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39) >
“그렇군.”
샌안토니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리듐 위성전화로 신시아 챔버의 보고를 받은 CIA 밀러 국장은 그렇게만 말했다.
간단한 내용이었다. 스튜가 챔버가의 손님과 이야기를 하길 원했고, 그래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았다.
아직 트레이시에게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녀의 보고가 올 때까지 시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이번 일본에서의 작전에는 두 개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표면적인 의도, 그리고 숨겨진 의도.
코드명 ‘스튜’의 이적을 위한 사전 작업이 이번 작전의 표면적인 의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스튜는 독립 요원으로서 미국과 일을 여러 번 진행 한 바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단순한 용병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번 작전을 통해서 미국이 가진 힘을 보여 주는 것이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표면적인 작전 의도였다.
실제로는 한 가지 의도가 더 숨겨져 있었다.
이번 작전은 코드네임 스튜를 담당하는 트레이시 테일러의 자격 시험이기도 했다.
트레이시 테일러가 스튜를 담당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아마 신시아 챔버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게 그 의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밀러 국장이 유일했다.
물론 트레이시가 이번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당장 내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존재 가치는 당분간은 유지될 것이다.
코드네임 스튜가 한국 정보기관의 위장 기업인 태청 트레이드 앤 로지스틱스를 게이트웨이로 고집하는 것처럼, 당분간은 트레이시 테일러 그녀가 한규호와 접촉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다.
소말리아, 그리고 베네수엘라 작전을 통해서 입수된 그의 정보를 가지고 심리 분석을 진행했고, 프로파일링 팀은 그가 쉽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와 연결 고리가 구축된 트레이시 테일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녀가 이번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당분간 한규호의 곁을 지킬 것이다.
한규호가 계속 그녀를 원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겠지만.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트레이시를 대체할 사람을 만들어 내면 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온 그 여자라든가.
밀러 국장은 시애틀 머다이나, 챔버가에 있는 그녀를 떠올렸다.
신시아 챔버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스튜가 아니더라도 포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 스튜가 그녀와 통화하기를 원했고, 지금 통화를 하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몸값이 조금 더 올랐다.
스튜의 이적 협상 테이블은 조만간 차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CIA의 편에서 그를 스카우트해 온다면, 트레이시의 자리는 그녀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국장은 시계를 보았다.
신시아 챔버의 전화가 오고, 1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트레이시 테일러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
트레이시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상태로, 문 너머에서 그가 자신의 전화기로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있었다.
괜찮았는데,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거리를 많이 좁혔다고 생각했는데, 온전히 자신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작업은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CIA를 선택한 이유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라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CIA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CIA가 전 세계 정보기관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다른 여자들처럼, 월스트리트에서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 어디로 이직하는 것이 가장 최선일까를 생각하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살아 있다고 느끼고 싶었다. 그러하기에 CIA를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이 맞았다고 그녀 스스로 여러 번 생각했다.
남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이시에게 있어서 남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부차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랭리에 소속된 이후 남자들을 아예 안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정신적인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가끔은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데이트 상대인 누군가의 무게감이 그녀를 뛰어넘은 적이 없었다.
또래의 다른 여자들처럼, 트레이시는 남자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소모한 적이 없었다.
남자란 그녀의 인생에서 일종의 부록이었지, 그녀의 삶에 영향을 줄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트레이시는 바닥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규호, 지금 저 문 너머에서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하는 저 남자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마치 시소처럼, 첫날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에게 무게중심이 넘어간 뒤로 단 한 번도 그녀는 주도권을 가져 보지 못했다.
미국이 주목하는 남자. 커다란 비밀을 가진 기프티드였기에 그녀가 한수 접어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를 발판으로 더 높은 곳에 오를 생각이었으니까.
실제로도 그를 통해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
정보도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체스 판의 폰처럼 움직여야 했던 그녀가 이제는 퀸처럼 체스 판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오직 하나, 가장 중요한 그 남자에 관해서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일까?
트레이시는 발끝을 향하는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풀 죽어 침대 가에 앉아 우울해하는 10대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트레이시의 분노는 상온에 방치된 얼음처럼 녹아 버렸고, 분노가 녹아내린 자리에는 슬픔이라는 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슬픔은 분노에서 기인했고, 분노는 질투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망쳤어.
트레이시는 거울 속에 자신을 보면서 말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그녀의 청각에 잡혔다.
통화가 끝난 것 같았다.
트레이시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발끝으로 돌렸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 앞에 선 그는 잠시 트레이시를 보더니,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트레이시는 그저 발끝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그는 잠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여 열린 문을 통해 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그의 몸이 완전히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내가 망쳤어.”
트레이시는 여전히 발끝만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
-착륙 절차에 들어갑니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밀러 국장은 시계를 보았다.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CIA의 국장이라는 자리는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용하고, 48시간 동안 96시간분의 생각을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샌안토니오에서 소화할 일정에 대해서 생각할 차례였다.
그러나 밀러 국장의 생각은 여전히 일본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밀러 국장은 짐빔을 떠올렸다.
짐빔은 욕심이 많았고, 그래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미국이 외교적 부담을 감당하면서까지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었음에도, 짐빔은 헤즈볼라에 무기를 팔았다.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짐빔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순간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부지했던 이유는 미국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도 어쩔 수 없었고, 중국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미국이 그의 죽음을 승인한 것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통령 소속 정당이 중간선거에서 분패했고, 거기에 위협을 느낀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서 에이팩에 손을 잡은 것.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에이팩(AIPAC, 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라는 명칭을 가진 이 이스라엘계 로비 단체는 총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3억 달러의 기부금을 모았다.
3억 달러! 고작 나흘 동안 3억 달러를 모은 것이다.
현금만 3억 달러였다. 거기에 에이팩을 유산 상속인으로 지명한 유서를 포함한다면, 정치로비 단체로서 에이팩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 돈과 표가 탐났고, 에이팩 임원단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같이 밥을 먹었다.
대통령 비밀 특사가 예루살렘으로 날아갔고, 예루살렘과 에이팩이 원하는 것이 적혀있는 리스트를 들고 귀국했다.
그 리스트 안에 짐빔이 있었다.
망각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예루살렘은, 그냥 놔두어도 얼마 안 가서 땅속 6피트 아래에서 잠들 그를 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대통령은 그 리스트에 사인을 했고, 엄청난 규모의 정치 지원금이 이미 가동되고 있는 대통령 재선 캠프로 흘러들어 갔다.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날아왔고, 밀러 국장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시나리오에 따라 짐빔의 죽음은 마트료시카(Matryoshka, 여러 개의 인형이 겹쳐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포장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장 큰 인형은 자연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상하지 않도록. 그 안에 또 다른 인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자연사라는 인형을 들어 올리면 두 번째 인형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중국을 포함한 다각화 외교를 추진하려 하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짐빔을 처리했다고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두 번째 인형.
신뢰성을 주기 위해 모사드가 아닌 신 베트를 동원한 것도 그 이유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인형까지다.
예를 들어, 짐빔을 처리한 신 베트 요원들은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인형마저 들어 올리면, 그제야 마지막 인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간선거의 분패와, 다가오는 대통령 재선과 에이팩이 가진 3억 달러.
그것이 짐빔에 죽음에 숨겨진 진실이다.
아주 보잘것없는 진실이었다.
짐빔이 죽음으로써 연극은 끝났고, 막이 내렸다. 그럼에도 아직 배우들은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짐빔을 처리한 이스라엘 신 베트 요원들이, 그리고 카멜리아가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이다.
작전이 끝나면 떠났어야 할 그들이 남아 있는 이유를 밀러 국장은 알고 있었다.
중국이 이스라엘에 추가적으로 의뢰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중국은 이스라엘이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느슨해졌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착각한 중국은 양국의 발전적인 우호 관계를 위해서, 일을 하나 더 해 달라고 추가적인 의뢰를 부탁했다.
그러나 중국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은 확고했고, 중국과 이스라엘의 밀월은 미국에 하나하나 전부 다 보고되고 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국이 그렇게 움직일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예견된 시나리오였다.
국가 간의 외교 관계, 특히 막후에서 전개되는 비공식 외교 관계에서 신뢰라는 단어는 1달러 지폐 한 장의 가치도 가지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적이지, 사이좋은 친구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중국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척을 했고, 의뢰 내용은 예루살렘을 거쳐 랭리로 전달되었다.
밀러 국장이 기밀화된 파일을 열고, 중국이 지정한 목표를 보았을 때, 그는 오랜만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파일이 열리고, 화면에 스튜, 정확히는 스튜의 위장 신분인 브랜든 허드슨의 여권 스캔본이 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밀러 국장은 아주 ‘운명의 장난’이라는 흔한 문구를 떠올렸다.
중국에서 그가 기프티드인 것을 알았을까?
아닐 것이다. 스튜가 기프티드라는 것을 중국이 알았다면, 잡아서 해부하려고 했을는지는 몰라도, 단순하게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지정한 것은 기프티드인 스튜가 아니라, MD시스템즈 무기 에이전트의 남편인 브랜든 허드슨이다.
이웃국가로서 일본이 최신예 전투기 기술을 확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을 터이고, 그 기술이 미국 기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MD시스템즈의 에이전트를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방위산업의 당사자를 직접 처리하는 것은 부담이 갔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들어주느냐, 들어주지 않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직접적인 무기 거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브랜든 허드슨, 에이전트의 남편을 고른 것이다.
그가 죽으면 당연히 에이전트는 그 시체를 안고 귀국해야 할 것이고, 협상은 딜레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일본 쪽에 죽음에 대한 책임도 안길 수 있다.
고작 미국인 하나 죽임으로써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아주 약간의 소금이라도 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중국은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이 의뢰하고 이스라엘이 스튜의 목숨을 노린다.
밀러 국장은 상황이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어떠한 답도 보내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시나리오가 쓰인 대로.
스튜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미국인인 브랜든 허드슨의 시체에 대한 최우선 권리는 미국이 가지고 있고, 정당하게 그 시체를 해부해 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스튜에게 원하는 것은 원 맨 아미에 필적하는 전투력을 보유한 요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프티드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의 신체 능력에 기반한 불로(不老)에 관한 지식이지, 전투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남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만약 그가 위협을 느꼈다면, 그래서 자신을 지켜 줄 든든한 방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가장 먼저 미국을 떠올릴 것이다. 이적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고, 위험 상황을 완벽하게 빠져나온다면?
그렇다면 그를 기필코 확보해야 한다는 정답을 확인하게 된다.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그를 확보하고만 있다면 언제든지 해부할 수 있다.
살아 있을 때의 데이터와 트레이시 테일러의 자격 시험장이었던 일본에서 스튜에 대한 추가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채점이 기대되는군.”
밀러 국장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MISSION 04 : 츠바키 (3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