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36) >
자신을 일본으로 데려온 목적을 물은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말했는데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녀는 눈을 피하고 싶었다. 그의 눈을 계속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대답을 할 때 눈을 피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징후이다.
심문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고 있을 정도로 기초적인 상식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시선을 돌리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들킬까 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계속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짓말을 들킬까 봐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승진을 위해 내가 필요하다.”
“맞아요.”
“미국에게 나를 더 어필할 기회도 주고.”
“……그래요.”
한규호는 속으로 웃었다.
흔들리는 감정이 요동치는 트레이시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작은 물건을 훔치고 발뺌하는 사춘기 소녀가 떠올랐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 되나?”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트레이시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중요한 순간이다.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죠?”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지.”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한다는 거죠?”
트레이시는 결국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그녀를 강제했다.
“그건 본인이 잘 알겠지.”
“나를 믿지 못한다는 이야긴가요?”
“아니,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같은 의미 아닌가요?”
“거짓말이 아니다?”
트레이시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규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은 그의 어투만큼 차분해 보였다.
그런 차분한 눈을 본 트레이시는 이 남자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도 근거도 없지만, 그의 차분한 눈을 보는 순간,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전부 다 거짓은 아니에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피식 하고 웃었다.
트레이시는 그 웃음에 뭔가 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 웃죠?”
“그냥. 웃으면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웃는 것도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니라고요.”
“왜 거짓말을 했지?”
“당신이 안 해 줄 것 같아서요.”
“안 해 줄 것 같아서?”
“미국이 당신을 원하고 있고, 당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별것도 아닌 작전에 당신을 모셔서, 미국과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경험하게 해 주겠다고 이야기하면 당신이 안 한다고 할 것 같아서요.”
한규호는 분한 감정이 묻어나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면서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한규호가 물었다.
“제가 질문할 차례에요.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받았나요?”
트레이시가 한규호의 질문을 받아쳤다.
한규호는 트레이시가 질문을 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주도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이런 별것도 아닌 질문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요한가, 그게?”
“중요한 것은 순서를 지키는 것이에요. 질문은 하나씩.”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바둑으로 치면 돌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녀는 아직 돌 두 개를 잡지 않았다.
“청강.”
“네?”
“학위는 안 받았어. 정확히 말하면 못 받았지. 등록한 정식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청강생이었을 뿐이지. 스탠포드에서 내 기록을 찾아보고 싶으면 그쪽으로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트레이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미국 대학은 청강생에게 일정한 자격 요건을 요구한다. 청강생이 수업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하니까. 그래서 보통 자교나, 협약을 맺은 교육기관에서 일정 레벨 이상의 어학연수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에게만 청강을 허락한다.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청강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가 스탠포드에 비용을 지불했다면, 그 기록도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른 기록은 몰라도, 그 기록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내 순서로군. 왜 그렇게 생각했지?”
“뭐를요?”
“왜 내가 안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
“해 줬을 건가요?”
“중요한 것은 순서를 지키는 것이지.”
한규호가 트레이시의 말을 돌려주었다.
“근거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돈이나 명예, CIA라는 이름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당신이? CIA가?”
“제 순서예요.”
“빡빡하군.”
“해 줬을 건가요?”
“아니.”
“왜죠?”
“내 순서.”
트레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니바 문을 열고, 차가운 에비앙을 꺼내 뚜껑을 따서 마셨다.
물을 마시자, 답답한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 순서,”
“당신이? CIA가?”
“내가요. 내가 그렇게 판단했어요.”
“당신 순서.”
“왜죠?”
“나는 돈이나 명예, CIA라는 이름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건 제 대답이에요. 당신 대답을 말해 줘요.”
트레이시가 생수병을 쿵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렸다.
트레이시는 지금 상황이 일본에 오고 가장 중요한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한규호와 나누는 이 대화가 향후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적으로 조금씩 흥분해 가고 있었다.
반면에 한규호는 여전히 같은 표정, 같은 어투로 응대하고 있었다.
“실익이 없으니까.”
“무슨 의미죠?”
한규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니바에 가서 맥주 두 캔을 꺼내 하나는 트레이시의 생수병 옆에 놓고는, 남은 한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번 작전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어. 누군가를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경호하는 것도 아니고,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비행기 타고, 비싼 밥 먹고, 좋은 호텔에서 잠이나 자면서, 아 미국이랑 작전하니까 이렇게 좋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지.”
“실익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죠?”
“방글라데시에서 당신들에게 신세를 졌지. 그래서 베네수엘라까지 끌려갔다 오고. 베네수엘라에서 당신네 귀한 분 잘 모셨으니 채무는 전부 상환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당신네들의 음험한 음모에 놀아났으니 내가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뭐 그것도 받았다면 받았다고 할 수 있겠군,”
트레이시는 베네수엘라 작전을 떠올렸다.
그녀는 보고서를 읽었지만,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다는 것을 한규호의 말을 통해서 알아챘다.
“나는 채무를 안기고 싶지, 안고 싶지는 않아. 이번 작전은 그런 측면에서 실익이 없지. 그저 접대일 뿐이니까.”
“그런데 왜 들어주었죠?”
“내 순서입니다만?”
“좋아요. 다 물어봐요. 궁금한 게 없을 때까지 물어봐요. 그러면 되겠죠?”
한규호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트레이시의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따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트레이시는 그 맥주 캔을 받아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원하는 게 뭐지?”
“우리와 같이하는 것.”
“CIA의 개가 되어 달라?”
“미국요. 미국 시민으로서.”
“같은 말 아닌가?”
“CIA와 일을 하는 타국적 독립 요원과 미국 시민권을 받고 정식 요원은 달라요.”
“그러시겠지.”
“원하는 조건은 다 들어줄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는 줄 알고?”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돈, 미국 정부에서 보장하는 안정된 생활과 노후,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들어줄 거예요.”
“솔깃한데.”
한규호가 말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서용석. 그 남자에 대한 정보.”
한규호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꼭 이름을 붙이자면, 불쾌감. 그런 감정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정보를 가지고 협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에게는 그 목소리가 일종의 경고처럼 들렸다.
선을 넘지 마.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하나의 예일 뿐이에요.”
“적절치 않은 예로군.”
한규호가 맥주를 들면서 말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어투가 다시 돌아왔다고 느꼈다.
“이런 조건은 어때요?”
트레이시도 맥주를 들면서 말했다.
“어떤?”
한규호가 맥주 캔을 트레이시 쪽으로 내밀었다.
트레이시는 그것을 화해의 제스처로 해석했다.
트레이시는 맥주 캔을 가져가 그의 맥주 캔에 살짝 부딪치며 말했다.
“당신이 구해 온 그 여자.”
트레이시는 건배 후에, 그를 향해 가던 맥주 캔이 멈추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원하면 그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도시, 원하는 집에서.”
트레이시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눈을 향해서.
“당신은?”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눈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일렁이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에 와서는 처음 보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
탄치에서 자신을 보던 눈이다.
“네?”
“내가 원하면 당신과도 같이 살 수 있나?”
트레이시의 캔도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뭐라고요?”
“내가 원하면 당신도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었어.”
“도?”
트레이시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왜? 당신은 안 되나?”
아무리 기프티드라고 해도, CIA가 영입을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해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당신은 안 되나?”
해서는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다.
그리고 한규호는 자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트레이시는 그동안 조금씩 쌓여 왔던 그에 대한 호감이 전부 분노로 전환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
트레이시가 쏟아 내려던 분노가 한규호의 말에 끊겼다.
“시민권이 있어 미국 정부로부터 인권을 보호받는 당신은 안 되고, 시민권이 없는 동양인 여자는 당신들이 마음대로 나에게 붙여 줄 수 있고!”
트레이시는 그제야 한규호가 왜 분노했는지 이해했다.
***
앤 챔버는 놀란 눈으로 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앤 챔버는 자신의 두 손이 입을 막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존재는 단순히 아는 사람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기프티드였다.
앤 챔버는 CIA 소속이 아니었지만, 기프티드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CIA가 얼마나 기프티드에 공을 들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기프티드였기에.
진정해. 우선 진정해.
앤 챔버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잠깐만, 규, 잠깐만.”
앤 챔버는 손을 내리며, 이 집의 손님이자, 그녀의 친구인 완에게 말했다.
완은 그저 같은 시선으로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해하는 감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앤 챔버는 평소보다 배는 빠른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말했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녀에게 기프티드에 대한 내용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기프티드 관련 사안이 기밀이라서가 아니다.
기프티드 관련 사안이 기밀이어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CIA와 관련이 있어서도 아니다.
만약 말이라도 잘못해서 규가 그 사실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녀가 위험해진다.
절대로 CIA는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 소중한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규.”
앤 챔버가 완을 불렀다.
“응.”
“우선 내 말을 들어 줘. 중요한 이야기야.”
앤 챔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앤 챔버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혹시 지금과 같은 이야기 누군가에게 한 적 있어?”
“……아니.”
“엄마에게도?”
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규, 절대로, 절대로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돼. 엄마에게도. 절대로!”
앤 챔버가 완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완은 그녀의 얼굴 옆에 바싹 붙어 있는 앤 챔버에게서 한 뼘 거리 정도 물러났다. 앤 챔버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앤.”
완이 두 팔을 뻗으며 말했다.
“날 걱정해 주는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두 뻗은 두 팔로 앤 챔버의 머리를 감싸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앤 챔버는 혼란스러웠다.
우선 심각한 분위기로 이끌어, 규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어떻게 된 일인지 최대한 차분히 설명하려고 했는데, 규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그녀를 안아 주고 있었다.
“저기…… 규.”
“앤.”
친구의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으, 응.”
“그는 비밀이 있는 사람이지? 그래서 미국이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고.”
앤 챔버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알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비밀을 알게 되면 혹시라도 해를 입을까 봐.”
앤 챔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참 행복하네. 이 집에 올 수 있어서,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앤 챔버는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행복하다는 단어와는 달리 슬프게 들렸다.
앤 챔버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풀렸다. 그리고 귀에 붙어 있던 얼굴이 떨어졌다.
다시 규의 얼굴이 앤 챔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얼굴은 목소리만큼 슬퍼 보였다.
< MISSION 04 : 츠바키 (3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