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63) >
-반갑군.
스크린 너머의 국장이 말했다.
한규호는 스크린 위에 떠 있는 밀러 국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는 것을 인사를 대신했다.
첩보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에게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은 인사였다.
한규호는 그 눈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신시아 챔버와 대화를 할 때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눈동자는 실제로 마주 보는 것처럼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었다.
아무리 해상도가 높아도 주사율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한규호는 밀러 국장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한규호를 밀러 국장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 같지 않은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마다는 어찌 되었나?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밀러 국장이었다.
“살아는 있었소,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환은 외부로 돌출되어 있지만, 내부 장기의 일종이었다.
그래서 고환은 복막으로 싸여 있고, 고환을 싸고 있는 복막에는 감각신경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 감각신경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고환 부위의 심각한 부상은 사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실제로 고환에 총상을 입은 경우, 출혈이 아니라 충격으로 인해 사망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지금은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규호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까지 시마다는 살아 있었다.
한규호가 그의 고환을 박살 낸 후, 같이 온 요원이 시마다의 전화로 직접 119에 신고를 하고 두 사람이 시마다의 아지트를 나올 때까지, 시마다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직접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밀러 국장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한규호는 국장에 말에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해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밀러 국장은 그의 상관이 아니었고,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의도로 직접 시마다를 손보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뭔가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서 코시자와가 시킨 것처럼 시나리오를 쓰기는 했지만, 한규호는 시마다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왕이면 한규호 자신의 손을 직접 벌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코시자와도 직접 처리할 생각인가?
그런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밀러 국장이 물었다.
“뭐…… 생각 중이오.”
한규호가 말했다.
***
코시자와 회장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는 표정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내각정보조사실 내각정보집약센터 히사키 반장의 전화였다.
몇 시간 전, 코시자와 회장을 직접 만나 1차 보고를 한 히사키 반장은 다시 조사에 들어갔다.
애블린과 츠네타카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처리하기 위해서.
그러했기에, 전화기에 히사키 반장의 이름이 떴을 때 코시자와 회장은 그들이 찾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보고를 듣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이야기는 코시자와 회장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사키 반장이 전달한 내용에 따르면, 시마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지금 긴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2시간 전, 구명구급센터에 전화가 걸려왔다.
도쿄 외곽의 한 건물에 응급차를 보내 달라는 신원 미상 남자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신고가 들어온 곳으로 긴급 출동한 응급차가 발견한 것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었다.
비서와 운전사로 보이는 두 사람은 건물 외부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은 외상은 없이 단지 의식만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건물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발견되었다.
지하실 입구 근처에서는 야쿠자 조직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턱과 관자놀이 부분에서 찰과상이 관찰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지하 가장 깊숙한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부상이 가장 심했다.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남자가 미약한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기에 응급 요원들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만약 신음 소리가 없었다면 사망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끔찍한 상태로 발견된 것.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부상 정도가 아니었다.
부상자의 정체였다.
시체로 오인될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은 남자가 시마다였다는 사실을 병원 측에서 알게 되었고, 시마다의 신원을 확인한 병원은 빠르게 경찰에 알렸다.
의료진에서는 시마다가 입은 부상이 외부 충격, 즉 폭행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했다.
현직 중의원이 도쿄 외곽의 한 건물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폭행에 의한 것이라는 신고를 받은 경찰은 심각성을 인지하고 재빠르게 정보를 봉인했다.
병원 관계자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기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각 신문사 데스크를 통해서 기사를 막았다.
물론 정보가 봉인되었다고 해도 나이초의 요원인 히사키 반장에게는 그 정보가 접수되었다.
히사키 반장은 바로 경찰에 확인작업을 거쳤고, 정보가 사실임이 확인되자마자 코시자와 회장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를 내려놓은 코시자와는 생각을 정리했다.
구명구급센터로 걸려온 전화는 시마다의 번호라고 했다.
그리고 구급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119에 신고 전화를 했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가해자가 전화를 한 것이다. 가해자가 직접 시마다를 린치하고, 응급차를 부른 것이다.
단순한 린치가 아니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행위라는 의미였다.
시마다에게는 적이 많았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자격 미달이었고, 자격 미달이었음에도 높은 자리에 올라있었으니까.
시마다가 당한 린치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코시자와 회장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가 다치든 불구가 되어도, 혹시 죽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관계가 있다면?
코시자와 회장은 시마다에 대한 린치가 어제 일어난 일과 관계가 없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코시자와는 더이상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꼬여 있다.
아키타에서의 발생한 갑작스런 실종이나, 츠네타카와 애블린의 행방불명도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
몇 시간 전에 나이초의 히사키 반장과 우선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은 츠네타카를 찾는다.
그리고 자살시킨다.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공기가 가라앉으면 그때 어디서부터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 하나하나 복기해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시마다가 다쳤다?
코시자와 회장이 모르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고, 그 힘이 상황을 비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사실이 불쾌했다.
계획에서 어그러지는 것이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는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코시자와 회장은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전화를 들어 올린 다음 번호를 눌렀다.
짧은 수화음이 울리고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총리를 연결해 주게.”
코시자와 회장이 말했다.
***
한규호는 코시자와 회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그 말투는 짧고, 건조했다. CIA 국장에 대한 예의는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한규호는 국장의 얼굴에 감정 변화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이번 작전에서 독립요원 한규호는 CIA에 고용된 구조였다.
통제하는 주체는 CIA이고, 한규호는 그저 CIA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규호는 CIA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받기는커녕,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오히려 CIA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지금은 CIA의 국장 앞에서 예의 없는 말투로 응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러 국장은 한규호의 말투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하게.
밀러 국장이 코시자와를 어떻게 할지 한규호의 의지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의미로 말했다.
“그거 고맙군요.”
한규호가 다시 짧게 말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한규호는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포커 테이블의 헤즈업(Heads-up, 테이블에 일대일로 남아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주도권은 한규호가 가지고 있다.
밀러 국장이 베팅할 차례였고, 한규호는 그저 그가 거는 판돈을 보고 콜을 할 것인지 레이즈를 할 것인지, 아니면 폴드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면 될 뿐이었다.
한규호는 밀러 국장이 판돈으로 무엇을 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밀러 국장도 결국 같은 패를 꺼낼 것이다.
좋게 말하면 스카우트 제의, 나쁘게 말하면 CIA의 개가 되라는 그런 이야기.
트레이시도, 신시아 챔버도 같은 말을 했다.
CIA가 한규호를 원하고 있다고.
한규호는 CIA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었다.
이용할 생각이었지, CIA의 지시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CIA의 국장쯤 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설마 계약금을 잔뜩 안겨 주겠다는 뻔한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규호는 말없이 국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찌되었든 신시아 챔버를 상대하는 것보다 지금이 편하다고 한규호는 생각했다.
자, 어서 판돈을 걸어 보시지.
한규호는 국장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국장이 말했다.
-조카를 잘 보살펴 준 것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밀러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뭐, 별말씀을.”
한규호가 말했다.
-그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다고 하더군.
한규호는 밀러 국장이 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밀러 국장은 ‘기프티드’라는 칩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라……. 재미있더군요. 해부를 하려고 했는데 메스가 닿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주 인상 깊었죠.”
한규호가 말했다.
-해부를 하려고 했던 적은 없군.
국장이 한규호의 말을 정정했다.
“뭐, 비슷한 것 같던데.”
한규호가 말했다.
앤 챔버는 그녀가 염동력, 그리고 염동력에 기반을 둔 완전 보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실제로 보여주었다.
미국은 그녀가 가진 보호 능력의 범위를 테스트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고 했지. 다트에서 컴포지션4 폭약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한규호는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로 국장을 도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장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 만났던 여자도 그랬고, 지금 자신에 앞에 서 있는 국장도 그렇다.
이쪽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특수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 데 익숙했다.
“배네수엘라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본론을 듣고 싶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눈동자를 통해 진위를 확인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국장과의 긴 대화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규호는 생각했다.
한규호의 말에 국장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서용석.
그리고 밀러 국장의 입에서 한규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왔다.
< MISSION 04 : 츠바키 (6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