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48) >
바텐더는 마지막으로 꺼내 든 오렌지 비터스 병을 열어 셰리와 베르무트가 2 대 1 비율로 섞여 있는 잔에 살짝 넣었다.
그 모습을 트레이시와 츠네타카는 바라보고 있었다.
“뱀부입니다.”
칵테일용 바스푼으로 마무리한 칵테일을 트레이시 앞에 놓으며 바텐더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가는 손가락으로 잔을 잡았다.
두 개의 주정강화와인과 오렌지 비터스가 들어가 있는 칵테일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컵을 닦고 있는 바텐더를 보았다.
“색이 예쁘네요.”
트레이시가 칵테일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바텐더는 그녀의 인사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트레이시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그 옆모습을 츠네타카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두 가지 주정강화와인이 믹스된 칵테일은 신기하게도 동양적인 향취가 느껴졌다.
트레이시는 입에서 잔을 떼고, 신기한 눈으로 다시 칵테일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츠네타카가 물었다.
“신기해요. 신기한 맛이에요. 왜 이름이 뱀부인지 알 것 같아요.”
트레이시가 그렇게 말했다.
츠네타카는 시선을 바텐더에게 향했다.
“역시 마스터 솜씨는 여전하군요,”
츠네타카가 바텐더에게 말했다.
그러나 바텐더는 츠네타카의 칭찬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계속 컵을 닦았다.
***
바텐더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츠네타카가 그에게 말했다.
-너무 아쉽잖아요.
그 말은 신호였다. 츠네타카가 바텐더에게 주는 신호였다.
츠네타카는 많은 여자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바텐더는 그의 눈앞에서 많은 여자들이 츠네타카의 마수에 걸려드는 것을 보았다.
잘생긴 얼굴, 깔끔한 매너, 그리고 현란한 그의 말솜씨가 술과 어우러지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런데 개중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들이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여자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츠네타카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너무 아쉽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 바텐더는 여자에게 마지막 칵테일을 권유하고는 했었다.
항상 뱀부를 내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은 마시기 편한 베일리스나 깔루아 베이스의 칵테일이었다. 어떤 때는 와인 베이스의 키르나, 와인쿨러, 미모사를 대접해 줄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칵테일에 공통점은 동일한 재료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감마하이드록시뷰티르산, 일명 GHB였다.
탄소가 네 개로 이루어진 카르복시산에 하이드록시기가 붙어있는 이 유기물질은 1874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자이체프가 인공 합성에 성공한 이후 기면증 환자의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개발 의도와는 달리 이 유기물질은 다른 곳에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데이트 강간 약물이 바로 GHB였다.
GHB는 자연 상태에서도 존재하고 굉장히 간단한 분자구조를 가진 유기화합물이었지만, 색도 없고 향기도 없으며 아무런 맛도 없는 이 유기물질이 체내에 들어가면 인체의 방어기제를 무력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두엽 대뇌피질이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을 억제하는데, GHB가 바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성적 본능을 자극한다는 이야기다.
데이트 강간 약물로써의 GHB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방어기제를 무너트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강제로 삭제하는 데 그 가치가 있었다.
프로포폴과 마찬가지로 GHB가 작용하는 2~3시간 동안 투약자는 기억을 상실한다.
영화에서처럼 GHB를 흡입했다고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일 수도 있고, 대화도 가능하다.
다만 그 2~3시간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뿐이다.
방어기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거기에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GHB가 가진 또 하나의 메리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시간 안에 몸 밖으로 대부분 배출되며, 그 시간이 지나면 소변, 체모 등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
법의학적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GHB를 복용한 여성은 스스로 걷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며, 의식이 있는 상황에서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몸에서 성관계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상황까지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약물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술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조금만 시간이 늦어지면 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GHB가 데이트 강간 약물로 가장 선호되는 이유였다.
그리고 바텐더는 그 약물을 마지막 칵테일에 주입했다.
여자는 그 칵테일을 마셨다.
츠네타카는 그에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해 왔던 일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츠네타카는 여전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트레이시는 여전히 다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GHB가 믹스된 칵테일을 다시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애블린.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츠네타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속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을 타고 칵테일이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놀라겠지. 이 밤이 지나고, 알몸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칵테일 잔이 입에서 떨어졌다. 옅은 립스틱이 그 잔에 살짝 묻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더 놀라겠지만.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스며 나왔다.
하지만 알게 될 거야.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츠네타카를 돌아보았다. 그 입가에 미소가 살짝 더 진해졌다.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처럼.
츠네타카는 그녀에게 같이 웃음 지어 주었다.
***
신체의 통제력을 상실한 여자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몸을 밀어 내기 위해 힘을 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이 가슴에 손을 댄 그 순간 몸에 짜릿한 무언가가 흘러들었고, 그 순간 이후부터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녀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죠?”
여자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그러나 남자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위험하다.
여자는 그렇게 느꼈다.
이 남자는 동류의 사람이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람은 UC데이비스의 양조학 박사도 아니고, 코시자와중공업의 초대로 양조장을 견학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녀는 신체의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종류의 사람이다. 그녀와 동류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무, 무슨 말이에요. 사람을 부르겠어요! 소리치겠어요!”
여자가 외쳤다.
만약 그녀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두 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찔러 갔을 것이다.
시각을 차단한 후 무력화된 그의 경동맥을 졸라 교살한 다음, 옷을 입고 준비된 차량을 타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의 통제력을 상실한 그녀는 고작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시죠.”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눈에 당황이나 우려 같은 감정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당혹감을 느꼈다.
“소리쳐서 사람을 불러 보시죠. 내 방, 내 정원의 내 온천탕에 알몸으로 들어온 여자를 내가 겁탈하려 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죠. 경찰도 잊지 말고 불러 달라고 하고.”
여자는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방법이 이 남자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여자가 가진 위장 신분은 허락받지 않은 신분이다. 경찰이 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단순히 고급 창부로 위장했다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가방에는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 특제 칵테일 주사가, 정사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주사기가 들어있다.
그 주사기를 통해 사람들은 짐빔을 떠올릴 것이다.
“소리 안 칠거라면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자, 짧게 말합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남자가 말했다.
시간이 없다고? 무슨 의미지?
여자는 생각했다.
“당신이 마사키 레나이건 아니면 다른 이름을 쓰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당신이 왜 나를 노렸냐 하는 부분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그 배후에 있느냐 하는 부분이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들어 부정을 표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신체는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대답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당신은 누구지?”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될 것 같다고 느꼈다.
남자는 마치 벽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남자를 감정적으로 흔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뚫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았다.
“질문이 너무 포괄적인가? 그럼 더 명료한 질문.”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짐빔을 죽였나?”
여자는 남자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깜짝 놀랐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몸에 통제력을 잃었고, 그래서 신체가 움찔하는 등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군.”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니. 뭐가 그렇다는 말이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군이라니.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시간이 없다고? 무슨 의미지?
남자는 싱긋 웃고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뺨이 그녀의 뺨에 밀착했다.
“자! 잠깐만! 뭐, 뭐 하는 짓이야!”
여자가 소리쳤다.
“참 나, 난 아내가 있다니까.”
남자는 그녀의 등에 다시 손바닥을 댔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이 끊어졌다.
***
한규호는 내기를 주입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마투피 인근에서 완이, 그리고 라과이라항에서 푸에르토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적어도 12시간은 어떠한 반응에도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규호는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수면에서 강한 물결이 일었고, 온천탕 위에 떠 있던 쟁반이 크게 흔들리며 술이 들어 있던 도쿠리가 넘어졌다.
그러나 한규호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미 요가 깔려 있었다.
한규호는 발로 이불을 걷어 요 위에 그녀를 눕히고,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벗어 놓은 옷 쪽으로 걸어간 다음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저장된 번호 중 하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말씀하시죠.
짧은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시다.”
한규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상대방이 말했다.
“여자 요원이 같이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네, 대기 중입니다.
“같이 오셔야겠는데.”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한규호는 귀에서 전화를 떼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쁘게도 자는군.”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
료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는 전화를 끊자마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요원에게 바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며칠 전 하얏트호텔 1층 커피숍에서 한규호에게 정체를 발각당한, 홍콩에서 차출되어 온 CIA 요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체를 발각당한 여자 요원이 앉아 있었다.
-랭리에 연락을 해 주시죠. 필요한 게 있다고 말 좀 전해 주세요.
그날 호텔에서 그들에게 다가온 감시 대상, 브랜든 허드슨은 그렇게 말했었다.
발각당했다. 감시대상에게 정체를 발각당한 것이다.
경력이 끝나 버렸다. 최악의 경우 옷을 벗어야 했고, 옷을 벗지는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승진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악몽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당장 홍콩으로 소환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단순히 남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남자의 요구 사항을 바로바로 전달하는 새로운 임무도 주어졌다. 거기에 그의 지시를 따를 요원도 추가되었다.
소위 말하는 ‘현장 승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한규호의 요청 사항을 받아 임시 상황실에 전달했고, 임시 상황실에서는 랭리의 답변을 받아 그에게 전달했다.
-무엇을 요청하든 다 들어줄 것.
그것이 랭리의 답변이었다.
그는 현장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그러한 답변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런 답변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브랜든 허드슨은 그에게 몇 가지를 요청했고, 그중 한 가지 요청 사항에 따라 이곳 아키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전화가 왔다.
남자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CIA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현장 같은 현장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4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