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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29화 (230/386)

< MISSION 04 : 츠바키 (57) >

“저와 자라고 지시했냐는 의미입니다만.”

예상치 못한 한규호의 질문에 신시아 챔버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트레이시가 국장에게 물었다.

일본에 가서 그와 잠을 자야 하냐고.

국장은 그녀에게 그러한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물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유혹하라든가, 잠을 자라는 지시는 없었다.

-그런 지시는 없었어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 없이 그저 신시아 챔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스터 한,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한규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스크린에 투영된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음, 제 눈에는 지금 미스터 한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혹시라도 제가 무언가 미스터 한의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미소를 되찾은 신시아 챔버의 말투는 마치 심통 난 어린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

-트레이시에게 그러한 지시는 내리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로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한규호는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한규호가 어떻게 해야 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신시아 챔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마워요.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규호가 물었다.

-트레이시를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좋아하겠군요.

한규호는 다시 한번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대화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한규호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서 그 모습이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떤가요?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자고 있습니다.”

한규호가 답했다.

-괜찮은가요?

한규호는 스크린 너머의 신시아 챔버가 트레이시의 지금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장을 대신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트레이시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가지고 분위기를 바꿔 볼까 하다가,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외상은 없습니다.”

한규호는 그저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녀를 잘 보살펴 줘요.

“국장은 왜 나와 이야기하길 원한 거죠?”

한규호는 주제를 바꿨다. 다른 주제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신시아 챔버는 여전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이 통신이 왜 필요한 거죠?”

한규호가 조금 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죠. 우선은 지금 상황에서 국장님을 제외하고 미스터 한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서.

“두 번째는?”

-보고 싶었어요. 내 딸들의 마음을 흔든 남자가 누구인지.

“딸들……?”

-앤하고 규. 아, 규가 누구냐 하면…….

“압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맞아요. 얼마 전 통화를 했었죠? 그녀가 잘 있다고 안 하던가요?

한규호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는 것도, 이 분위기를 바꾸는 것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 너머 앤 챔버의 어머니는 철옹성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아닙니다.”

한규호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어머, 그거 실례에요. 하던 말을 멈추는 것은.

한규호는 벌서 몇 번인지 모를 한숨으로 또 내쉬었다.

차라리 국장이랑 이야기하는 게 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보살펴…… 뭐, 고맙다는…….”

한규호는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왜 고맙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후회가 찾아왔다.

-오히려 제가 미스터 한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요.

한규호는 이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우리 앤을 지켜 주고, 규도 보내 주고, 그리고 우리 집 막내딸도 미스터 한이 구해 주었고.

우리 집 막내딸. 베르나를 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한규호는 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말했다.

지금 한규호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최대한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어머, 사담이 길어졌네요. 대사님이 알면 기분 나빠하시겠어요. 대사관 통신실을 비워 달라고 해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면. 뭐, 하지만 모르시겠죠.

한규호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서 빨리 이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대화를 계속 나누다가는 챔버가에 놀러 오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고 싶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한규호는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무뚝뚝해요.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신시아 챔버는 딸의 남자친구를 만난 엄마 모드로 말했다.

“챔버 부인.”

한규호가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이상 그만하라는 경고를 담기 위해서.

물론 그녀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호호호. 너무 기다렸던 만남이라서. 알았어요, 그런 표정 하지 말고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아마 국장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게 아닐까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는 거예요. 더 이상 일본에서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

-지금 상황에서 브랜든 허드슨 역할을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요? 트레이시도 쉬어야 할 것 같고. 슬슬 일본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뭐. 우리 마음 같아서야 미국으로 와 줬으면 좋겠는데. 아, 단순한 방문 이야기에요. 같이 일하는 건 천천히 조건을 맞춰 봐야겠죠? 그냥 마음 편하게 트레이시와 함께 미국으로 와서…….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까?”

한규호가 챔버가로 초대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말을 끊었다.

-원하시는 대로. 미스터 한이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다른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브랜든 허드슨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아요.

신시아 챔버의 말을 들은 한규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미국이 가진 힘은 이런 것이다. 신분을 만들고, 만들어진 신분으로 국경을 마음껏 넘어 다닐 수 있다.

변태같이 디테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던 브랜든 허드슨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CIA는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신분에도 쓸데없는 설정이 따라올는지 한규호는 조금 궁금해졌다.

CIA와 같이 일을 하면 편하긴 편하겠군.

“조금 더 이곳에 있을 생각입니다만…….”

한규호가 말했다.

-음, 뭐 그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일본에 더 있을 이유가 있나요?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채무는 갚는 성격이라서요.”

한규호가 말했다.

신시아 챔버는 한규호의 말을 이해했다.

-우리가 대신 갚아 줄 수 있어요.

“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요청하도록 하지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우리는 최대한 돕도록 할게요.

“최대한 돕는다라. 최대한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나는 국장이 아니라서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아마도 가능한 모든 것?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한규호는 신시아 챔버의 말에 잠시 대답하지 않고 텀을 주었다.

아마도. 명확하지 않은 대답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인데요.”

한규호가 말했다.

-뭐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돈이 필요하다면 전혀 문제없고요. 1백만 달러 정도는 10분 안에 현찰로 가져다줄 수 있어요. 10분은 힘들려나? 30분은 확실히 가능하고요. 하지만 뭐랄까, 음……. 국장님을 때리고 싶다든가 그런 건 안 되겠죠?

신시아 챔버의 말에 한규호는 통신실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국장을 때린다. 괜찮은 생각이군.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뭐죠?

“그 여자는 누구죠?”

한규호가 물었다.

-그 여자? 누굴 말하는 거죠?

“아키타 여행 가이드. 정체불명의 주사액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미인.”

한규호는 신시아 챔버가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체는 몰라도 존재는 알 것이다.

한규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신시아 챔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물론 한규호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음, 그 질문에 제가 답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요.

“알기는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노코멘트 할게요. 곤란하네요. 국장님께 물어보세요.

한규호는 신시아 챔버의 대답에서 조금 전 샤워실에서 했던 결정에 확신을 가졌다.

“그 여자,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군요.”

통신실에 들어오기 전에 샤워를 하면서 한규호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런 그녀를 CIA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란 쉬운 일도 아니었고, 고문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가야 되겠다고 결정을 한 것이다.

한규호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미국 애들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김형원 사장에게 맡겨 두면 알아서 잘 가둬 둘 것이다.

그녀에게 가치가 있다면, 예를 들어 어딘가의 요원이라면 그녀를 되돌려 받기 위해 접촉을 해 올 것이다. 아니면 구출하러 오든가.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한규호는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면 좋고, 뭐 못 알아내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가치가 없다면 그냥 풀어 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 써서 개 줄 필요는 없겠지.

-……흠.

처음으로 신시아 챔버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도 사라졌다.

좋군.

한규호는 스크린 너머의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전 방위성 사무차관이자 현재 코시자와중공업에서 코시자와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는 시게노 이오 상무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일본의 활동우익 단체는 타이코우카이의 회장 마에하라 키이지가 서 있었다.

시게노 상무는 우익계 야쿠자 조직의 수장인 마에하라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때는 요정 같은 은밀한 장소를 이용했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와 만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사무실로 마에하라를 호출한 것이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상황은?”

시게노 상무가 물었다.

“파악 중입니다.”

마에하라가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시게노 상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 있는 그에게 다가 자신의 명패를 집어 들어 마에하라의 머리를 후려쳤다.

두꺼운 크리스털 명패로 머리를 맞았지만 마에하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파악한 데까지 말해.”

시게노 상무가 물었다.

“여자가 어젯밤 료칸에 투숙하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시간이 7시 22분입니다. 저녁을 먹고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여자는 첫 번째 정사가 끝나면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가 통화를 시도했는데 전화기는 꺼져 있었습니다.”

마에하라는 명패로 맞은 부위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찢어진 두피에서 나온 피가 그의 귀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6시까지 기다렸다가 운전기사를 통해 료칸에 상황을 확인할 것을 지시했고, 료칸 종업원이 6시 10분에 브랜든 허드슨의 객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대답이 없자 리셉션에서 전화를 걸었고,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운전기사와 종업원이 다시 객실 문을 두드린 시간이 6시 13분입니다. 그리고 방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에하라가 빠르게 알고 있는 상황을 모두 이야기했다.

“매니저는?”

시게노 상무가 물었다.

가고시마에서 올라온 마리아 개트너는 후쿠오카의 한 모델 에이전시 소속이었고, 후쿠오카에서 상경할 때 매니저가 같이 올라왔었다.

“연락이 되질 않고 있습니다.”

시게노 상무에 손에 들린 명패가 다시 한번 마에하라의 옆머리에 작렬했다.

조금 전 맞은 부위와 같은 부위였다.

마에하라는 두 번째 충격을 버텨 내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마에하라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둥거렸다.

시게노 상무가 쓰러진 마에하라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찢어진 부위를 다시 명패로 맞았다. 상처가 더욱 커졌고, 출혈도 늘어났다. 그러나 시게노 상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설사 지금 마에하라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시게노 상무는 손에 든 명패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료칸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밤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것은 창녀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를 공략하러 간 츠네타카도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다.

시게노 상무는 하룻밤, 아니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어나.”

시게노 상무가 쓰러져 있는 마에하라에게 말했다.

마에하라는 떨리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찢어진 옆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방울져 떨어졌다.

“당장 찾아내.”

시게노 상무가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5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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