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10화 (211/386)

< MISSION 04 : 츠바키 (38) >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의 몸이 순간적으로 물결쳤다.

-여보세요?

그녀가 답이 없자, 전화기 너머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완은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꾹꾹 눌러 가며 겨우 대답했다.

-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전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완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전화기를 들고, 잠시동안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잘 지냈…….”

-잘 지냈…….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먼저 말해요.”

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

“네.”

-어디야?

“시애틀 인근이요.”

-서부로 갔군.

“네. 대륙을 횡단했죠. 당신은 어디 있어요?”

-지금은 일본.

일본이라는 말에, 완의 눈이 커졌다.

얼마 전 신시아 챔버가 일본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와 관련이 있을까?

신시아 챔버도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일까?

“어때요? 잘 지냈어요?”

-나야 뭐, 항상 그렇지.

“잘 지냈어요?”

완이 다시 물었다.

-나는 잘 지냈어. 별일 없이.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오늘 당신의 전화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러게. 나도 몰랐군. 당신 목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당신이 전화 한 건데요?”

-그래. 내가 전화를 했지.

“왜 전화했어요?”

-……전화하면 안 되나?

“왜 전화했어요? 만나러 오지 않고.”

-……잘 지내고 있어?

“아까 물어봤는데요.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고요.”

-미국 애들이 무리한 요구는 안 하고?

“걱정했어요?”

-걱정은 무슨.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걱정 안 했어.

“고마워요.”

-……어때, 지금?

“미국에서 잘 대우해 주냐고 묻고 있는 거죠?”

-옆에 사람이 있나?

완은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있어요.”

-이야기할 수 있겠어?

“괜찮아요. 여기 와서 사귄 친구에요.”

-친구?

“홈스테이하는 집 딸이에요,”

-홈스테이?

완은 놀란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를 당황시키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 목소리 좋네요. 귀여워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 홈스테이라니.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걱정하는 것처럼 이상한 감옥 같은 곳에 가둬 두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좋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어요.”

-저택이라니, 더 모르겠는데.

“짧게 말하면,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은신처가 저택이라는 이야기죠.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는.”

-연금당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군.

“아침에 저 혼자 조깅도 할 수 있고, 쇼핑도 다녀요. 이런 연금이라면 평생 하고 싶을 정도로.”

-해 달라면 들어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그 주인집 딸, 당신이 아는 사람 같아요.”

-내가 아는 사람?

“정확히 미스터 스즈키가 아는 사람?”

-…….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완은 한규호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도 앤 챔버와 마찬가지다,

비밀을 숨기려는 침묵 아니라, 그녀 자신이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때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줄게요.”

완이 전화기를 앤 챔버에게 건넸다.

통화하던 완을 지켜보던 앤 챔버는 갑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전화기에 당황해 두 손을 저었다.

그런 그녀에게 완이 입 모양만으로 ‘괜찮아.’ 하고 말해 주었다.

앤은 잠시 주저하다 전화기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답이 없었다.

“저기…….”

앤 챔버가 무언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주저하는 사이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애, 앤 챔버입니다.”

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 혹시 미스터 스즈키신가요?”

-그래. 잘 지냈어?

앤 챔버의 눈이 커졌다.

옆에서 전화 통화를 들으면서 그가 아닐까 짐작은 했지만, 진짜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의 마음이 강하게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네…… 잘…… 지냈어요.”

-베르나는?

그가 베르나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이런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

“……베르나는 잘 있어요. 아, 그녀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

전화기 너머로 놀람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아동정신과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치료는 거의 다 끝났고요. 조만간 데려올 거예요. 자주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나러 가요. 스즈키 씨 안부를 묻고는 해요.”

-베르나는 괜찮은 건가?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이제는 많이 안정되었어요.”

-다행이군.

“건강하세요?”

-음, 뭐. 별일 없어.

“다행이에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그녀와 같이 있지?

“아, 규는 저희 집에 손님으로 와 있어요.”

-규?

“방금 통화한…… 저희는 규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군.

앤 챔버는 옆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네. 규는…… 어머니 손님으로. 아, 그녀는 괜찮아요. 거의 저희 집 딸처럼 지내고 있어요. 같이 쇼핑도 하고, 놀러도 가고. 멀리는 못 가지만.”

앤 챔버는 빠르게 말했다.

규가 홀대받고 있다고, 감시받고 있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 것 같아.

“저, 저기…… 잘 지내고 있어요?”

앤은 그렇게 질문을 하고서는 자신이 조금 전 비슷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음, 난 잘 지내고 있어.

“제, 제가 떠나고…….”

-나도 금방 나왔어.

“그렇군요…….”

앤 챔버는 계속 말을 하지 못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막상 그와 통화를 하게 되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네.”

앤 챔버의 눈이 흐려졌다. 왜 그런지 자신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 규를 잘 돌봐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기, 바꿔 드릴게요.”

앤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다시 그녀의 친구에게 넘겼다.

“왜 사람을 울리고 그래요.”

완은 전화를 넘겨받자 그렇게 말했다.

-운다고?

“참으로 무심하고 둔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아무튼 무사하다니 다행이야.

“그거 때문에 전화 한 거예요?”

-뭐 겸사겸사.

“얼마 전에 제안을 하나 받았어요.”

-제안?

“네. CIA에서.”

-뭐라는데?

“당신과 결혼시켜 주겠대요.”

-…….

“그 반응, 여자를 상처받게 하는데요?”

-……뭐라고 했는데?

“당신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대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내가 원하면, 원하는 도시에 원하는 집을 구해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없으면 만들어 준다고. 시민권과 같이.”

-그랬군.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

“내가 당신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당신이 내 발목을 잡을 일은 없어.

“날 인질로 당신을 협박한다면요?”

-…….

“이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당신이 전화를 해서 미국은 당신이 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할 거예요.”

-착각?

“어머, 착각이 아닌가요?”

-…….

완은 그 침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으면 그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 귀여운 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미안해요. 아무튼, 날 인질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미국이 내놓는 조건을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

“내 말 듣고 있나요?”

-그래.

“지난번 통화가 끝나고 후회했어요.”

-후회?

“네. 언제 또 통화할지 모르는데, 무심한 당신이 나에게 전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고, 푸념만 하다가 통화가 끝난 것 같아서.”

-그렇진 않았어.

“그렇게 말해 주니 기뻐요.”

-뭐…….

“아무튼. 미국이 날 인질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지도 몰라요. 혹시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때는…….”

-그럴 일은 없어.

“들어줘요. 진짜 생각 많이 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

“들어줄 거죠?

-……그래.

“혹시라도 미국이 내 안위를 가지고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거절해 줘요.”

-거절하라고?

“네. 내가 당신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거예요.”

-쓸데없는…….

“혹시라도 구출하러 오겠다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전화기 너머로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완은 처음 듣는, 한규호가 진짜로 화내는 목소리였다.

“화내 주니 기쁘네요. 기뻐요, 그렇게 화내 줘서.”

-……경고하는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그때 내가 말했죠? 정작 이곳에 오니, 당신이 없다고.”

-…….

“생각 많이 했어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 전에 결정을 내렸어요.”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당장 죽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나도 죽고 싶지는 않아요. 살 방법을 찾아야죠.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

“CIA에 들어갈 거예요.”

-……괜찮겠어?

“아마 당신과 연걸되어 있다는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지만, 뭐. 그것 말고도 나는 가치가 있으니까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당신을 이용하려 할 거야.

“나도 이용하면 돼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리하지 않아요. 걱정 마요. 내가 누군지 잘 알잖아요.”

-…….

“걱정 마요. 나는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조용히 들어 줘요. 부탁해요. 지금부터 하는 말 들어 줘요.”

-……듣고 있어.

“보고 싶어요.”

-그래.

“함께 있고 싶어요.”

-……그래.

“날 조건으로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

“그러니, 날 신경 쓰지 말아줘요. 보지 못해도 괜찮아요. 같이 있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그냥 당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 줘요.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당신은 참 여러 여자를 울리네요.”

-…….

“무뚝뚝하긴. 참 나,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완.

“약속해 줘요.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내 말 들어.

“약속해 줘요. 나 때문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고.”

-완.

“고마워요. 전화해 줘서. 걱정할 것 없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경고하는데, 제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언제 또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내 말 좀 들어!

“걱정 말아요. 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

“가능하다면 또 전화해 줘요. 무리하지는 말고.”

-……참, 당신은 막무가내로군.

“보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

“당신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더 이상 듣다가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

“걱정 마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다음에 또.”

-……그래. 다음에.

“네, 다음에.”

-그래. 다음에.

완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 이상 계속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는 결심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그러고는 억지로 미소를 띠면서 앤 챔버를 보았다.

< MISSION 04 : 츠바키 (3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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