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62) >
현직 중의원 시마다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안겨 준 한규호가 다시 미국대사관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골프 섹션 내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골프 섹션에 임시 상황실을 구축한 CIA가 임시 구금실로 마련해 놓은 곳이었다.
한규호가 다가서자 임시 구금실 앞을 지키고 있던 요원 둘은 마치 상관을 대하는 자세로 비켜섰다.
한규호가 문을 열자, 있는 것이라고는 이동식 폴딩 침대 하나뿐인 단조로운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다리를 모으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는 아키타의 고급 료칸 문양이 들어간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한규호가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여자는 마치 한규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침대를 제외하고는 딱히 앉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규호는 침대로 다가가 여자 옆에 앉았다.
그리 튼튼하지 않은 이동식 폴딩 침대는 한규호의 몸무게가 실리자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한규호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정면의 벽만을 보고 있었다.
침대에 앉은 한규호도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미동도 없이 벽에 시선을 주었다.
“여기가 어디죠?”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유카타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입을 열었음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한규호도 여전히 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한규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여자의 얼굴은 한규호의 시야 안에 있었다.
눈이 아닌 감각으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여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규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여자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규호는 그제야 이 공간에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규호는 자신이 따로 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여자에게 접근하지 말 것을 지시했었다.
한규호가 시마다에게 징벌을 내리고 오는 동안 CIA가 그의 지시를 따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깨어난 그녀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혼자 있었을 것이다.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급한가?”
한규호가 말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시선을 한규호의 고정한 채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한규호를 바라보던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무실 구석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은 다음, 유카타를 걷어 올렸다.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그녀의 둔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아키타에서 한규호가 그녀를 재웠고, 그 상태에서 여자 요원이 그 위에 유카타만 입혀 이곳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한규호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물줄기가 바닥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참은 듯, 강한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한규호의 시선은 여전히 벽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감각에는 그녀의 둔부와 바닥을 흐르는 액체가 다 보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소리가 잦아들었고, 소변을 본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실례했어요.”
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한규호는 이 여자를 상대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밀러 국장은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살짝 쓸었다.
스튜와 같이 시마다를 만나러 갔던 요원이 작성한 보고서가 밀러 국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스튜가 쓴 시나리오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스튜가 어떻게 시마다를 단죄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급하게 작성했는지 러프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자세하게 조금 전 상황이 묘사되어 있었다.
밀러 국장은 스튜에 대한 정보가 누적될 때마다 그를 직접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프티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그를 알게 되면 될수록,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스튜와 대면한 적 없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 없었다.
그저 서류, 그뿐이었다.
서류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유니크했다.
어떨 때는 얼음처럼 차갑다가도, 또 어떨 때는 용암처럼 뜨겁다.
단순히 신체적 능력만을 가지고 그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밀러 국장은 그렇게도 생각했다. 일종의 과대평가일 수도 있다고.
그가 기프티드이기에,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감안해도, 스튜가 유니크한 캐릭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새로운 보고서가 밀러 국장에게 전달되었다.
직접 시마다를 처리하고 온 한규호가 카멜리아를 만나러 갔다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재미있군.
밀러 국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재미있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소변을 다 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을 봤으니 이제 급할 것 없다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벽을 보면서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를 생각했다.
일종의 심리전일 것이다.
구금되어 있지만,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육체를 이용하기 위한 포석이라던가.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둔부를 드러냄으로써 그녀의 여성성을 어필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규호는 아키타의 고급 료칸 노천탕에서 보였던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떠올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여자의 입이 열렸다.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되나요?”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벽을 향해 있었다.
한규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머리는 부스스해지고, 얼굴에는 차가운 분위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옆얼굴이었다.
“그건 당신에게 달렸지.”
한규호가 말했다.
“여기는 어딘가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한규호가 물었다.
조금 전 대화가 반복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자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UC데이비스 양조학 박사 브랜든 허드슨?”
한규호가 말했다.
여자의 고개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한규호의 시선과 교차 되었다.
“허드슨 박사님은 왜 저를 구금하신 거죠?”
여자가 물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도 여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 가방에는 신기한 물체가 들어 있더군. 주사기처럼 어떤 물질을 신체에 투여하는 용도로. 아마도 정사 중에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물질이 아닐까. 아직 성분 분석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신체에 부담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조되었다는 결과가 나오겠지. 내기를 해도 좋아.”
한규호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포착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당신이 누군지,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는지가 중요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규호는 그녀가 입을 열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구금이라고 표현했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이 구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지. 뭐. 길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다고 말했으면, 적어도 자리라도 비켜 줬을 텐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문으로 걸어갔다.
“양동이라도 넣어 주라고 이야기해 두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카멜리아는 남자가 나가면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다시 이 공간에는 그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벽으로 향했다.
남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정면의 벽이었다.
그 시선은 벽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 공간 전체를 스캔했다.
사무실 구석에 자신이 본 소변이 보였다.
그녀는 일부러 소변을 참았다.
만약 누군가가 온다면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화장실을 가게 해 준다면 이 공간을 나가게 되고, 이 좁은 사무실을 벗어나면,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에, 화장실을 보내 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엉덩이를 드러내고, 타인 앞에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동요를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 물론 유혹할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러나 그녀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방금 문을 닫고 나간 남자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아키타에서 보였던 허드슨 박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변 자국에서 멈춰 있던 카멜리아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사무실의 다른 공간을 다시 둘러보았다.
자신이 누워 있던 이동식 폴딩 침대를 제외하고는 장소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동식 침대도 홈쇼핑에서 파는 특색 없는 싸구려 침대였다.
카멜리아의 시선이 다시 침대에서 멈추었다.
어제 료칸의 노천탕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이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이 침대 위에서 꿈을 꾸었다.
오랜만이었다.
그날의 꿈을 꾼 것은.
이제는 의미 따위는 하나도 없는 기억이었지만, 그 기억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카멜리아는 침대를 보면서 꿈을 다시 상기했다.
꽃, 친구, 엄마, 엉성한 꽃다발, 집 앞에 서 있던 커다란 차, 군인,
울고 있는 엄마.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그 남자.
그 남자.
예쁘게 키웠군.
처음 들었던 그의 말.
카멜리아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마음속에서 혐오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카멜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를 지우기 위해 다른 남자를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까지 자신을 브랜든 허드슨이라고 주장하는 그 남자.
누구인지, 어디 소속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남자가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쪽 요원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카멜리아는 생각했다.
미국 방위산업체 에이전트의 남편이 다른 나라 요원일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야 했다.
미국 쪽 요원이라면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
카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조국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니까.
***
한규호가 정체불명의 여자가 구금되어 있던 사무실을 나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상황을 담당하는 로랜드 요원은 한규호에게 다가와 랭리에서 통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절묘하군.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 랭리와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기다리라고 할까?
막상 통신 요청이 들어오자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CIA 놈들이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딱 들어맞은 타이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한규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로랜드라는 요원은 간절한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차피 이야기하기는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사관 통신실로 발을 옮겼다.
한규호가 통신실로 들어서자, 처음 통신실에 발을 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통신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아 있던 한 명은 한규호에게 헤드셋을 건네주고, 콘솔을 조작해 랭리와 연결한 다음 똑같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모든 것이 지난번과 같았다.
스크린에 떠 있는 사람만을 제외한다면.
스크린에는 한규호가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 투영되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를 처음 봤음에도 그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정보기관 CIA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 네일 밀러 국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6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