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09화 (210/386)

< MISSION 04 : 츠바키 (37) >

앤 챔버와 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앤 챔버는 조금 놀란 얼굴로, 완은 조금 슬픈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건강했어, 그는?”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완이었다.

“건강……했냐고?”

“응.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았어?”

완은 그가 복부에 총을 맞은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울컥울컥 새어 나오던 그의 피. 그의 뜨거운 피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잠깐만, 잠깐만. 규, 잠깐만.”

앤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규, 내 생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가 같은 남자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괜히 오해해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좀 무표정해지는 버릇이 있어. 그때는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해.”

완이 말했다.

앤 챔버는 그녀가 그 남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도 별로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잘 이야기해 주는 편은 아니야. 보통은 그냥 통보하고 마는데, 결국에는 그의 생각이 맞아.”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나 말하고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데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두고 가지 못해.”

앤 챔버는 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겁에 질린 베르나에게 초코바를 건네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가까워지면 농담을 해. 재미는 없는데, 그 재미없는 농담이 싫지는 않아.”

앤 챔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농담을 했던가?

그리고 떠올렸다. 도밍게즈 소령과 이런저런 농담들을 주고받던 모습을.

“먹고 자는 것을 중요시해. 소금을 찾지는 않았어?”

완은 그렇게 말하고, 뭐 재미있는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쿡 하고 웃었다.

“자신에게 전혀 이익이 없는데도,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그냥 지나가지를 못해.”

앤 챔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보다, 아니 어떤 사람들보다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한국에서 온 그 남자는.”

완의 말에 앤 챔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가, 규가 알고 있는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건강해, 그는?”

완이 다시 물었다.

“응……. 그는 건강해 보였어.”

“다행이다.”

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앤 챔버는 그 미소를 보면서 평소에 그녀가 보여 주던 미소와는 다른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미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미소라면, 지금의 미소는 그녀가 행복해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미소 같았다.

“건강했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는.”

앤 챔버가 다시 확인해 주었다. 그 미소를 계속 보고 싶어서.

“다행이다.”

완이 말했다.

앤 챔버는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규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 미소가 조금이라도 더 유지될 수 있도록.

“……반년 좀 넘었을 거야. 베네수엘라에 갔다 온 지.”

앤 챔버가 입을 열었다.

***

앤 챔버는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물론 그가 기프티드이고 기프티드인 그녀가 기프티드로 의심되는 그를 파악하기 위해 갔다는 이야기는 빼놓고, 그저 인신매매 방지 포럼 관계자를 경호했다는 표면적인 이야기로 포장해 전달했다.

몇 가지 사실을 빼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야기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규는 아무런 질문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주었다. 여전히 그 미소를 유지한 채로.

“그리고 나는 베르나와 헬기를 타고, 퀴라소를 거쳐서 미국으로 돌아왔어. 그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고.”

앤 챔버의 이야기가 끝났다.

벌써 반년이나 지났는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자 생생하게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 그가 엘 나씨오날 출신이라는 부패 기자를 쫒아내고, 공포에 떨고 있는 베르나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초코바 껍질을 까서 건네주는 장면은 마치 조금 전 있었던 일처럼 자세하게 묘사해 주었다.

“그 사람답네.”

이야기를 다 들은 완이 말했다.

“그 사람답다고?”

“응. 그 사람다워.”

그렇게 말하는 완의 미소가 짙어졌다.

앤 챔버는 그 미소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 그 미소가 하필 그 남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

-저 여자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눈빛을 보고, 탄치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날과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럼 무슨 의미지?”

한규호가 물었다.

트레이시는 그의 눈에서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트레이시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만약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날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찾아왔다.

트레이시는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당신은 그녀를 지키려 했고, 그녀는 당신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당신이 원하고, 그녀가 원한다면,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고, 그리고 미국의 보호 아래 가정을 꾸릴 수 있다.

그런 의미라고, 절대로 그녀의 인권을 침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막 하려는 순간, 그녀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투, 그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질투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 전 그녀의 마음속에 불붙었던 분노와는 다른 분노가 그녀의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지?”

한규호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트레이시는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한규호가 자신을 첩 취급 하려고 했던 말 때문에 불타올랐던 트레이시의 분노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이 그러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금 트레이시의 마음을 잠식했던 분노는 다른 분노였다.

어떻게 해서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이 남자에 대한 분노, 벌써 수 개월이 지나 있음에도, 이 남자에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질투를 느끼는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무슨 의미야!”

“그녀는 CIA의 보호 아래 있어. 우리는 그녀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당신하고 관계가 있어서만은 아니야.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녀 스스로 그녀가 가치 있음을 증명했고, 우리는 그녀에게 주목하고 있어!”

트레이시가 소리쳤다.

“그녀를 매춘부 취급하겠단 이야기가 아니야! 그녀는 당신을 지키려 했고, 당신은 그녀를 지키려 했어.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한다면! 미국이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야!”

결국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트레이시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녀를 매춘부 취급하는 것이 아니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돼. 만에 하나 본부가 그녀를 그런 취급하려고 한다면 내가 막을 거야. 목숨을 걸고 막을 거라고!”

트레이시의 말이 끝났다. 그녀의 어깨가 거친 호흡 때문에 위 아래로 움직였다.

한규호는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실.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를 인질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내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진실.

“그녀는 무사한가?”

한규호가 물었다.

“무사해, 내가 아는 한.”

트레이시가 말했다.

진실.

“아는 한?”

한규호가 물었다.

트레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트레이시는 전화기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시애틀은 지금 몇 시지?

트레이시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트레이시?

“죄송해요. 지금 몇 시죠?

-응? 지금 오전 9시 좀 안되었는데.

“시애틀이에요?”

-아니. 지금 시카고에 있는데.

“갑자기 죄송해요. 손님과 통화하고 싶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스튜 관련 사안이에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

시카고에 출장을 와 있던 신시아 챔버는 갑작스러운 트레이시의 전화에 살짝 당황했다.

같이 기프티드를 담당하고 있지만, 사전 조율 없이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전화를 받고 나서는 더욱 당황했다.

갑자기 시간을 묻더니, 그녀의 집에 모신 손님, 규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말 한 것이다.

스튜 관련 사안이라고 했다.

코드네임 스튜. 한국에 있는 기프티드 미스터 한을 의미한다.

신시아는 잠시 국장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프티드 관련 사안은 이렇게 전화 한 통화로 일을 진행할 사안이 아니니까.

물론 그녀에게나 트레이시에게나 권한이 있다.

상황이 생기며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보고해도 되는 권한이 있다. 그리고 행동 권한의 범위는 그 어느 요원보다 넓다.

애초에, CIA의 정점에 서 있는 밀러 국장 단 한 사람만이 그들 위에 있었으니까.

“여보세요. 트레이시?”

-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시아 챔버는 그 목소리가 어딘지 딱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아마 자고 있을 것 같은데.”

신시아 챔버는 마음을 정했다.

만약 트레이시가 자신의 딸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거부할 권한이 있다.

또 다른 기프티드인 앤 챔버에게 접촉할 권한이 신시아에게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손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선 깨어 있나 확인부터 해 보고 다시 전화해 줄게, 바로.”

신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끊어진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전화번호부 버튼을 눌렀다.

***

앤 챔버와 완은 이제 완전히 해가 떠오른 거실 소파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서로 알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소재였다.

“전화 왔다.”

완이 말했다.

“응?”

앤 챔버가 물었다.

“2층에서 전화벨 소리 들려.”

완이 앤 챔버의 방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앤 챔버가 신경을 집중했더니,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알람이야.”

앤 챔버가 말했다.

지금 전화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하필 그 남자라니.

짧은 시간이지만, 친구처럼, 자매처럼, 가족처럼 생각하는 규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가 하필 그 남자라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앤 챔버에게 전화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완이 말했다.

그리고 또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

“차 더 마실래?”

앤 챔버가 말했다. 차를 더 마시고 싶었다. 마음이 진정될 수 있도록.

“응, 고마워.”

앤 챔버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규의 미소를 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이 아니라 거실 전화였다.

앤 챔버는 소파 옆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앤. 자고 있었니?

“엄마? 아니, 일어나 있었어.”

-그래? 혹시 규는 일어났니?

앤 챔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이른 아침에 전화를 걸어 규를 찾는다고?

“어? 어……. 지금 같이 있기는 한데…….”

-그래? 잠깐 바꿔 줄래?

“응? 응, 잠시만.”

앤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규에게 건넸다.

완은 ‘나?’ 이런 표정으로 잠시 앤 챔버의 얼굴을 보고선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네. 아, 네, 챔버 부인. 아, 아니에요. 일어나 있었어요. 네, 지금…… 7시 조금 안 되었네요. 네. 아니요, 같이 차 마시고 있었어요.”

앤 챔버는 전화를 받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조금 전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때의 미소와는 다른 미소였다.

“네. 네? 음…… 네, 뭐. 저는 상관없어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앤 챔버는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CIA와 관련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앤 바꿔드릴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완은 그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전화기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앤 챔버를 보면서 말했다.

“휴대전화가 아니라, 이런 전화기로 전화해 본 건 진짜 오랜만이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규를 보면서 앤 챔버는 결국 참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그런 그녀에게 완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전화가 올 거래. 나랑 통화하고 싶대.”

“누가?”

“날 미워하는 사람이.”

완이 말했다.

***

트레이시는 얼마 기다리지 않고 신시아 챔버의 전화를 받았다.

-괜찮은 거지? 난 좀 걱정이 되네.

“나중에 말해 줄게요.”

-그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내가 좀 기다릴까?

“아니요. 바로 전화하셔도 괜찮아요. 저도 최대한 빨리 전화할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시아 챔버의 기다린다는 말은, 트레이시가 밀러 국장에게 보고를 할 때까지 기다려 줄까 하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한규호 관련 보고가 신시아 챔버로부터 먼저 올라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트레이시에게도 좋지 않았고.

그러나 트레이시는 먼저 보고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은 밀러 국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서 특유의 그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가 훨씬 더 중요했다.

그의 눈을 보니, 또 마음속에서 분노의 탈을 쓴 질투심이 확 하고 타올랐다.

내가 전화까지 연결해 줘야 하다니.

트레이시는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타박하면서, 신시아 챔버가 알려 준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받았죠?”

-네. 전화 주신다고 들었어요.

“미안해요, 갑자기.”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트레이시의 마음에 또 분노가 확 하고 타올랐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채스터 필드에서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과 통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잠시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한규호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아 버렸다.

한규호는 전화기를 든 채로 그런 트레이시의 뒷모습을 보고는 천천히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그리고 낮게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3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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