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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30화 (231/386)

< MISSION 04 : 츠바키 (58) >

통신실에서 나온 한규호는 살짝 피곤함을 느꼈다.

샤워를 하기 전에 느꼈던 피로와는 다른 피로감이었다.

지금의 피로감은 정신적 피로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만약, 통신실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신시아 챔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이 같은 피곤함은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국장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복잡하고 요상한 관계로 엮여 있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한규호는 휘둘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심하군.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면서 한규호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한규호가 다시 고개를 들자, 그를 기다리는 세 명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담당하는 로랜드, 아키타에서 같이 헬기를 타고 온 요원, 그리고 같이 트레이시를 구출하고, 야쿠자를 잡아 온 요원, 이 세 명이었다.

차라리 이들이 상대하기 편했다.

적어도 그들은 한규호가 인상을 쓰면 입은 닫고 있으니까.

“가시죠.”

로랜드 요원이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랐다.

그 뒤로 두 사람의 요원이 따라왔다.

***

“시마다?”

한규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한규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의원? 일본 국회의 국회의원? 그가 왜 트레이시를 노렸지?

“프로필 띄우겠습니다.”

로랜드는 그렇게 말하고 콘솔 버튼을 눌렀다.

회의실의 조명이 조도가 낮아지면서 프로젝터가 비추는 빛이 스크린을 밝게 빛냈다.

스크린에는 한 장년 남자의 사진과 프로필이 떠 있었다.

한규호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시마다 아리히로(市万田存理). 7선 중의원입니다. 소속 정당은 일본사회당(日本社會党)입니다. 제1여당에서 최근 분당했고, 분당했음에도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본사회당은 이름이 비슷한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보수주의, 내셔널리즘을 주요 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로랜드는 스크린에 뜬 인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일본 중의원 시마다는 애블린 요원을 납치하고 성폭행을 한 다음 영상을 찍을 것을 니시야마구치구미에 지시했습니다. 니시야마구치구미는 최근 고베야마구치구미에서 분파된 신흥 조직으로, 도쿄의 하부 조직인 도요카이에 다시 일을 맡겼습니다. 도요카이는…….”

로랜드는 말을 멈추었다. 한규호가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한규호가 물었다.

“시마다가 어째서 애블린 요원을 노렸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마다가 왜 트레이시를 노렸는지 한규호는 알고 있었다.

스크린에 뜬 화면을 본 순간, 한규호는 짜증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그 얼굴이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하네다로 오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던 그 재수 없는 놈이었다.

비행 내내 승무원을 괴롭히고, 트레이시에게는 음흉한 눈빛을, 자신에게는 짜증나는 눈빛을 보내던 그 자식이었다.

“어제 애블린이 혼자였다는 사실을 저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한규호가 말했다.

***

일본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市万田存理)는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그린샤(특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불쾌했다. 그것도 매우 불쾌했다. 그런 그의 마음이 투영된 얼굴도 잔뜩 찌푸려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시마다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향의 음식을 먹고, 고향의 술도 적당히 마시고, 고향의 공기를 마셨으며, 어릴 적 추억이 남아 있는 본가로 돌아와 숙면을 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여자를 확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고, 내일 영상을 전달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애처럼 두근거림에 잠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고향의 술과 본가의 공기 덕분에 오랜만에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시마다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영상을 언제쯤 받아 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니시야마구치구미와 통화에서부터 지금의 불쾌함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영상이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던 시미다는 아직 확인 중이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들었다.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미친 소리도 들었다.

시마다는 성탄절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고 눈을 떴다가 비어 있는 양말을 본 것 같은 실망감을 느꼈다.

멍청한 야쿠자 놈들.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

분노를 누르면서 지역 당협위원장과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후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본가를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도착할 때까지 니시야마구치구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연락이 오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시마다는 기대가 컸다.

요 며칠 동안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번뇌가 드디어 해결되는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의 기대가 어그러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리고 시마다는 실망에서 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실망을 분노로 전환되었고, 그 분노는 니시야마구치구미를 향해 있었다.

시마다는 야쿠자 놈들이 무슨 의도로 자신의 기대를 저버렸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영상을 확보한 야쿠자 놈들이 지금 감히 자신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천한 놈들.

주인을 몰라보는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몽둥이로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칼을 뽑을 수밖에 없다.

시마다는 몽둥이를 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칼을 뽑아 직접 개의 목을 칠 것이다.

그가 고용할 다른 개들에게, 주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보여야 하니까.

***

한규호는 그게 의문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시마다가 트레이시에게 욕정을 품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비행기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다 치자.

추잡한 욕망을 실현시키겠다고 결심했다고 치자.

중의원, 그것도 7선 중의원이라고 하니까 권력을 이용해 애블린 허드슨의 정체도 알아내고, 위치도 알아냈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어제였을까?

마치, 남편인 자신이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왜 하필 어제였을까?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양아치들이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요원도 아니고 동네 양아치들이다. 한규호의 감각에 걸리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아니, 한규호의 감각까지 가져다 쓰지 않더라도 CIA가 지키고 있다. 그들을 지켜보는 다른 눈도 있었다.

그런데 동네 양아치들이 그런 감시망을 뚫었다?

말도 안 된다.

양아치들은 어제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계획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지정된 날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어젯밤 지역구로 내려가 그곳에서 묶고는 지금 다시 도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로랜드가 답했다.

“흠…….”

한규호는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트레이시가 욕을 보는 사이에, 그 일을 지시한 주범은 자리를 비웠다. 양아치들은 자수할 계획이었다.

알리바이.

한규호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일부러 자리를 비웠군.

한규호의 생각이었다.

이유가 뭘까?

시마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현직 중의원을 대사관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오라고 했다손 치더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가서 직접 모셔 오는 방법이 제일 확실하다. 오늘 새벽에 모셔 온 도요카이의 간부처럼.

물론 CIA는 부담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외교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는 미국이라고 해도, 타국의 국회의원을 납치해 오는 일이니까.

귀찮은데 그냥 잡아 올까.

하지만 상관없다. 시마다가 일본의 중의원이든, 미국이 부담을 느끼든, 한규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한규호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로랜드는 한규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도쿄역에 요원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추가로 지시할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니. 우선 위치만 파악해 주고…….”

한규호가 말했다.

다른 세 명의 시선이 한규호의 입에 고정되었다.

“내 친구는 어디에 있소?”

***

상황실에서 나온 한규호가 찾아간 곳은 치료 구역이었다.

그러나 이번 목적지는 트레이시의 병실이 아니었다.

한규호는 병실 중 한 곳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목불인견의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미약한 신음 소리만 겨우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잘생기고 젠틀한 츠네타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규호는 침대로 다가가자,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한규호가 말했다.

“……조금 전에 막 잠들었는데요.”

간호사가 말했다.

“말할 수 있습니까?”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간호사는 한규호가 한 질문의 의도를 그제야 이해했다.

한규호는 그가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가능은…… 합니다.”

간호사의 말을 들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병실 밖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요원의 모습을 보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히로시.”

병실에 두 사람만 남자 한규호가 츠네타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츠네타카는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반응이 없었다.

코뼈와 턱뼈, 그리고 갈비뼈가 골절되었다고 했다.

고통이 심할 것이다.

잠들지 못할 정도의 고통일 터인데, 츠네타카는 잠들어 있었다.

강한 진통제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츠네타카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고, 맥을 확인한 후 약하게 진기를 불어 넣었다.

한규호의 손에서 흘러 들어간 진기는 츠네타카의 온몸을 부드럽게 타고 움직이며 그의 신경을 조심스럽게 자극했다.

고통을 주기 위한 진기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히로시.”

어느 정도 진기가 츠네타카의 몸을 회복시켰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한규호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츠네타카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이 뜨였고,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그러나 퉁퉁 부어 있는 그의 눈도, 깁스로 고정되어 있는 목도 그리 많이 움직이지는 못했다.

“말할 수 있겠나?”

츠네타카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내 말은 들리나?”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츠네타카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우선은 듣고만 있으라고.”

츠네타카의 목을 고정하고 있는 깁스 때문에 츠네타카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지만, 한규호는 그가 긍정을 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 자네를 습격한 놈들은 시마다가 보낸 놈들이더군.”

한규호는 거의 뜨지 못한 시마다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눈에 담겨 있는 놀람을 보았다.

한규호는 중의원이라는 이야기도, 이름이 아리히로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고, 츠네타카는 시마다라는 성만으로 한 사람을 특정했다.

“뭐, 시마다도 그렇고, 자네도 애블린을 어찌해 보겠다고 일을 벌인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건 모르겠단 말이지. 어떻게 시마다가 어제가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말이지.”

한규호는 여전히 츠네타카의 눈을 보고 있었다.

츠네타카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한규호는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 뭐랄까. 복잡한 기분이야. 솔직히 자네에게 화가 나. 그 감정이 가장 큰데, 다른 한편으로는 좀 안쓰럽달까. 그런 기분도 드는군. 무슨 말인지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한규호는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군. 말도 못 하는 사람에게 괜히 길게 이야기해 봤자 힘들기만 할 테니 짧게 이야기하지. 여기는 미국 대사관의 의료실이네. 주일 미국 대사관. 자네가 왜 병원이 아닌 이곳에 있는지 아나?”

츠네타카의 눈빛에 놀라움이 번졌다. 한규호는 당연히 그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자네가 미국 법정에 서야 하기 때문이지.”

한규호가 던진 폭탄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냈다.

“그, 그게 무, 무슨…….”

츠네타카가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한규호는 살짝 웃었다.

“말할 수 있었군. 다행이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 정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애블린 허드슨에게 피해를 입힌 용의자 두 명을 찾아냈네. 용의자 두 사람을 미국 법정에 세우고, 미국 법에 따라서 처벌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두 명 중 한 사람이 일본 국회의 중의원인 시마다라는 것이지. 이해되나?”

거기까지 말한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병실 한쪽에 놓인 냉장고를 열고 안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츠네타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공소장에는 이렇게 적힐 거야. 자네는 에블린에게 데이트 강간 약물인 GHB를 투여했고, 정신을 잃게 만들었지. 그리고 미리 고용한 어린놈들 몇 명을 이용해 어딘가로 납치한 다음 성폭행을 하려고 했고. 그러다가 그 어린놈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그 어린놈들이 우발적으로 자네를 폭행했고. 뭔가 문제가 커질 것을 알게 된 놈들은 애블린을 두고 도망가려다가 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발각되면서 애블린도 구출하게 되었다고.”

한규호는 한 손에 물병을 들고 츠네타카에게 걸어가면서 말했다.

츠네타카의 눈에 공포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 MISSION 04 : 츠바키 (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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