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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06화 (207/386)

< MISSION 04 : 츠바키 (34) >

트레이시는 오랜만에 한가한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오전 회의가 중단되고, 중단된 김에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 츠네타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마치 몰래 연애하는 사내커플처럼 회사를 빠져나와 신오오쿠보(新大久保)까지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오후 회의마저 캔슬해 버린, 두 사람은 이노가시라온시공원(井の頭恩賜公園)을 산책한 후 다이칸야마(代官山)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소소한 일탈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맞은 편에 앉은 츠네타카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담아 말했다.

“그러게요. 여긴 조용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트레이시도 입가에 작은 웃음을 띠어 그의 미소를 받아 주었다.

“여기는 조용해서 생각하기 좋아요. 저도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몰래 회사를 빠져나와 여기에서 생각을 정리하고는 하지요.”

츠네타카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면서 말했다.

“미스터 츠네타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겠어요.”

트레이시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츠네타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섬세한 부분이 여자들에게 어필할 것 같아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발을 까딱여 보였다.

그녀의 발에는 호텔에서 신고 온 하이힐 대신에, 심플한 디자인의 스니커즈가 신겨져 있었다.

공원을 산책하자며, 츠네타카가 사 준 운동화였다.

“뭐, 인기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 보통 그러면 아닙니다 하고 겸손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트레이시가 웃음을 담아 말했다.

“하하, 그렇게 하는 게 일본인답기는 한데, 페르시아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그런 부분에서는 겸손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도 아직 결혼 못 하셨고요.”

“아픈 곳을 찌르시네요. 안 했다고 해 주세요.”

츠네타카가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런 그의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조금 과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잘생긴 얼굴에, 얼굴과 조화를 이루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와 어울렸다.

웬만한 여자들은 대부분 그런 그의 모습에서 호감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명문대를 나왔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고, 젊은 나이임에도 대기업에서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그는 어떤 여자들에게는 이상형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트레이시는 궁금해졌다. 이 남자가 한규호에게 붙여 줄 여자를 골랐을까?

“점심은 어땠나요?”

트레이시의 생각을 방해하듯 츠네타카가 물었다.

“맛있었어요. 일본 음식 중에서도 그런 음식이 있는 줄 몰랐어요.”

“하하, 아쉽게도 치즈닭갈비는 일본음식이 아닙니다. 한국 음식이에요. 요즘 유행하거든요.”

“그렇군요. 전혀 몰랐어요.”

물론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신오오쿠보가 코리아타운인 것도, 오늘 점심을 먹은 식당이 한국 식당인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동아시아를, 일본을 처음 방문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 트래이시는 자연스럽게 모른 척을 했다.

“맛은 어떠셨나요?”

“굉장히 유니크한 음식이었어요. 양념도 특이하고, 특이한 양념을 바른 닭고기를 퐁듀처럼 치즈와 같이 먹는 방식은. 신기했어요. 맛도 있었고.”

“좋아 해 주니 기쁘네요. 고민한 보람이 있습니다.”

“고민했나요?”

“그럼요. 고민했죠.”

“고마워요. 고민해 줘서.”

트레이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트레이시를 보면서 츠네타카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일 브랜든이 아키타에서 1박을 하게 된다는 소식을 자신과 같이 있을 때 듣게 될 것이다. 실망한 그녀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을 할 것이다.

호텔에 데려가 옷을 갈아입힌 다음, 오늘 신오오쿠보에서처럼 츠네타카가 미리 준비한 미슐렝 레스토랑으로 모셔 저녁을 먹을 것이다.

물론 반주도 곁들여서.

내일의 계획을 위해서 미리 약을 칠 필요가 있었는데, 아주 좋은 분위기로 흘러 가고 있다고 츠네타카는 생각했다.

지금 고민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애블린은 지금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당황하고 있다. 약간의 배덕감, 죄책감도 느끼고 있고,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에 불을 붙일 것이다.

그동안 츠네타카에게 마음을 빼앗겨 왔던 다른 유부녀들처럼 말이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츠네타카의 해석과는 달리, 트레이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에게 자상한 미소를 보여 주는 츠네타카와 대비되는 한규호의 무심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매력적으로 느낄 츠네타카의 미소와 말투, 그리고 그의 자상하고 세심한 배려와는 달리 반면에 한규호는 그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도 않았고, 환심을 사려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마치 어젯밤처럼.

-필요하다면.

아키타까지 동행할 여자와 잠을 자겠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필요한지 당신이 결정하나?

뒤 이어진 그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는 한규호가 그녀의 지시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작전 중이고, 한규호는 그녀를 도와주는 조력자지, 지시를 받는 부하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트레이시는 아니라고 답을 하지 않는 그에게 기분이 상했다. 요원답지도, 그녀답지도 못하게.

그녀는 요 며칠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오랫동안 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츠네타카와 자신의 모습처럼.

그런 그녀의 노력과는 별개로 한규호, 그 남자는 언제나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손이 닫지 않는 거리였다.

아니, 애초에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것조차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했다.

마치 지금의 츠네타카와 자신의 모습처럼.

츠네타카는 트레이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한규호와의 관계에서 그녀가 츠네타카의 포지션에 서 있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생각해보면 자존심이 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여자.

-저 여자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

탄치에서 한규호가 했던 말.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체스터필드에서 그녀가 했던 말.

그 말들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 그 표정이에요.”

츠네타카의 말에, 트레이시의 상념이 깨졌다.

“네?”

“조금 전에도, 오전 회의를 중단하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어요.”

츠네타카의 말에,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미안해요. 모처럼 초대해 줬는데.”

트레이시는 미안함을 표현하는 가면을 썼다.

당신이 이렇게 나를 신경 써 주고 있는데, 미안해요. 그런 표정이 담겨 있는 가면을 썼다.

“애블린.”

츠네타카가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더 낮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가짜 이름을 불렀다.

“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요.”

트레이시는 가면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었다.

“코시자와중공업에서 월급을 받는 나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의 표정을 보니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어요.”

츠네타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트레이시의 눈동자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업무적인 관계로 만났고, 그래서 당신을 돕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제약이 있지만, 적어도 저는 친구로서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고마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피하며 살짝 그의 눈을 피했다.

아주 노련한, 마치 온 마음을 담아 대사를 연기하는 연극배우의 모습 같았다.

츠네타카는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보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배덕감과 죄책감 일부분이 부끄러움으로 전환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시선을 피한 트레이시가 여전히 한규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

잠에서 깨어난 앤 챔버는 시계부터 보았다. 새벽 6시가 좀 안 된 시간이었다.

다시 잠들까 고민하던 앤 챔버는 갈증을 느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나와 1층 부엌으로 걸어가던 앤 챔버는,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1층 거실에,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좋은 아침.”

소파에 앉아 있던 누군가는 앤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뭐 하고 있어? 불도 안 켜고.”

앤은 그렇게 말하며 불 꺼진 거실에 홀로 앉아 있던 챔버가의 손님, 규라는 이름을 쓰는 완에게 다가갔다.

“그냥, 차 마시고 있었어.”

앤은 그녀의 앞에 놓인 다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도 마실래?”

“아니, 난 커피. 내가 타 올게.”

앤은 부엌으로 가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하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 규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자리를 피했지만, ‘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규, 챔버가의 손님이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앤 챔버는 조금 진하게 탄 커피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의 손님이자 친구인 규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 있어도 괜찮아?”

앤 챔버가 물었다.

“그럼. 이리 앉으세요.”

완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면서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알아볼 수 있었다.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그런 미소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각자의 음료를 마셨다.

잔을 들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슬슬 밝아져 오는 새벽 미명을 감상하고 있었다.

“좋다.”

침묵을 깬 것은 앤 챔버였다.

“응? 뭐가?”

완이 물었다.

“이렇게 둘이 앉아서 차 마시는 거.”

“그러네. 좋네.”

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인 것 같아. 이렇게 새벽부터 거실에 앉아서 누군가랑 차 마시는 거. 엄마는 항상 바빴고, 그래서 나는 보통 혼자 있었으니까.”

앤 챔버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면서 말했다.

“외로웠겠네.”

“그때는 몰랐어. 그게 당연한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네가 이 집을 떠나면 외로워질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눈물 날 것 같은데.”

앤 챔는 여전히 시선을 창문으로 향한 채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완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차라리 없었으면, 그냥 그렇게 없구나 하고 살 텐데. 있다가 없으면 왜 더 괴로운 걸까?”

앤 챔버가 말했다.

“저 아직 안 떠났는데요, 챔버 아가씨.”

완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앤 챔버의 손을 잡아 주면서 말했다.

“그래, 아직은.”

앤이 말했다.

“그래, 아직은.”

완이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각자의 음료를 입으로 가져갔다.

“떠날 거야?”

앤 챔버가 물었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엄마 이야기와는 다르네.”

“뭐, 그렇게 말씀하셨지.”

“엄마가 틀린 것일까?”

완은 대답 없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두 사람이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각자의 잔을 들고 음료를 홀짝거렸다.

그리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또다시 앤 챔버였다.

“얼마 전에 베네수엘라에 다녀왔어.”

앤 챔버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3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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