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55) >
한규호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어둠은 온통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동쪽 하늘에도 여명이 시작될 기미는 안 보이고 있었다.
30분.
한규호는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30분이 지나면 동쪽 하늘에서 여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새벽의 여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지평선 끝에 태양이 걸리기도 전에 태양빛은 대기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지평선을 태양이 넘어서는 그 순간에는 이미 어둠은 완전히 빛에 잠식되어 버린다.
30분이면 충분하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그 시각, 그가 서 있는 곳은 치바현 후나바(船橋) 주택가였다.
니시야마구치구미의 산하 조직 중 하나인 도요카이(東洋會) 간부 중 하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맨션에서 50여 m 떨어진 위치였다.
CIA는 한규호의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
잡혀 온 양아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심문이라는 것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술술 불었다.
납치범들은 니시야마구치의 산하조직 중 하나인 도요카이의 지시를 받는 동네 양아치들이었고, 여자 하나를 납치해 영상을 찍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여자를 강간하고, 동영상 파일을 건네준 다음에, 아침에 경찰에 자수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강간치상으로 감옥에 다녀오면 조직에서 높은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 중 리더, 한규호에게 다리와 어깨와 턱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남자가 도요카이의 구미초(組長)와 연락했다고 했고, 리더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CIA는 리더의 통화 내역을 확인했고, 그중에서 특정 번호, 도요카이 간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바로 번호의 위치 추적과 동시에 통화 내역을 분석했고, 도요카이 간부의 현재 위치가 현재 도쿄 인근 후나바시(船橋)의 한 고급 맨션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고급 맨션 702호가 도요카이 간부의 통화 내역에 포함되어 있는 여자의 주소지라는 것도 확인됐다.
심문을 시작하고 간부의 위치를 찾아내는 데 4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일을 잘하는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CIA가 아무리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라고 해도 자국도 아닌 외국에서 전화번호 하나만으로 이렇게 빨리 정보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규호는 애초에 CIA가 알아서 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간부의 위치가 파악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한규호가 대사관을 나와 현 경계를 넘어 후나바시의 맨션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한규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트레이시가 납치된 창고에서 만난 요원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한규호가 말했다.
“또 혼자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한규호를 따라온 요원, 티모시 응옌이 물었다.
“이번에는 들어오지 마시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맨션 입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
한규호가 맨션에 가서 조직 간부를 데려오겠다고 하자 CIA는 그에게 몇 가지 물건을 건넸다. 그중 하나가 아무런 표식이 없는 카드 키였다.
CIA가 사용하는 장비라고 했다. RFID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전자식 자물쇠를 무력화한다고 했다.
한규호는 맨션 정문으로 다가가 CIA가 건네준 카드 키를 문에 댔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현관문 카드 단말기가 삑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신기하군.
한규호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문으로 들어선 한규호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7층까지 올라갔다.
사실 한규호에게는 RFID 키가 없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7층 정도면 그냥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게 오히려 빨랐다.
하지만 키가 있는데 그런 퍼포먼스를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7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만약 한규호에게 CIA가 지급한 카드 키가 없었다면 한규호는 복도 창문을 통해 건물 외벽을 탔을 것이다.
그러나 한규호는 건물 외벽을 타는 대신에 702호라고 쓰여져 있는 문으로 다가가 CIA가 지급해 준 카드 키를 가져다 댔다.
역시 작은 알람 소리와 함께 금방 문이 열렸다.
이건 챙겨야 되겠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카드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CIA놈들이 이거 하나 가져갔다고 쪼잔하게 굴지는 않겠지.
태청무역 김형원 사장에게 가져다주면서 얼마를 주겠냐고 농담을 할 생각이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한규호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현관과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식 주택답게 좁은 복도가 있고, 그 옆으로 방들이 배치되어있는 구조였다.
한규호는 감각을 집중했다.
그의 청각에 숨소리가 잡혔다.
성인 두 명, 복도 나가서 왼쪽.
애는 없군.
위치를 파악한 한규호는 평상시 걸음걸이로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거실이 보였고, 왼쪽에 방문이 보였다.
한규호는 방문도 열었다. 그리 조심스럽지 않은 손길이었다.
문이 열리고 방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둠이 온 방 안을 가득 매우고 있었지만 한규호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침대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불을 덮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사람, 그리고 이불도 걷어차고 알몸을 노출하고 있는 또 한 사람.
저놈이군.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지저분한 문신이 그가 야쿠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한규호는 먼저 팔을 뻗어 여자의 맥을 짚은 다음 약한 진기를 불어 넣었다.
정신을 잃게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깊은 잠을 자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저 남자를 끌고 갈 때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규호는 여자에게서 뗀 손을 바로 남자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조금 더 강한 진기를 불어 넣었다.
남자의 몸이 잠시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의식을 완전히 놓았다.
두 사람을 완전하게 제압한 한규호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호출기의 버튼을 누르고 남자를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진 다음 여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를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이불이 젖혀졌고, 여자의 나신이 조금 드러났다.
한규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이불로 그녀의 나신을 덮어 주었다.
그 여자는 뭘까?
한규호는 이불을 덮어 주면서 아키타에서 자신을 유혹했던 그녀를 떠올렸다.
***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티모시 응옌은 호출 신호가 울리자 이미 시동을 걸고 대기하던 차에 기어를 D로 놓았다.
그리고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 맨션 앞에 차를 주차시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건물에 혼자 들어갔던 남자가 거구의 남성, 온몸에 문신을 휘감고 있는 야쿠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와 뒷문을 열고 강하게 던졌다.
그리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안 깨어납니까?”
티모시 응옌이 뒷자석에 짐짝처럼 던져진 아쿠자를 보면서 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깨어날까? 운전 중에 그가 깨어나 목이라도 조르면 큰일인데.
티모시 응옌은 그런 의미를 담은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갑시다.”
한규호는 그 눈빛을 무시하면서 말했다.
티모시 응옌은 그제야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발에 힘을 풀었다.
차가 천천히 나아갔다.
맨션 앞을 출발한 차는 천천히 가속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금방 골목을 빠져나왔고 대로로 접어들었다.
티모시 응옌은 곁눈질로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이해가 안 갔다.
몇 시간 전 창고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그렇다 쳐도. 몇 분 만에 덩치가 곰 같은 야쿠자 하나를 데려온 것도 그렇다 쳐도.
어떻게 국장에게 기다리라고 할 수 있지?
그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갔다.
이 남자는 절대로 우리 쪽 요원이 아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 요원일까?
다른 나라의 요원이라고 해도 CIA 국장에게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차를 몰았다.
골목을 빠져나온 차는 도쿄 반대 방향으로 5km를 나아갔고, 시 외곽, CCTV의 사각지대에 주차되어 있는 40피트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한규호가 탄 차량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자 트럭 기사는 컨테이너의 문을 닫고 봉인했다.
트레일러 봉인에는 주일 미군의 재산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
대사관으로 돌아온 한규호에게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자신을 로랜드라고 소개했던 요원이었다.
그는 한규호가 대사관에 들어오자마자 랭리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규호의 대답은 같았다.
기다리라고 하시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로랜드를 뒤로하고 그가 향한 곳은 트레이시가 있는 병실이었다.
그녀는 한규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는 많이 안정되었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한규호는 간호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아직 깨어나지 않은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 테일러.
처음 만난 곳은 소말리아로 걸프스트림 G650 안에서였다. 정확히는 비행기 안에서 한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 주고 있었다.
예쁘군.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감상이었다.
맞춘 것처럼 몸에 밀착되어 있는 투피스 정장 안에서 그녀의 탄탄한 몸매가 느껴졌었다.
-컵라면 있나요?
한규호가 그녀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그저 장난이었다. 당황하게 하고 싶었다.
당황한 것은 한규호였지.
-어떤 컵라면으로 드릴까요?
트레이시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나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트레이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가시는 동안 제가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나도 CIA에 취직하면 저런 아가씨를 비서로 쓸 수 있을까? 라스베이거스 윈 호텔 펜트하우스를 달라고 해 볼까?
그런 실없는 생각.
작전이 끝나고 아디스아바바의 하랄 메다 공군기지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었다.
누구였더라. 현장 최고 책임자라고 거들먹거리던 멍청이에게 그녀가 한 방 먹였더랬다. 그리고 한규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었다.
그렇게 끝날 인연이었다.
작전 중에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거기서 끝날 인연이었다.
오산에 도착해서 그녀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을 때도, 이 여자와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다시 그녀를 만났다.
골든 트라이앵글.
그곳에서 완을 데려오면서 그녀에게 연락을 했었다.
오산에서 받은 번호로 전화를 했고 도움을 요청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했을 때는 완이 총에 맞기 전이었으니까.
그저 포석을 한 점 깔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말단 하급 요원에 불과한 그녀에게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그것도 7함대를 이끌고.
탄치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현장 요원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규호는 그녀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한규호의 눈에 트레이시가 살짝 찡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저 꿈결에 잠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깨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트레이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의사는 그녀에게 적어도 12시간의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액과 함께 치료제를 투여해 해독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한규호는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보았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그녀는 자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규호는 손가락을 그녀의 얼굴에 가져가 조심스럽게 그 눈물을 닦아 내었다.
“……당신……이에요?”
닫혀 있던 트레이시의 입이 열렸다.
한규호는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한 다음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나야.”
한규호의 속삭임이 그녀의 귀에 닿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을 감은 얼굴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한규호는 잠시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렸다.
“……악몽을 ……꾸었어요.”
트레이시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그저 꿈일 뿐이니까.”
한규호는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손이 느껴지자 자신의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머리가…… 아파요.”
의사가 두통은 GHB의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일시적일 수도, 영구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금 더 자면 괜찮아질 거야.”
한규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쓸어 주면서 말했다.
“……더 잘래요. ……미안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래, 더 자. 괜찮아질 거야.”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던 그 순간에 트레이시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인세티아.”
한규호의 동작이 멈추었다.
“응?”
“나에게서…… 포인세티아가…… 떠오른다고…….”
트레이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한규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귀에 입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랬지.”
한규호가 말했다.
“……궁금했어요. 무슨 의미인지.”
한규호는 그녀의 말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이야기는 깨어나면 해 줄게. 일단 자도록 해.”
그렇게 속삭이며,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5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