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56) >
다시 트레이시가 잠든 것을 확인한 한규호가 병실을 나왔을 때, 문 앞에는 두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트레이시의 전담 간호사였다.
두 사람이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준 간호사는 한규호가 나오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상황을 담당한다는 로랜드 요원이었다.
로랜드 요원이 다가와 랭리에서 통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절박함이 그의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한규호의 대답은 같았다.
“기다리라고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는 몸을 돌렸다. 우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다.
랭리와의 대화는 그다음이다.
랭리를 기다리게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디까지 한규호에게 맞춰 줄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규호는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의 몸을 적시자 어제 새벽부터 조금씩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규호는 눈을 감고 온수를 느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에 잡아 온 야쿠자 놈은 CIA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강화심문기술(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이라는 이름으로 고문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온 CIA는 야쿠자 하나쯤은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 낼 것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이슬람 광신자들에게서도 정보를 캐낸 CIA니까.
CIA는 트레이시를 납치하려고 한 배후가 누구인지를 밝혀 낼 것이고, 그 배후가 밝혀진다면 그때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면 된다.
한규호, 그가 직접 손을 쓸 것인지, 아니면 CIA에게 맡겨 둘 것인지.
간단하군.
한규호는 다음 주제로 생각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 여자. 아키타에서 자신에게 접근해 온 여자를 어떻게 할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CIA에게 맡겨 놓으면 정보를 알아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다.
그녀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활용 가치가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CIA에게 맡겨 두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한규호가 지금 그녀를 직접 심문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
장소도, 시간도 적합하지가 않았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이었고,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은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짧은 시간에 그녀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고문(拷問).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는 신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한규호는 고통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그녀는 절대로 견뎌 내지 못할 고통을 줄 수 있었다.
아직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약물의 분석 자료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그녀는 한규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그녀를 고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한규호가 1순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군.
한규호는 고문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인권의 가치를 중요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기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규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무언가 비밀을 가진 여자를 미국에 내어 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상황도 여의치 않은데, 쓸데없는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마음이었다.
어떻게 할까나…….
한규호는 물줄기를 맞으며 방법을 고민했다.
그게 좋겠군.
한규호는 결정을 내렸다.
이 방법이 가장 좋겠군.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최선인 방법을 떠올린 한규호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샤워기의 레버를 잠갔다.
***
‘기다리라고 하시오’ 이 한마디로 CIA의 국장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한 한규호가 미 대사관의 1급 보안 시설인 통신실로 들어선 것은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치바까지 가서 야쿠자 하나를 데려오고, 트레이시의 상태를 확인하고, 샤워도 하고, 여유 있는 아침밥까지 먹고 나서야 드디어 통신실에 들어선 것이다.
한규호가 통신실에 들어서자 단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통신실을 나가 버렸다.
남아 있던 한 사람은 한규호에게 다가와 통신용 헤드셋을 건네 준 다음 콘솔에 앉아서 기기를 조작했다.
“연결되었습니다.”
그의 말이 헤드셋을 통해 들어왔고, 전면 스크린에 누군가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한규호가 랭리와 통신을 하겠다고 했을 때, 로랜드라는 요원의 얼굴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한규호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고, 국장이라는 사람도 그런 얼굴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규호의 기대와는 달리, 스크린에 뜬 얼굴에는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애초에 남자도 아니었다.
한규호는 CIA 수장의 얼굴을 몰랐지만, 스크린에 떠 있는 중년 여성이 국장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화면에 상대방에 뜨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통신 요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신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미국 대사가 본토와 통신하기 위해 사용되는 1급 보안 시설에 한규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반가워요. 좋은 저녁이에요. 아, 도쿄는 오전이겠네요. 몇 시죠, 거기는?
한규호는 미소를 띠고 반갑게 인사하는 중년 여성을 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 가득 담겨 있는 반가움이 낯설었다.
“오전 10시입니다.”
한규호는 우선 그렇게 말을 꺼냈다.
“국장님과 대화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요.”
한규호가 말했다.
-국장님은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자리를 비웠어요. 미스터 한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는데,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약속이라서요. 백악관에 가셔야 했거든요.
중년 여성은 CIA 국장이 백악관에 간 이야기를 마치 옆집 남편이 펍에 간 것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럴싸하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군요. 아무튼, 처음 뵙겠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어머, 우리 처음 아니에요. 아니다. 얼굴 보는 건 처음이네요.
중년 여성이 말했다.
한규호는 잠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 통화를 했었더랬죠. 반가워요. 신시아 챔버예요. 앤의 엄마예요.
한규호는 그제야 그녀가 말한 ‘처음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알았다.
베네수엘라에서 그녀와 통화를 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앤 챔버와 통화를 할 때 옆에서 듣고 있다가 대화에 동참했었다.
“……반갑습니다, 챔버 부인.”
-신시아라고 불러 줘요.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신시아 챔버는 마치 친구 엄마처럼 친근한 말투로 한규호에게 말을 건넸다.
한규호는 그 상황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어머, 내가 너무 말을 편하게 하고 있나? 미안해요. 마치 딸 남자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 사실 앤이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준 적은 없었지만.
한규호는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주일미국대사관의 1급 보안구역인 통신실이고, 미국 대사가 본토와 중요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핫라인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죠. 솔직히 아쉽네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한규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통신을 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규호는 말을 돌렸다.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에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감상은 어떠셨어요?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어떤 감상 말씀이신지?”
-CIA 요원을 부려 본 감상 말이에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주제는 분명 바뀌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그대로였다.
“……잘하더군요. 장비도 좋고.”
한규호가 말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마음에 든다기보다…… 뭐. 종종 쓰게 해 주실 겁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그거야 미스터 한의 결정에 달렸죠.
“제가 뭘 결정하면 됩니까?”
-음,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리와 같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해 준다든가?
“흠, ‘약속’해 드리면 됩니까?”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그냥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합니다 해서는 안 되겠죠?
한규호는 자신이 왜 어색함을 느끼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말투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어투였다.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미스터 한, 야구 좋아하세요?
신시아 챔버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뭐,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메이저리그를 보시나요? 아,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있나요?
“있습니다.”
-미안해요.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괜찮습니다.”
-어떤 팀을 응원하세요?
“……의미가 있는 질문인가요?”
-아니요.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요. 저는 매리너스 팬이거든요. 시애틀 출신은 아니지만, 지금은 시애틀에 사니까.
한규호는 다시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딱히 응원하는 팀은 없습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응원하는 스포츠 팀이 있으면 삶이 좀 더 윤택해져요. 좋아하는 팀을 하나 골라 보세요. 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에요. 프로야구에는 임대(Loan)제도가 없다는 이야기.
“임대 제도……?”
-축구에는 왜 선수를 임대하고 그런 제도가 있잖아요? 근데 야구에서는 임대 제도가 없어요. 어떤 선수가 필요하면 트레이드를 해 오는 수밖에 없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시나요?
한규호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그녀는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CIA라는 팀으로의 완전 이적을.
“……이해했습니다.”
한규호는 지금 이 대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무적인 대화이다. 그 내용 또한 가볍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구단에서 뛰면 연봉도, 복지도 최고 수준으로 맞춰 드릴 수 있어요.
신시아 챔버는 마치 MLB의 스카우터라도 되는 양 그런 제안을 해 왔다.
한규호는 속으로 세 번째 한숨을 쉬었다.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한규호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이미 그 팀은 리그에서 최강 팀인데, 굳이 제가 안 가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죠.
신시아 챔버가 웃으며 한규호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양키스가 욕을 먹는 것이죠. 저는 또 언더독 취향이라.”
한규호도 그녀의 말을 받았다.
-팬으로서 언더독을 응원하는 것은 멋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선수로서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끼려면 메츠보다 양키즈가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한규호는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앤 챔버를 떠올렸다.
이런 엄마 밑에서 자란 것 치고 그녀는 얌전하고 약간 우울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군요. 사회인 야구도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 그리고.”
-그리고요?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를 하면 그저 게임만 잘하면 될 뿐이죠. 해부하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을 테니까.”
한규호의 말에 신시아 챔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웃는 미소를 되찾았다.
-무서운 말을 하네요, 미스터 한. 우리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트레이시에게 명령했나요?”
한규호가 신시아 챔버의 말을 끊었다.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리고 그 당혹감은 다시 미소로 전환되지 않고, 그 얼굴 위에 그대로 머물렀다.
-명령이라니. 무슨 의미죠?
“저와 자라고 지시했냐는 의미입니다만.”
한규호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에 투영된 앤 챔버 보호자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5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