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15화 (216/386)

< MISSION 04 : 츠바키 (43) >

한규호는 눈앞에 있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하얀색의 별 특색 없는 봉투였다.

한규호는 시선을 천천히 돌려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모른다는 의미였다.

한규호의 시선이 다시 눈앞의 젊은 술장인에게 향했다.

그는 한규호가 바라보자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뭐랄까…….”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부담 안 가지셔도 괜찮습니다. 먼 곳까지 찾아와 주신 데에 대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젊은 술 장인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대사를 뱉어 냈다.

“혹시라도 보도 자료 이야기가 불편하셨다면 잊어 주십시오.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서 그만.”

돈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가 된다면 보도 자료가 문제가 된다.

아키타킨몬양조라는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 회사일지, 그 회사가 뿌린 보도 자료가 어디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세계 와인 조주를 선도하는 UC데이비스의 브랜든 허드슨 박사께서 일본 술의 우수함을 인정하셨다.

이런 식의 뉴스가 지역지나 전문지에 나간다면 적당히 회자되다 묻히겠지만, 혹시라도 중앙지나 방송에라도 나오게 된다면,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끝나면 오히려 다행이다.

분명 이 야망을 가진 젊은 술 장인은 매스컴과 인터뷰를 할 기회를 많이 얻어 낼 것이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UC데이비스에서 인정한 술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것이 뻔했다.

그의 말대로 자랑을 하고 다닐 것이다.

뭐 상관없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UC데이비스에 브랜든 허드슨이 실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CIA가 신경 쓸 일이지,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한규호는 젊은 장인에게 웃음을 지어 주고는 손을 뻗어 봉투를 잡았다.

그리고 몸 가까이 가져와 봉투를 열였다.

“아, 아니, 꼭 여기서 확인하실 것까지는…….”

한규호가 봉투를 열자 젊은 장인이 술 장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나 한규호는 개의치 않고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유키자와 유키치가 그려진 1만 엔권 지폐가 들어 있었다.

대략 스무 장쯤 되겠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돈을 봉투에 갈무리했다.

“좀 적군요.”

한규호는 테이블에 다시 봉투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네?”

젊은 술 장인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대충 2천 달러 정도 되죠? 20만 엔이면?”

한규호가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 정도 됩니다.”

여자가 답했다.

“제 경력을 끝내는 데 2천 달러면 너무 적다고 생각됩니다만.”

한규호가 다시 젊은 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젊은 술장인이 말했다.

“에리트리톨인가요?”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젊은 술 장인의 몸이 흠칫 했다.

“여기 오기 전에, 다른 양조장에 들렀습니다. 어디라고 말씀 안 드리는 게 좋겠군요. 그쪽 술 장인께서 말씀하시길, 겨울에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발효열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해서, 술도가 안이 후끈후끈하다고.”

한규호는 3백 년의 역사가 농축되어 있다는 타이헤이잔 병을 손으로 잡아 들었다.

“아스파담은 안 되겠지요? 가열하면 아스파르트산과 페닐알라닌으로 분해되니까.”

“지, 지금 그게 무슨 말 입니까? 채,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젊은 술 장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람이 당황할 때 나오는 몇 가지 반응 중, 그는 화를 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보도 자료를 내셔도 좋습니다. 미국에서 온 어중이떠중이가 전통 있는 일본 술을 폄하했다고. 그러면 저희 연구소에서 분석 자료를 통해 반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사키 씨, 타이헤이잔을 몇 병 구입해 주실 수 있나요? 지금 제가 돈을 가져오지 못해서.”

한규호가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

“가능합니다.”

레나라는 여자는 한규호의 말을 전부 다 통역해 준 뒤에, 영어와 일본어로 두 번 대답했다.

센스가 있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의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만 일어서도록 하겠습니다. 예의에 어긋났다면 용서해 주시길.”

한규호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선생님!”

뒤에서 젊은 술 장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

“죄송합니다.”

차에 탑승하자 레나라는 여자가 한규호에게 사과했다.

“마사키 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규호가 웃으며 말했다.

“박사님께 저런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뭐.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이라는 게 그런 것이니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뭐, 덕분에 시간을 아꼈으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규호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초 1시간 반으로 잡혀있던 아키타킨몬양조장 견학일정이 젊은 술 장인의 치기 덕분에 그 반도 안 되는 시간에 끝나 버렸다.

한규호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오후 5시 20분을 조금 넘어있었다.

예정표에 따르면, 열차는 아키타역에서 19시 17분에 출발 예정이었고, 그 시간까지는 2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한규호가 의도한 대로였다.

애초부터 한규호는 아키타킨몬양조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젊은 술 장인이 봉투를 내밀지 않았거나, 혹은 술에 감미료가 첨가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었으니까.

한규호는 차 안에서 그녀에게 여지를 주었다. 그녀가 한규호를 유혹해야만 한다면 분명 어떻게든 움직일 것이다.

두 남녀가 밤을 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차를 놓치는 것이다. 그리고 한규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타야 할 19시 17분 차량이 도쿄로 가는 마지막 열차였다.

일정이 딜레이되고, 그 열차를 타지 못한다면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규호가 첫 번째 양조장에서 시간을 보낸 것도, 그리고 차량 안에서 무언가 여지를 줄 수 있도록 연기를 한 것도 전부 다 그런 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양조장에서 그 판을 깨 버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게 될는지, 아니면 무언가 그의 발목을 잡기 위한 또 다른 행동을 할 것인지.

“여기에서 아키타역까지는 대략 30분 정도면 도착 가능합니다. 시간이 많이 뜰 것 같습니다만.”

레나라고 불러달라는 여자가 말했다.

“뭐, 근처에서 차라도 마시면 되지 않을까요? 기다리는 거 그리 싫어하지 않아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음,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떠신가요?”

여자가 말했다.

준비하신 것이 있군. 얼마나 탄탄한 시나리오를 쓰셨는지 한번 말해 보시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자리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원래 견학 코스 후보 중 하나였는데, 허드슨 박사님께서 와인보다는 일본주를 경험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제외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곳에 잠시 들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와이너리요?”

한규호가 물었다.

“네. 텐쥬(天寿)라고 합니다. 아키타 유일의 와이너리입니다.”

그녀가 한규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일본 대형 주류 회사들이 일본산 와인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소형 와이너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한규호가 말했다.

“방문해 보시겠습니까?”

여자가 물었다.

“허드슨 와이너리의 유일한 아들인데, 안 간다고 하면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화내실 것 같군요.”

이거였구나.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국 와인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UC데이비스 출신의 주조학 박사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마련해 놓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밤이 그리 짧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참 신기해요.”

트레이시가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신기하다고요?”

츠네타카가 그런 트레이시를 보면서 말했다.

“네.”

“어떤 부분이 신기한가요?”

“처음이에요. 휴가도 아닌데, 이렇게 이틀 연속으로 일도 안 하면서 여유 즐기는 경험은.”

트레이시가 시선을 츠네타카에게로 돌리면서 말했다.

“좋지 않나요, 가끔 이런 작은 일탈은.”

츠네타카는 일부러 ‘일탈(Deviance)’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평상시의 생활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정식집에서 반주로 맥주를 주문한 것도 같은 의도였다.

많지는 않은 양이었지만, 점심시간에 먹는 맥주의 한 병의 위력은 절대로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맥주를 반주로 점심을 먹은 뒤 츠네타카는 오후 회의도 취소할 것을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트레이시와 두 사람은 공원을 산책한 후 공원 근처 조용한 찻집에서 오후의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게요. 너무 좋은데요. 걱정될 정도에요. 이러다 버릇 될까 봐.”

트레이시도 츠네타카에게 미소를 지어 주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번 기회에 우리 회사로 옮기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럼 매일 이런 작은 일탈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그럴까요? 난 너무 좋은데 브랜든이 찬성할지 모르겠어요.”

“음, 브랜든 정도라면 여기에 일할 자리야 너무 많죠. 학교에 들어가도 되고, 아니면 주류 회사에 내가 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브랜든이 생긴 것과는 달리 평생을 자유로운 분위기의 캘리포니아에서만 살아서, 일본에서의 삶에 잘 적응할지 모르겠어요. 젓가락질도 나보다 못한다니까요. 그냥 나 혼자 와 버릴까 봐. 어차피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츠네타카가 지금 자신의 말을 통해서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시간을 충분히 줄 수 있도록.

“음, 나쁘지 않은데요.”

츠네타카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츠네타카에게 여지를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계획대로 넘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오늘 츠네타카를 침대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그저,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정도.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그런데 브랜든은 몇 시에 도착한다고 했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음, 잘 기억 안 나네요. 견학 일정을 제가 짠 게 아니어서. 아마 한 10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생각 외로 먼가 보네요.”

“아키타가 그리 가깝지는 않아요. 이 근처로 잡을 것을 그랬나 봐요.”

“아니에요. 브랜든 신경 써 주신 건데.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네요. 혹시 저녁에 약속 있어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이런,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있습니다.”

츠네타카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그렇군요.”

“어떤 일정인지 안 궁금한가요?”

“아니, 뭐, 네. 어떤 일정인데요?”

“미국에서 온 친구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 줄 생각인데요.”

“미국에서 온 친구요?”

“네. 그 친구 동행이 오늘 일정이 있어서, 저녁을 혼자 먹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같이 먹어 주려고요.”

트레이시는 츠네타카의 말을 이해했다.

“아주 예쁜 친구겠네요.”

트레이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츠네타카가 트레이시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트레이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 데 능수능란한 이 남자를 보면 볼수록 그가 떠올랐다.

“궁금하네요. 그 친구분이 저녁으로 뭘 먹을지.”

트레이시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한 번 더 감추기 위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충분히 기대해도 됩니다.”

츠네타카가 평소보다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츠네타카의 시나리오대로, 레나라는 여자의 생각대로, 그리고 한규호가 의도한 대로, 아키타 유일의 와이너리인 텐츄에서의 일정은 지체되어 버렸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몇 종류의 와인을 시음하고, 향후 일본산 와인의 세계화를 이루겠다는 젊은 빈트너(Vintner)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네요.”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는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규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도 기차 시간까지 아키타 역에 도착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다음 열차는 없나요?”

한규호는 당연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대에 오른 연기자답게 적합한 대사를 던졌다.

“아쉽게도, 저희가 타야 했던 열차가 마지막 열차입니다. 잠시만 비행기를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한 후, 전화기를 들고 잠시 한규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시나리오 잘 썼군.

한규호는 전화를 하는 여자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20시 50분에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있답니다. 우선 항공권 구입 요청을 해 놓았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가온 여자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못 타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차량에 타시죠.”

여자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자, 이제 2막의 시작이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4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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