마다 아리히로.”

-아…… 네. 시마다 군.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총리의 목소리에 불편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현직 총리는 당연히 시마다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다.

시마다가 계파를 조직하고, 당을 뛰쳐나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최근 시마다의 극우적인 행보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 없는 발언들은 ‘넷우익’이라고 불리는 젊은 층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당 내에서는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마다가 조직한 계파가 총리 파벌의 경쟁 상대로 성장한 것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소식을 못 들었나?”

코시자와가 물었다.

-무슨 소식 말씀이신지…….

총리가 말했다.

한심하군.

코시자와는 생각했다.

한 나라의 총리라는 인물이, 현직 중의원이 린치를 입고 긴급 수술을 받고 있는데, 아직 그 사실을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니.

“시마다가 다쳤네. 지금 수술을 받고 있고.”

-수술? 시마다가 말씀이십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놀라움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코시자와는 그 외침에 기쁨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총리의 머릿속은 지금 빠르게 회전할 것이다.

시마다가 린치를 당했다? 누가 했을까? 왜 했을까? 다쳤다면 얼마나 다쳤을까?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총리의 머리를 스칠 것이다.

“시마다가 당분간 안정을 취했으면 좋겠군.”

코시자와 회장이 말했다.

총리가 정치적 공식에 따라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안정을 취한다는 말씀은…….

총리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코시자와 회장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시게노 이오가 코시자와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코시자와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설명을 요구하는 총리의 어리석음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입원해 있는 동안 방문객이 그를 찾는 것은 치료에 도움이 안 되겠지.”

코시자와 회장이 말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코시자와의 이야기는 시마다에게 외부 접촉을 허용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가 치료를 받는 동안, 같은 계파의 정치인, 보좌관은 물론, 가족들의 접촉까지 모두 차단하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치료가 끝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해해야지. 이 정도까지 이야기해 줬는데, 당연히 이해해야 했다.

하지만 총리의 어리석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시마다 군은 어디에…….

코시자와는 이 남자를 총리로 만든 것이 잘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르신은 그저 걱정 마시고…….

총리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능력과는 별개로 본능적인 정치 감각과 윗사람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눈치로 지금 자리에 오른 총리다웠다.

물론 늦었지만.

“나이초와 국공(国公)을 잠시 빌려 쓰고 싶군.”

코시자와 회장이 총리의 말을 끊었다.

***

전화기 너머로 코시자와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초와…… 국공을 말씀이십니까?”

총리가 되물었다.

나이초와 국공, 국가공안위원회를 빌려 쓰고 싶다는 코시자와의 말을 총리는 예상치 못했고,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국공. 정식명칭 일본국가공안위원회(国家公安委員会, National Public Safety Commission), 국가 공안에 관한 경찰운영을 주관하는 총리 직할 조직.

명목상으로 일본의 경찰은 자치경찰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공안위원회의 지휘를 받았고, 국가공안위원회의 수장인 국가공안위원장을 총리가 임명함으로써 총리는 일본 경찰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위대, 국가공안위원회, 그리고 내각정보위원회, 이 세 기관이 일본 총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칼이었다.

코시자와는 지금 그 칼을 빌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코시자와 카네모토가 단순히 코시자와 그룹의 회장일 뿐이었다면, 절대로 그는 총리인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재계(財界)는 절대로 권력에 대항하지 못한다.

일본의 정치권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고 있고, 재계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권력에 대항하지 못했다.

에도막부 시대에 조닌(町人, 에도시대 도시 상인)들은 풍부한 기술력과 자본으로 하나의 특권 계급으로 성장했다.

조닌 문화를 이룰 정도로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끝끝내 조닌들은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자본력이 지배 계층에게 위협으로 느껴질 때마다, 지배 계층인 무사 계급은 조닌들을 탄압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했다.

사치를 했다는 이유로 전 제산을 몰수당한 이시카와 로쿠베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이후 일본에서 금력의 힘은 계속 증가했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의 재계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 계급이 독점하던 권력은 원칙적으로 국민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 헌법에서는 민주 선거를 통한 내각제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런 헌법이 무색하게 정권은 언제나 자민당에 손에 있었고, 자민당의 최대 계파가 그 권력을 향유했다.

그리고 최대 계파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코시자와와 같은 막후 권력이었다.

전쟁 이전부터 막후에서 일본을 지배하던 코시자와 가문의 가주가 총리에게 나이초와 국공의 힘을 빌리겠다고 했다.

-대답이 없군.

전화기 너머로 코시자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총리는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불쾌감을 느꼈다.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하는 거지?

총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가 해야 하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총리가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고맙군.

코시자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고마움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닙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총리가 말했다.

그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어투로.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총리는 귀에서 전화기를 떼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총리는 잠시 동안 그 화면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코시자와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일본 우익 원로들의 지원이 없이는 절대로 이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선거는 언제나 자민당이 승리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문제는 자민당 내에서 주도권을 어느 계파가 잡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코시자와 세력의 지원 없이는 절대로 자민당 내 주도 계파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들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호출 버튼을 눌렀다.

몇 초도 안 되어 문이 열리고 공관 비서관 중 하나가 들어왔다.

“니시무라(西村)를 불러오게.”

총리는 나이초의 수장인 내각정보관을 호출했다.

***

서용석.

그 이름이 밀러 국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규호에게 반사적으로 감정의 동요가 찾아왔다. 감정의 동요는 한규호의 표정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고,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게 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직할 535 특수작전대대 정찰대 특무상사.

밀러 국장은 한규호의 표정 변화에 관심 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대남 작전의 최전선에 서 있는 최정예 요원 중 하나. 1990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서 전술교관을 맡았고, 덩달아 몇 가지 작전을 수행.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활동했던 기록이 있고.

밀러 국장은 서용석의 과거 경력에 대해서 읊었다.

그의 눈은 서류나 프롬프터가 아닌 한규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규호의 시선도 밀러 국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위장 여권은 중국 국적의 후앙구오쾅(黃国强). 처음 사용된 시기는 1998년.

중국 여권?

한규호의 머리에 의문표가 떴다.

-98년에 벌어진 2차 콩고전쟁에서 정부군의 군사 코디네이터 활동한 기록이 있더군. 당시 열세였던 카빌라 정부군은 제3세계 국가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용병을 고용했는데, 그때 그 여권이 처음 사용되었고, MSS(중국국가안전부)에서 신분을 만들어 준 것으로 추측하고 있네.

북한은 자신들이 키워 낸 인간 병기들을 세계 여러 곳에 군사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수출했다.

1, 2차 걸프전쟁, 그 이전이 이란·이라크 전장 등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쪽 업계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분이 필요했다.

전쟁 중의 이라크라 하더라도, 3국을 경유하기 위해서는 여권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북한의 여권은 효력이 없다.

중국, MSS가 북한의 뒤를 봐주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서용석쯤 되는 인물이면 당연히 전 세계에서 그 무력을 팔고 다녔을 텐데,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신분이 필요했을 것이고, 어딘가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인데.

왜 MSS를 떠올리지 못한 것일까?

한규호는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MSS와 관련이 깊고,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중국과 거래가 있었겠지. 서용석 그자가 콩고를 다녀간 이후, 카빌라 정권은 북한 남포항에 자원을 가득 싫은 화물선을 보냈고, 중국기업은 자원채굴권을 획득했으니까.

한규호의 시선은 여전히 국장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꼭 군사 코디네이터 역할만 한 것 같지는 않더군. 히트맨 일도 했겠지. 2001년에 오사카에 입국한 기록이 있더군. 당시 오사카 외곽에서 조총련 간부 중 하나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시기가 일치하니까.

한규호는 숨을 들이마셨었다.

트레이시에게 그 이름을 말해 준 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CIA는 많은 정보를 찾아냈다.

한규호가 몇 년 동안 노력했어도 얻어 내지 못한 정보가 고작 며칠 사이에.

“……내가 원한 정보는 그런 것이 아닌데.”

하지만 한규호는 그런 마음을 숨긴채,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자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예전에 무엇을 했는지가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는 국장을 바라보았다.

밀러 국장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처음 스크린의 투영되었던 그 무표정한 얼굴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파울로 까밀로 스즈키(Paulo Camilo Suzuki).

밀러 국장이 이름 하나를 말했다.

한규호는 눈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감추지 못했다.

-유럽의 산업폐기물을 수입해 남미 개발도상국에 매립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일본계 브라질인. 그리고 서용석이라는 그 남자가 베네수엘라에서 출국할 때 사용한 신분.

한규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처음으로 한규호가 원하는 정보가 국장의 입에서 나왔다.

“어디로 갔소?”

한규호가 물었다.

밀러 국장은 한규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규호와 마찬가지로 스크린 너머의 한규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침묵을 참지 못한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방콕.

밀러 국장이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6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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