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54) >
한규호는 잠들어 있는 트레이시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트레이시가 잠들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지켜보고 있어 봤자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오자 세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중 두 사람은 한규호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명은 아키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한규호와 같이 치누크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온 요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트레이시가 납치당한 장소에서 만난 요원이었다.
한 명은 한규호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규호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상황을 담당하는 로랜드 요원입니다.”
한규호의 눈빛을 알아봤는지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 남자가 현장 지휘자로군.
한규호는 상황을 담당한다는 그의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냈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회의실로 가시죠.”
로랜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한규호는 두어 걸음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안면이 있는 두 요원에게 말했다.
“같이 갑시다.”
***
G구역, 일명 골프 섹션이라고 불리는 공간은 대사관 지하 4층에 위치한 특별 상황실을 의미했다.
골프 섹션은 평상시에는 사용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워져 있었고, 특별한 상황이 생겼을 때만 사용되는 공간이었다.
예를 들어 미합중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거나 하는 경우 특별 상황실이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이곳 주일미국대사관의 골프 섹션이었다.
로랜드라는 요원에게 안내를 받은 한규호는 골프 섹션에 설치된 상황실에 들어섰다.
상황실에는 이미 많은 요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상황실로 들어오는 한규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로랜드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갔다.
네 사람 모두 자리에 앉자 로랜드 요원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랭리에서 통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규호는 로랜드를 보았다.
“랭리의 누구요?”
한규호가 물었다.
로랜드는 대답 대신 한규호를 따라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이해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으시오.”
한규호가 일어서던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시가 충돌한 두 요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직위상으로 상황 요원이 상급자다. 그가 나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 같은 소속인지 알지도 못하는 그가, ‘요청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줄 것’의 주어인 ‘그’가 앉으라고 말했다.
그 상황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앉으시오.”
한규호가 다시 말했고 로랜드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랭리의 누구?”
한규호가 로랜드 요원에게 다시 말했다.
“……국장님입니다.”
로랜드 요원이 말했다.
“기다리라고 하시오.”
한규호가 말했다.
“네?”
로랜드 요원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분명히 그의 말을 들었는데, 기다리라고 한 그의 말을 듣고 이해했음에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리라고 했다. 국장을. 그것도 CIA 국장을.
뭐지? 이 남자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지금 어디 있소?”
한규호는 로랜드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티모시 응옌, 트레이시의 구출 현장에 있던 요원은 한규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네?”
티모시 응옌도 되물었다. 지금 그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전에, CIA 국장에게 기다리라고 했다는 사실부터 그에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 남아 있던 그놈, 데려왔소?”
티모시 응옌은 그제야 한규호가 물어본 질문 ‘어디 있소?’의 주어가 납치범 중 유일하게 영구적인 장애를 입지 않았던 그놈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 지금 심문중입니다.”
티모시 응옌은 한규호의 지시를 받아, 온몸을 덜덜 떨면서 바지를 적신 그 청년, 청년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그 남자를 데리고 왔다.
정확히 말하면 불법적으로 구금했다.
그 일본 국민이었고, 미국은 그를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심문할 권한은 없다.
그럼에도 그의 지시에 따라 그를 이곳 아카사카의 주일미국대사관으로 데려왔고, 감금하고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아니 분명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심문을 하고 있었다.
“양아치였소.”
한규호가 말했다.
“네?”
“그놈들은 그저 동네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양아치들이었소. 그런 양아치들이 그저 즉흥적인 욕망으로 도심에서 여자를 납치하기 차량까지 동원했다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티모시 응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에 누가 있고, 그 배후가 누군지 알고 싶군요. 지금까지 파악된 내용을 알아와 주시오, 최대한 빨리.”
한규호가 말했다.
티모시 응옌은 한규호의 말을 들었음에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상급자인 로랜드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규호가 보았다.
“현장 최종 결정권자가 당신입니까?”
한규호가 로랜드 요원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로랜드 요원이 답했다.
“그럼 누구입니까? 불러 주시죠. 불필요한 절차를 줄이고 싶으니.”
한규호가 말했다.
로랜드는 빠르게 생각했다.
누구지? 누가 현장 최종 결정권자이지?
상황실을 통제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가장 높은 직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 이 남자와 관계된 작전에서 상황실을 통제하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 세 명이 있었다.
그 셋 중 누가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귀하……입니다.”
로랜드는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그가 요청한 것은 모두 들어줄 것.’
랭리의 지시였다. 그의 요청은 결정 사항이 아니다. 명령이다.
한규호의 시선이 티모시 응옌에게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한규호가 말했다.
티모시 응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고, 회의실 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한규호의 시선이 또 다른 요원에게로 향했다. 그와 함께 아키타에서 헬기를 타고 온 요원이었다.
“그 여자는?”
한규호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자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질문받은 요원은 자신이 받을 몇 가지 예상 질문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신원은 확인하고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자고 있는 것은 알았다. 한규호 본인이 재웠으니까.
그녀는 최소 12시간은 한규호가 억지로 깨우지 않는 이상 지진이 일어난다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 데이터베이스 스캐닝 중입니다.”
“소지품은?”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불명의 주사액이 발견되어 현재 분석 중입니다.”
요원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은 도쿄 치요타구 니반초에 위치해 있었다.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아카사카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고작 10분 거리에 불과했다.
그 이스라엘 대사관 지하 상황실도 미국 대사관과 마찬가지로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임시 상황실이 차려지는 미국 대사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반대로 철수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상황실 한쪽에서 열심히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파쇄기가 그 대표적 증거였다.
이스라엘 국내 첩보기관 신 베트의 다비드 바이츠만 국장은 팔짱을 낀 채로 열심히 서류를 파쇄하고 있는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많은 서류를 만들지 않는 신 베트였지만, 다른 기관에 비교해서 적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양으로 봤을 때 서류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양의 서류를 파쇄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카멜리아.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겨 버렸다.
카멜리아가 료칸을 빠져나와 근처에서 대기 중인 요원과 접선하기로 한 시간이 02시 30분이었다.
02시 30분이 넘어 03시가 넘어서까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절차에 따라 03시에 아키타에 있던 요원들은 현장 이탈 보고를 한 후 그 자리에서 이탈했고, 대사관 지하 상황실에서는 빠르게 철수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다비드 바이츠만 국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철수 작업을 진행하는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표정과는 달리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멜리아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사실 현장 요원으로부터 연락이 끊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요원들은 현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였고, 상황은 계속 바뀌었으니까.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작전은 백에 하나였다.
문제는 카멜리아가 그 백에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는커녕, 계획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단순히 연락이 끊긴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현장 요원은 정체불명의 차량이 료칸에 들어갔다가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빠져나왔다고 보고했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신 베트가 모르는 다른 밑그림이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1차 작업이 끝났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바이츠만 국장에게 요원 하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바이츠만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2-2단계로 진행한다.”
바이츠만 국장의 말을 들은 요원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되묻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국장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바이츠만 국장은 필수 인력은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를 포함해 최정예 요원 몇 명이 이곳에 남을 것이다.
이대로 카멜리아를 두고 갈 수는 없다.
그녀를 데리고 가야 한다. 최소한 시체라도 확인해야 한다.
바이츠만 국장은 그렇게 결심했다.
***
카멜리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에서 그녀는 오래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열한 살의 어느 날, 친구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길가에서 꽃을 꺾었지.
꽃을 꺾으면 안 돼.
친구가 말했다.
왜?
내가 물었다.
꽃은 꺾는 게 아니라고 했어. 보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
아빠.
그녀는 가지고 있고, 나는 가지지 못한 그 단어.
아니야.
내가 말했다.
아니야. 꽃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야!
내가 우겼다.
뭐 하려고?
친구가 물었다.
엄마 가져다줄 거야.
사실 거짓말이었지. 그저 꽃이 있었기에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친구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
꽃은 꺾는 게 아닌데, 엄마를 가져다준다고 했으니까 말릴 수 없었겠지.
엄마.
아빠가 없다고 친구들에게 놀림 받으면 난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갔지.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날 품에 꼬옥 안아 주던 엄마.
꽃보다 더 예쁜 우리 엄마. 엄마.
엄마 가져다줄 거야.
내가 말했지.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예뻐 보이는 꽃들을 다 꺾었지.
조화라고는 하나도 없는 엉성한 꽃다발을 안고 집에 갔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차가 집 앞에 서 있었고, 군인이 차를 지키고 있었지.
난 겁먹은 눈으로 엉성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집으로 뛰어들어 갔고, 그곳에서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지.
엄마는 울고 있었어.
나는 꽃다발을 던지고 엄마에게 달려들었고, 엄마는 언제나처럼 나를 꼬옥 안아 주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를 껴안은 엄마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
그때 남자가 말했지.
“예쁘게 키웠군.”
그게 처음 들은 그의 말이었지.
< MISSION 04 : 츠바키 (5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