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47) >
츠네타카와 트레이시가 자리를 옮긴 장소는 가부키초(歌舞伎町)에 위치한 몰트바였다.
며칠 전, 츠네타카가 트레이시와 한규호, 두 사람을 초대한 바로 그 장소였다.
트레이시는 바텐더가 만들었다는 오리지널 칵테일을, 츠네타카는 싱글몰트 위스키 온더록스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바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두 사람의 과거 이야기였지만, 그 대화 소재에 브랜든은 들어 있지 않았다.
츠네타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대화 주제에서 브랜든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확신했다.
남편이 있는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로 마음이 움직일 때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방어막을 치게 된다.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남편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츠네타카는 자신의 맨션에서 애블린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하필 남편과 함께했던 이곳으로 정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일종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남편과 함께 왔던 이곳에서 또다시 남편을 떠올리고, 그 이름을 언급한다면,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 방향으로 주제가 흘러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애블린은 단 한 번도 브랜든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95% 이상.
츠네타카는 그렇게 분석했다. 오늘 밤 그녀와 같은 침대에 들어갈 가능성이 95%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츠네타카는 안심하지 않았다.
95는 100이 아니다. 도박을 하기에는 충분한 확률이지만, 전 재산을 걸기에 5%의 실패 확률은 작은 확률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단순히 오늘 밤만을 위한 여자가 아니었다.
MD시스템즈의 에이전트이다. 그녀의 육체, 그 이상을 얻어 내야만 한다.
“오늘 너무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츠네타카는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천만에요.”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호텔에서 서류쪼가리나 뒤적이며 쓸쓸한 저녁을 먹었을 거예요. 하지만 덕분에 즐거운 하루를, 오랫동안 기억될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말한 트레이시는 잔을 들어 츠네타카에게 내밀었다.
츠네타카도 자신의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건배했다.
트레이시는 아름다운 목선을 보이면서 남아 있는 칵테일을 모두 입에 흘려 넣었다.
“마스터도 고마워요.”
트레이시가 잔을 내려놓고는 말없이 컵을 닦고 있는 바 주인에게 말했다.
“맛있는 칵테일이었어요. 레시피를 묻고 싶지만, 다른 곳에서 마신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안 물어볼래요. 대신 다음에 오면 또 만들어 주세요.”
바텐더는 트레이시의 말이 끝나자 닦던 컵을 내려놓고서는 트레이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만 들어갈게요. 오늘은 감사했어요.”
트레이시가 츠네타카에게 말했다.
츠네타카는 갑작스러운 작별인사는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판이 다 만들어진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고, 특유의 젠틀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츠네타카가 말했다.
이 끈을 놓으면 안 된다. 호텔에 데려다줘야 한다.
끈을 계속 잡고 있다면 기회는 분명히 찾아오니까.
호텔까지 돌아가는 택시 안, 호텔 로비에서의 작별인사까지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
“아니에요. 오늘 저 때문에 너무 고생 많이 하셨는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트레이시는 거기까지 말하고 츠네타카를 바라보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마지막 단어 ‘그리고’에는 의도가 숨은 의미를 담았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과 계속 같이 있다가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츠테타카는 그 의미를 눈치챘다.
평소의 그라면 젠틀하게 여자를 보내 주렸으련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남편이 돌아온다.
오늘 밤이 유일한 기회이다.
그녀의 ‘그리고’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츠네타카는 절대로 그녀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대로 혼자 보내 드릴 수는 없죠.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너무 아쉽고.”
츠네타카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런 그에게 자신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런 표정과는 달리 트레이시는 그와 저녁을 먹고, 장소를 옮겨 같이 술을 마시는 내내 츠네타카를 보면서 한규호를 생각했다.
의도를 가진 츠네타카의 연기를 보면서, 한규호가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말과 행동을 떠올렸다.
물론 츠네타카의 연기는 휼륭했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과 말에는 의도가 느껴졌다.
트레이시는 이번 작전 내내 한규호의 말과 행동이 연기가 아닐까, 거짓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츠네타카를 보면 볼수록 의심스럽던 그의 말과 행동이 떠오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음이 상한 트레이시는 오늘 이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정말로 맛있었던 로스트비프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은 칵테일을 대접받았지만, 더 이상 이 남자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있을지언정, 츠네타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쉽잖아요.”
츠네타카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이 남자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한규호가 자꾸 떠올랐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오늘. 정말로.”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889년에 요코하마에 뉴그랜드라는 호텔이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귀에 바텐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레이시는 그를 돌아보았다.
“뉴그랜드호텔 바의 치프 바텐터였던 루이스 에빙가는 요코하마를 방문하는 서양인들에게 일본주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일본주(日本酒)의 가능성을 알아본 몇 안 되는 서양인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바텐더가 여전히 시선을 컵으로 향한 채 나직하게 말했다.
“잠깐 앉을까요?”
츠네타카가 타이밍 좋게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 에빙가는 어떻게 하면 서양인들의 거부감을 없애면서 한편으로 동양적인 풍미를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래서 나온 칵테일이 바로 셰리를 이용한 뱀부입니다.”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고, 바 아래에서 술을 한 병 꺼냈다.
“스페인에서 만든 셰리.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만든 베르무트를 적당한 비율로 섞고, 거기에 오렌지 비터스를 첨가합니다. 드라이한 두 술이 조화를 이루면서 일본주와 비슷한 느낌의 깔끔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 맛이 마치 대나무의 산뜻함 같다고 해서 뱀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남편분에게는 작은 선물을 드렸는데, 숙녀분에게 소홀히 해 드린 것 같아 마음에 걸렸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오늘 떠나시기 전 제 작은 선물로 한 잔 대접해 드려도 될는지요.”
바텐더가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트레이시는 그의 제안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술은 더 먹을 수 있었지만, 마음이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트레이시가 그렇게 말하자, 바텐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믹스용 글라스 하나를 꺼냈다.
“아쉬워하네요.”
츠네타카가 말했다.
“네?”
트레이시가 츠네타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스터가, 애블린이 간다고 하니까 아쉬워서 저러는 겁니다.”
“그런…… 건가요?”
“그렇죠?”
츠네타카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바텐더는 바 아래에서 오렌지 비터스를 꺼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
한규호는 여자의 턱에 손을 대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고개가 올라가면서 그녀의 눈동자도 같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엮였다.
“레나.”
한규호가 말했다.
“……네.”
그녀가 말했다.
“괜찮겠어요?”
한규호가 물었다.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한규호는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런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여자의 시선이 다시 한규호를 향했다.
“괜찮겠어요?”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네.”
여자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한규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한규호가 그런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끌어안을 때의 사전 동작이다.
여자는 한규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남자의 입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눈을 감았음에도,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그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거의 다 다가왔다고 느껴졌을 때, 여자는 얼굴을 살짝 들었다.
입을 맞추기 쉽도록.
“누구지, 당신은?”
예상치 못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오른쪽 귀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여자는 눈을 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남자에게서 몸을 떼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이 마치 철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당신 정체가 뭐지?”
그녀의 귀에 그가 다시 속삭였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가 당황하며 말했다.
여자는 실제로 당황했다.
키스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예상 못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 측면에 붙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떨어졌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렇게 떨어진 얼굴은 그녀의 정면으로 다시 이동해 왔고, 그의 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단 말이죠. 의도가 무엇인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저, 저는, 그, 마, 마사키.”
“마사키 레나?”
한규호가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반응하듯, 한규호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아니, 그 이름이 아닌데.”
여자는 당황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맞아요!”
레나라고 자신을 불러 달라는 여자가 다시 말했다.
“거짓.”
한규호가 말했다.
“이거 놔줘요!”
여자는 우선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두 팔로 남자의 가슴팍에 손을 데고 힘차게 밀어 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만, 금방 놔줄 테니까 잠시만.”
그런 그녀에게 한규호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놔줘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한규호는 남아 있던 한 손을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그녀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같이 움직이는 그녀의 탄력 있는 가슴으로 그 손을 가져갔다.
한규호의 손이 가슴으로 다가오자 여자는 빠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탐하는 욕망 때문에 그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그녀의 앙가슴, 가슴과 가슴 사이에 그의 손바닥이 닿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 짜릿한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한규호는 그의 품 안에서 저항하던 그녀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선기혈, 천돌혈 아래 1촌 아래 위치한 선기혈을 통해 그녀의 몸에 그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선기혈을 통해 그녀의 몸에 들어간 그의 진기는 짧은 시간동안 그녀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의 생각처럼, 그녀의 몸은 한규호의 팔 안에서 추욱 늘어져 버렸다.
한규호는 그 모습에서 예전에 마투피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를 업고 100km를 뛰어가기 위해서 그녀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을 때에도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 완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고, 지금 여자는 육체에 대한 통제력만을 상실 했는 것이었다.
“자, 진정하고.”
한규호는 어깨를 감싸던 왼팔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면서 말했다.
힘이 빠지면서 그녀의 몸이 수면 위로 살짝 떠올랐다.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던 가슴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몸의 통제력을 상실한 여자는 경악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규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4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