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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07화 (208/386)

< MISSION 04 : 츠바키 (35) >

“베네수엘라?”

“응, 랭리의 부탁으로,”

앤 챔버가 말했다. 완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요원은 아니야. 그냥, 일을 도와주러 간 거였어.”

앤 챔버가 말했다, 자신이 말했지만, 스스로에게도 변명하는 것처럼 느꼈다.

완은 신시아 챔버가 CIA 소속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앤 챔버도 CIA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통역 같은 거?”

“음, 그런 것은 아닌데, 뭐랄까…….”

완은 앤 챔버가 말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미안해. 자세하게 말해 줄 수가 없어.”

“괜찮아.”

완은 앤 챔버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응…….”

“물을 더 끓여야 되겠다. 앤도 차 마실래?”

완이 티포트를 들며 말했다.

앤 챔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녀가 순간적인 기분으로 후회하는 것을 완은 원하지 않았다.

“음, 응. 나도 마실래. 난 홍차.”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앤 챔버는 티포트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완을 보면서 베네수엘라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잘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 여기 홍차.”

완이 앤 챔버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마워.”

“천만에요.”

완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웃음으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첫 번째였어, 랭리와 함께하는 것은.”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존중해 주고 싶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그곳에서 소녀 한 명을 데려왔어.”

“데려왔다고?”

“응. 정확히 말하면 구출해 왔다가 맞겠다. 위험에 빠진 소녀가 있었고, 내가 베네수엘라에 간 이유와는 전혀 상관 없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서 그녀를 데려왔어.”

“그랬구나.”

“응. 네가 이 집에 좀 더 오래 있다면 볼 수 있을 거야.”

“볼 수 있다고?”

“응. 챔버가의 막내딸이 될 거야. 귀여운 아이야.”

“그렇구나.”

“응.”

앤 챔버는 홍차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윽한 홍차 향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홍차를 마실 때마다, 규를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르나를, 아, 베네수엘라에서 데려온 아이의 이름이 베르나야. 아마 조만간 이름이 바뀌겠지만, 베르나를 데려오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하나뿐이야. 그 작은 아이가, 양부의 학대를 받는 그 작고 겁먹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이유 하나였어. 거기에 두고 올 수 없었어.”

앤 챔버의 말을 들은 완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두고…… 올 수 없었다고?”

“응. 두고 올 수가 없었어.”

-당신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뭐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네.

규호도 그렇게 말해 주었다.

구출.

앤 챔버는 베르나라는 소녀를 구출해 왔다고 했다. 그곳에 두고 올 수 없어서.

규호, 그 남자도 자신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구출해 주었다. 두고 오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고집을 부렸어.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서. 아무리 생각해도 두고 올 수 없어서.”

그 순간 완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 전, 그와 통화했던 내용을.

“몇 살이야, 베르나는?”

“일곱 살. 생일을 모르겠네. 어쩌면 여덟 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베네수엘라에서?”

“응.”

“어디에요? 지금?”

-베네수엘라.

그도 베네수엘라에 있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나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구하고 싶으면 구해 줘요. 구해 줄 수 있다면 구해 줘요. 당신답게.”

-나……답게…….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요?”

-……일곱 살 여자아이.

“다행이네요. 그 아이는 15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우연일까?

베네수엘라에서 일곱 살 소녀를 구한다고 했다.

규호가 구해 온 일곱 살 소녀가 다른 사람일까?

“그가 도와 주었어?”

완이 말했다.

앤 챔버의 눈이 커졌다.

“너도 알아, 미스터 스즈키를?”

미스터 스즈키. 그런 이름을 쓴 것일까?

“아니, 몰라. 미스터 스즈키라는 사람은.”

완의 말에 앤 챔버의 눈에 실망이 번졌다.

“하지만 무심하고, 말도 막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사람의 마음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도 결국 부탁은 다 들어주는 동양인 남자라면 알고 있어.”

앤은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렇지만 감정이 물결치는 눈동자는 가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네.”

완이 앤 챔버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코시자와중공업으로 복귀하지 않고 오후 내내 츠네타카와 시간을 보낸 트레이시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호텔로 돌아왔다.

그녀는 로비에서 츠네타카가 사준 운동화를 다시 하이힐로 갈아 신고서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츠네타카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이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를 하루 종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정신 차리자, 트레이시.

트레이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강조했다.

나는 요원이야. 내 임무는 그를 포섭하는 것이지, 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니야.

트레이시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마음을 다졌다.

여자로써 어필할 생각도 없었지만, 한규호에게 여자로서 어필할 수 없다면, 비참하게 계속 그 가능성의 끈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복도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정신 차리자, 트레이시.

트레이시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기합을 팍 넣고, 객실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한규호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와, 오늘은 일찍 왔네.”

언제나 같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다녀왔어요.”

트레이시가 웃으며 인사했다.

***

호텔로 돌아온 트레이시는 평소와 다름 없이 샤워를 하고 조금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와 저녁을 먹었다.

트레이시는 어젯밤 일로 혹시 그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저녁을 주문하면서 와인도 한 병 주문하고, 밥이 올 때까지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트레이시는 이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고,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트레이시의 말을 들어주었다.

평상시와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내일 아키타 가는 준비는 다 끝냈나요?”

트레이시가 룸서비스로 배달된 저녁을 먹으면서 물었다.

“준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명목상으로 당일치기인데.”

한규호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네요.”

“그렇지. 그나저나 내일 츠네타카가 뭔가 수작을 부릴 것 같은데.”

“그렇겠죠.”

“어쩔 생각인데?”

“뭐,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할지는 그때 생각해 보려구요.”

트레이시는 약간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어련히 잘하겠지.”

“걱정되나요?”

“걱정? 누구를? CIA 요원인 당신을?”

한규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에서 트레이시는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내일 양조장에 가는 거 걱정 안 되나요?”

“걱정? 어떤 부분에서.”

“일본주 양조장의 양조 전문가들과 말을 섞어야 되는데, 괜찮겠어요?”

트레이시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양조학 박사는 브랜든 허드슨이지, 한규호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뭐. 정체가 들통나면 어쩔 수 없고.”

“……무서운 말을 하네요.”

“괜찮을 거야. 아직 안들켰으니.”

한규호가 걱정 말라는 말투로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가 그런 말을 하면 근거도 없이 신뢰감이 느껴졌다.

“연기를 배웠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응?”

이미 충분한 음식을 먹었음에도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고 있던 한규호는 그녀가 한 질문에 그렇게 반응했다.

“연기에 능숙한 것 같아서요. 따로 배웠나요?”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가지고 있던 의문 중 하나를 물었다.

“사는 게 다 연기 아니겠어?”

한규호는 포크로 샐러드 사이에 견과류를 찾아내면서 성의 없이 대답했다.

트레이시는 베네수엘라 작전 보고서를 읽어 보았다.

베네수엘라에서 한규호는 인문학 박사 스즈키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가 학자로서 학문적인 성과를 발표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베네수엘라에서 있던 동안에 그의 행동이나 말이나, 표정에서 그가 인문학 박사임을 의심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앤 챔버는 그가 직접 총을 들기 전까지, 그가 진짜 기프티드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스즈키라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트레이시는 생각이었다.

다른 이와 있을 때, 그는 완벽히 브랜든 허드슨의 모습을 보였다.

양조학을 전공한 연구 교수처럼, 그의 행동에는 기품이 있었고, 동양인 혈통의 미국인으로 보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가 기프티드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브랜든 허드슨을 연기할 때는 그는 브랜든 허드슨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어, 아침에 로비에서 키스를 해 줄 때라든가.

“뭐, 어찌 보면 생존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한규호가 말했다.

“생존 기술요?”

“꼭 따지자면?”

뭔가 아쉬운 듯 와인병을 들어 올려 병 바닥을 확인하던 한규호는 와인병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이 일이라는 게 그렇지. 보통 목숨 걸고 일하니까, 뭔가 거짓말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 되지 않겠어? 어설프게 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한규호는 그러면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따로 연기를 배웠다는 말은 아니군요.”

“사는 게 수업이고, 만나는 사람 전부가 스승이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당신은? CIA에서 연기도 가르쳐 주나?”

한규호가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네, 가르쳐 줘요. 애초에 어느 정도 연기에 대한 재능이 없으면 현장 요원은 꿈도 꿀 수 없고.”

그 말에 한규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무섭구먼. 또 뭘 가르쳐 주는데?”

“교육에 관한 내용은 기밀 사항이에요.”

“그래서 말씀 못 해 주시겠다?”

“아니요. 기밀 사항인데도 알려 주겠다는 이야기죠.”

“적어도 심리학과 화술은 무조건 들어 있겠군.”

“잘 아시네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는 트레이시를 보고 씩 웃었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기밀 사항인데?”

한규호가 답했다.

“그럼 기밀을 공유하면 되겠군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어떤 기밀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CIA에서 뭘 가르쳐 줬는지 가지고는 딜이 안되겠는데.”

한규호가 말했다.

“알고 싶은 게 있나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싶은 거라…… 서용석은?”

“알아보고 있어요.”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찾지 못하면 아무도 찾지 못해요.”

“일리가 있군.”

“영어는 어디서 배웠나요?”

“대답을 듣기에 아직 부족한데. 뭐, 말해 줄까? 목장(The Farm).”

“스탠포드?”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Die Luft der Freiheit weht).”

“학위를 받았나요?”

트레이시가 질문했다.

그가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받았다면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비밀에 싸여 있는 코드네임 스튜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인데.”

한규호가 답변을 거절했다.

“좋아요. 또 뭘 알고 싶죠?”

트래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눈을 한규호는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면 다음 질문. 목적이 뭐지?”

“목적요?”

“나를 일본으로 데려온 목적.”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눈을 보았다.

와인을 따라 줄 때 그의 눈에 담겨 있던 웃음기와 그의 얼굴에 나타난 다정함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3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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