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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14화 (215/386)

< MISSION 04 : 츠바키 (42) >

1800년대 초반 창업한 이후, 꾸준히 품질을 높여 아키타현을 대표하는 일본주 양조장 중 하나로 성장한 히노마루 양조장의 술 장인은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고집스러운 얼굴에, 딱 봐도 노인만큼 오래된 양복 재킷을 입은 노인의 손에는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만사쿠노히(まんさくの日)라는 라벨이 겉면에 붙어 있었다.

양조장에 도착해 처음 인사를 할 때 이후로, 양조장 시설을 둘러보는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노인은 그가 가지고 온 술에 대한 설명도 없이 뚜껑을 딴 다음, 시음용 잔에 술을 따랐다.

같이 서 있던 히노마루주조의 사장이라는 중년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한규호에게 말했다. 그 말을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가 통역해 주었다.

“드셔 보시죠.”

한규호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다음, 술잔을 들어 올려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무색에 가까운 액체를 통해 시음용 잔 바닥의 무늬가 작게 일렁거렸다.

한규호는 술잔을 조금 얼굴 가까이 가져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은은한 향이 풍겨 왔다. 무엇이라고 딱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멜론과 비슷한 과실 향이라고 한규호는 생각했다.

신기하군. 쌀로만 만들었는데.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저온 숙성을 했다고 해도, 과실을 담근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향이 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한규호는 그런 궁금증을 안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입에 살짝 머금었다.

투명한 액체가 천천히 그의 입 안에서 물결쳤다.

일반인을 뛰어넘는 한규호의 미각은 그의 입 안에서 움직이는 액체를 분석했다. 그리고 인공적인 감미료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한규호는 그렇게 잠시 동안 무색에 가까운 액체를 입안에 머금고 살짝 입에서 굴린 다음 마지막에 목으로 넘겼다.

액체가 넘어가면서 한규호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울렸다.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았다.

시음은 다섯 개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각으로 액체의 색과 투명도를 보고, 후각으로 향을 음미한다, 미각으로 술의 맛을 느끼고 나서는 술을 뱉어 내고, 물로 입을 행구는 것이다.

그래서 한규호에 근처에는 술을 뱉어 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통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규호는 그냥 목으로 넘겨 버린 것이다.

어찌보면 시음의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려 양조장 여사장을 보았다.

어떠하냐고 감상을 묻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시선을 움직여 술 장인이라는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한규호는 술 장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떠신지 감상을 말씀해 주시면 이분들께서 감사해하실 겁니다.”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가 말했다.

“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향과 맛입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실례가 안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깔끔함이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규호는 술 장인의 눈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가 여사장과 술 장인에게 통역해 주었다.

통역된 말을 들은 술 장인이 뭐라고 말을 했다. 그의 시선도 한규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뱉어 내시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가 통역했다.

“입 안에 머금었을 때, 뱉어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규호가 술 장인의 시선을 받아 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레나라는 여자가 다시 통역했다.

한규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의 술이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죠향이라라는 향을 만들어 낸 장인분들과, 쌀을 개량하고 재배해 오신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뱉어 낼 수 없었습니다.”

한규호의 말을 레나라는 여자가 통역했다.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한규호는 노인의 눈에 떠오르는 감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눈치챘다.

술 장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이름을 말하고 처음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고개를 든 그가 입을 열었다.

레나라는 여자가 그의 말을 바로 통역했다.

“저처럼 술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술을 만들기 위해 그 쌀을 깎아 냅니다. 다이긴조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 작은 쌀의 6할을 깎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8할을 깎아 냅니다. 농부들이 1년 내내 뜨거운 볕 아래에서 애지중지 키워 낸 자식 같은 쌀의 2할만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술을 만든다는 것은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술 장인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양조한 술병을 바라보았다.

“와인에, 위스키에 밀려 일본주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아 가면서도, 이렇게 죄를 지어 가면서 이 술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들 그런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술 장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시음용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미국에서 오신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지은 죄를 지어 가면서 보낸 인생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규호는 다시 한번 술 장인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시음용 잔을 들어 올렸다.

***

오후 2시 정도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히노마루주조에서의 일정은 예상을 훨씬 넘겨 3시 반이나 되어서야 끝났다.

한규호를 마음에 들어 한 술 장인이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인사를 하고는 한마디 말도 없던 노인의 입이, 한번 열리자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맞이한 것처럼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시험작이라며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병을 들고 와 품평을 부탁할 정도였다.

한규호도 분위기에 맞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 장인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안합니다.”

세단에 탑승한 후 한규호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레나라고 불러 달라는 여자는 술기운에 붉어진 한규호의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오히려 그녀의 의뢰인이 원하는 바다.

시간이 딜레이될수록, 그가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그녀의 의뢰인이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의뢰인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코시자와중공업은 그녀의 진짜 의뢰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결과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취하면 취할수록,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녀에게도 좋았다.

그녀는 다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고, 시선을 서류에 주었다.

“다음에 방문할 곳은 아키타킨몬양조(秋田金紋醸造)입니다, 3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일본 대표 양조장 중 하나로, 그곳에서 시음하실 타이헤이잔(太平山)은 1년에 1백 병도 생산되지 않는 대표 명주로 유명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옆자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대답이 들러오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드슨 박사님?”

여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아주 살짝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여자는 남자가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다.

남자는 취했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여러번 겪어 본 상황이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굴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의 표정에서, 아내가 있어서 아쉽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약 그녀가 오늘 그를 유혹할 계획이 있다면, 지금 표정에서 그녀의 계획이 진행되기 쉽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박사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규호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박사님…….”

한규호는 눈을 감은 채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손을 느꼈다.

한규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인 여자의 손이 한규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녀의 손을 이마에 그대로 둔 채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냉정하게 식어 있는 그녀의 눈도 보였다.

한규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덮고 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규호는 그렇게 잡은 손을 아주 천천히, 마치 깨지기 쉬운 크리스털을 다루는 것처럼 그녀의 허벅지 위로 내려놓았다.

“얼마나.”

여전히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한규호가 물었다.

“네?”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네? 아, 네. 예정 시간은 60분입니다만, 조금 서두르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제야 부끄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는 듯.

“그렇군요.”

한규호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좀 쉬겠습니다. 레나 양도 쉬세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네, 그럼 쉬세요.”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한규호가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말했다.

“……아니에요,”

여자가 작게 말했다.

고급 세단 뒷좌석에서 두 명의 연기자가 각자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한규호는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잔다는 그의 신조에 따라 진짜로 잠을 잤다.

물론 단순히 잠만을 잔 것은 아니었다.

신체 활성도를 높여 알코올을 분해했고,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러나 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얼굴은 여전히 살짝 붉은색을 유지했다.

그렇게 50여 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아키타킨몬양조(秋田金紋醸造)에 도착했다.

아키타킨몬양조는 앞서 방문했던 히노마루와는 달리 거대한 제조 시설을 가지고 있는 초대형 양조장이었다.

아니, 양조장이라기보다 거대한 공장에 가까웠다.

겨울에만 술을 만드는 히노마루주조와는 달리, 아키타킨몬양조는 1년 365일 술을 제조하고 있다고 했다.

공장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거대한 공장을 견학하고, 제조시설을 둘러본 한규호는 본사 건물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젊은 술 장인의 안내를 받아 술을 시음했다.

“저희가 자랑하는 타이헤이잔입니다.”

이사 직함이 담긴 명함을 건넨 젊은 술 장인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시음 잔에 담긴 액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히노마루에서 했던 것처럼, 눈으로 투명도를 살펴보고, 코로 시향을 한 후, 입에 살짝 머금었다.

그리고 몇 초간 입에서 살짝 굴린 후, 옆에 준비된 통에 타이헤이잔을 뱉어 냈다.

“어떠십니까?”

젊은 술 장인은 기대에 가득한 눈으로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저는 일본주에 대해서 잘은 몰라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규호가 일단 그렇게 운을 떼면서 말했다.

“듣기로는 이 술이 3백 년 전통의 역사를 가진 일본 대표 명주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3백 년의 전통이 농축되어 있는, 그야말로 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장인의 눈에도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 감정은 조금 전 노인의 눈에 비친 자부심과는 궤가 달랐다.

교만이었다.

“3백 년 전통을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UC데이비스의 박사님께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습니다.”

젊은 술 장인은 고개를 숙이면서 과한 제스처로 말했다.

“저기 박사님, 부탁이 있습니다만.”

젊은 술 장인이 말했다.

“부탁이시라면?”

“괜찮으시다면, UC데이비스의 박사님께서 타이헤이잔을 칭찬해 주셨다는 내용을 알려도 괜찮을까요?”

“알린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한규호가 물었다.

“보도 자료를 배포할까 합니다만.”

젊은 술 장인이 말했다.

한규호는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3백 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타이헤이잔에서 한규호는 미약하게나마 감미료의 맛을 느꼈다.

아마, 아주 조금. 그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약한 맛일 것이다.

일본주의 소믈리에라고 하는 기키자케시(利酒師)도 판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규호의 감각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여기까지 와 주신 데에 대한 저희의 작은 성의입니다.”

젊은 술 장인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한규호 앞에 내밀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4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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